< -- 31 회: 7장. 퍼스트 도퍼 -- >
7장. 퍼스트 도퍼(2)
“이제야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한참의 소동 끝에 엠마는 정석을 두들겨 팬 뒤 자신의 사무실로 끌고 왔다. 정석은 호텔 가운만 두른 채였다. 엠마가 킬힐로 걷어차고 뺨을 빼려도 무덤덤했던 정석은 엠마가 끌고 온 곳의 광경을 보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분위기는 싫어.”
엠마의 사무실에는 책상 위에는 일반인들은 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약들과 각종 실험도구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어때요? 옛날 생각도 나고 좋잖아요? 마침 그런 복장이고.”
엠마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서 커피까지 마시자 한결 느긋해진 목소리로 변했다. 그 말에 정석은 정신이 번쩍 든 듯. 불안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며 호텔 가운의 옷깃을 여몄다.
“저기. 그럼 밀린 레이드 정산을 해도 되겠습니까?”
뒤쪽에 조용히 서 있던 채영이 태블릿 PC를 조작하면서 말을 걸었다.
미국에서 도망친 도퍼 범죄자를 잡겠다며 국내로 입국한 정석과 그의 레이드 팀원들은 도착하자마자 해치운 몬스터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정석이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드라이브하고 싶다고 해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서 여러 몬스터들을 닥치는 대로 사낭했다.
심지어 채영이 긴급호출을 받고 인천항에 도착했을 때는 정석과 엠마 그리고 같이 온 미국도퍼 네 명. 도합 6명이서 국내에서 처음 발생한 A급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었다.
얼마나 날뛰었는지. 퍼스트 도퍼의 전투를 구경하러 온 국내 도퍼들이 일부 휩쓸려 부상을 입었다. 또 인천항에 접항하고 있던 배들과 시설물 파손이 커 몬스터에 대한 피해보다 더 크다고 추정하고 있었다.
“아뇨 아뇨. 몇 번이나 저희는 정산할 필요 없어요.”
“그래도.”
채영은 엠마의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 말인즉, 몬스터 사체를 미국으로 운반하겠다는 이야기로 미국에서는 해외파견 나올 때마다 저런 횡포를 부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미 어느 나라에서도 자국에서 퇴치된 몬스터의 코어나 사체 등은 자국의 귀중한 자원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관례라고 무턱대고 넘길 수는 없었다.
“아 뭐 줘버려 우리가 저거 먹자고 온 것도 아니잖아.”
“미스터 노!”
엠마가 정석을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다른 담당자들이 저런 소리할 때마다 정석은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개소리하지 말라면서 담당자들이 병원 신세를 지게 했다.
하지만 유난히 채영에는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가끔 노정석이 한 번씩 방문해서 미국이 휘저을 때마다 채영이 긴급호출되는 건 이런 이유였다.
“그리고 그 뭐냐. 다크매터 건도 물어봐 밤새도록 혼자서 머리 싸매지 말고. ”
“아 정말!”
엠마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채영이 정석의 모습을 보니 쌤통이라는 듯이 혀를 메롱 하고 내밀고 있었다. 결국, 다 귀찮아졌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저희가 이번에 한국에 온 이유는 두 가지에요. 표면적으로는 도망친 도퍼 범죄자를 잡는 거. 두 번째는 이 소재에 대한 거.”
그러면서 책상에 어지럽게 놓여있는 특수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꿇어 오르는 진흙처럼 끊임없이 꿈틀대고 있는 시커먼 덩어리가 있었다.
“이건...”
“본적 없다고 말씀하진 마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엠마는 다시 뚜껑을 닫았다. 채영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물질은 국내에서 최초로 강현이 발견했다. 설치류 형태의 몬스터를 잡았을 때 코어대신 저 물질만 가득 남아있었다. 연구하는 과정에서 미국에서 관심을 보여 전부를 가져가 버렸는데. 상부의 어느 쪽도 딱히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채영의 수완으로 그 몬스터를 조우하고 퇴치한 유강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두 번째 발견했을 때는 1인당 2억까지 지급해가면서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다. 그때도 강현이 있었다. 엠마의 말을 들으면서 유강현이 이 자리에 없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 전에 이곳에 올 때 데려오지 않았던 게 정답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얻은 거예요?”
“그건...몬스터 레이드중에 우연히 발견된 겁니다.”
