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 회: 3