딱 잘라서 이야기하는 채영을 보고 엠마가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보고 채영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우연이라고요? 두 번이나요?”
엠마의 말에 채영은 눈을 치켜떴다.
*****
온라인 게임에서의 폐관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강현은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그런 다음에 죽으라고 온라인 게임만 해서 그동안 등한시한 도퍼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했다.
자신의 아이디쪽에 편지봉투 모양의 아이콘이 반짝거리고 있는 걸 보고 클릭하자. 새 창이 뜨면서 받은 쪽지 목록들이 쫘르륵 나타났다. 그 목록을 보고 강현은 깜짝 놀랐다.
예전에 쪽지함이라고는 수지짱과 달리기 위해서 사용했던 게 전부였는데. 그 쪽지함이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그 쪽지의 발신인은 모두 수지짱. 함수지였다.
“많이도 보냈네. 차라리 문자를 하지. 하긴 아직 제대로 문자 주고받은 적도 없지? 어쨌든 정말 많긴 하다.”
강현은 질렸다는 듯이 모니터를 쳐다봤다.
쪽지 내용은 참 다양했다. 레이드 직후에는
-집에 잘 들어갔삼?
부터 시작해서.
-이번에 좋은 레이드 건수가 있는데 갈 생각있으셈?
-답변이 없는데 혹시 삐친 거 아니셈?
-그것보다 전에 이야기한 뒤풀이 언제 했으면 좋겠삼?
이런 내용의 쪽지가 이 삼일 간격으로 꾸준히 와있었다.
“아참. 뒤풀이는 확실히 해야지. 그 뒤로 연락을 따로 안 했었구나. 저 쪽팀은 이미 익숙하니까 레이드하기도 좋을 테고. 꼭 연락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쪽지를 하나하나 읽어갔다.
강현 자신이 [ 몬스터 레이드 온라인 ] 게임에서 공개된 모든 캐릭터의 만렙을 찍은 만큼.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레이드를 할 필요는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에 중국 작업장 쪽 인원을 고용하고 캐시템으로 무장시킨다든가. 단기 원룸오피스텔에서 숙식하면서 지낼 때라든가 이래저래 벌어놓은 돈도 거의 다 써가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녀석도 서비스 종료 전에 완전히 처발랐지만 그렇게 개운하지 않았지?”
강현은 어제 일을 떠올렸다. 몬스터 레이드 온라인 게임이 서비스 종료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불똥과 함께 샤론과 로즈길드 일당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갔다.
의기양양하게 웃는 얼굴에 제대로 한 방 먹였을 때까지는 속이 시원했는데. 불똥이 같은 넷카마. 아니 넷카마 선배로서 동류를 만났다는 게 너무 반가워서인지. 다시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하게 괴롭히는 걸 목격해버렸다.
거기다가 그렇게 당하고 있으면서 왜 로그아웃을 않느냐고 생각했는데. 때마침 그때. 집으로 형사들이 찾아와서 어수선한 상태였었다고 한다. 그렇게 당하는 와중에 컨트롤헬멧에 남은 데이터를 없애려고 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다음날. 언론에 샤론들의 범죄사실을 다룬 거 같은 내용의 기사를 봤지만 크게 마음에 두진 않았다.
“이런. 한동안 레이드 안 뛴다고?”
마지막 쪽지를 읽고는 강현이 안타까움을 느꼈다.
수지짱은 이 이번에 국내에 들어온 퍼스트 도퍼를 자신의 패거리들과 함께 구경하러 간다고 했다. 혹시 급한 일이 있으면 연락 달라고만 적혀있었다.
“퍼스트 도퍼가 뭐가 그리 대수라고.”
강현은 왠지 모르게 퍼스트 도퍼 노정석이 미웠다. 강현도 노정석에 대해서 티비에 다루는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었다. 능력적으로는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국가를 배신하고 팔아먹은 매국노에 인성이 개판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함수지가 그런 놈이나 구경하러 가다니 의외인걸?”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깜짝 놀란 강현은 황급히 쪽지창을 꺼버렸다.
‘이러니까 내가 질투하는 거 같잖아.’
그때 강현의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앗 소유양한테서 문자가.”
설소유가 보낸 문자였다.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고 해놓고는 그 뒤로 연락이 없어. 결국, 흐지부지되는 줄 알았는데. 매우 반가웠다.
소유와 강현이 문자로 대화한 내용인즉.
소유는 강현과 단둘이 저녁 식사를 하면 강현이 심심해할지도 모르니. 자신의 절친을 같이 데려온다고 했다. 그 친구도 강현과 마찬가지인 도퍼에다가 레이드 팀까지 운영하는 실력자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강현은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소유양이 자신 있게 소개해준다는 여성 도퍼라. 과연 얼마나 미인인 걸까?”
그렇게 생각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소유 씨를 내버려두고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게다가 절친이라는 분도 퍼스트 도퍼 보러 간다고 가버려서 날짜를 못 잡아서 연락이 늦었다고 했잖아.”
어쨌든. 강현은 언제든 시간이 괜찮다고 날짜 잡히면 연락 달라고 하고 마지막 답변을 보냈다.
*****
소유한테는 그렇게 문자를 보냈지만. 강현은 도퍼 커뮤니티에서 레이드 팀을 모집하는 게시물을 살펴봤다.
여전히 힐러 모집 글이 앞도적으로 많았다.
“귀찮으니까 이번에는 그냥 힐러 포지션으로 넣어버릴까?”
그렇게 생각한 강현은 내일 당장 출발하고. 되도록 근처. 그리고 낮은 등급의 몬스터를 사냥하는 모집 글을 하나 발견하고는 클릭했다.
거기다가 힐러로 참가 신청을 했다. 힐러 포지션으로 일단 무난하게 원딜과 비슷한 5등급으로. 강현이 참가신청을 마치자마자. 그 아래로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이전 레이드 내역을 살펴볼 수 있는 시스템 덕분에. 강현이 예전에 슈터로 레이드에 참가했다가 이번에는 힐러로 등록했다는 것 때문에 거짓말하고 있다면서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전에 수지짱과의 말다툼으로 시작된 논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몇몇 사람들이 예전 링크를 들고와서 이야기를 해줬고
결정적으로 이 레이드팀의 리더인 탱커 오광수가 강현이 복합 능력자라는걸 수지짱에게 인정받았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팀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해서 금방 논란은 진정됐다.
“이쪽 커뮤니티에서는 수지 이름이 꽤 먹히는걸.”
*****
다음날 아침.
강현은 어제 레이드 장소라고 들었던 경기도의 한 야산 입구에 차를 타고 왔다. 이미 십여 명가량이 모여있었다.
그 앞에 눈에 띄게 한가로이 서 있는 수지 쪽의 담당자였던 김지훈이 보였다.
“유강현님 안녕하세요.”
지훈이 먼저 강현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지훈은 한 달 새에 처음 봤을 때보다 안색이 많이 좋아 보였다.
“네에. 오랜만입니다. 저기 오광수 님. 여기 유강현임 오셨습니다.”
“이쪽이?”
부지런하게 사람들 사이를 오가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내가 지훈의 말을 듣고 강현에게 다가왔다.
“반갑소. 내가 이번 레이드의 리더인 오광수요. 뭐 복합 능력자라고 들었는데 그래도 아직 레이드 몇 번 못해본 초짜라고 들었으니까 너무 나대지는 마소. 지시에 잘 따르고.”
“...네.”
하대하는 광수가 기분 나빴지만. 강현은 먼저 트러블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기에 참고 넘어갔다.
“먼저 온 우리들이 벌써 정찰도 끝냈으니까. 슬슬 시작하고도. 예거도 먹어두고.”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놀랍네요. 전에 수지님쪽은 이 정도로 체계적이진 않았는데.”
“당연하지.”
강현의 칭찬에 으쓱해진 광수는 고개를 들고 코웃음을 쳤다. 강현은 왠지 광수가 수지에게 라이벌 의식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 끼어들기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지 지훈이 좀 더 부연 설명과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미리 확인해본 결과 B급의 웜 몬스터입니다. B급이라고 해도 특이할 정도로 거대한 개체입니다. 가끔 주위에 소형 개체가 매복해 있을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조심히 진행해주세요.”
“걱정하지 마! 나를 뭐로 보고 신참앞에서 쓸데없는 소릴 해!”
광수는 지훈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지훈에게 버럭 화를 냈다. 지훈은 고개를 떨구고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네.”
두 사람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예거를 먹은 강현은. 산등선 이의 한 곳을 주목하고 있었다.
‘저기로군. 저 정도의 존재감이 B급 몬스터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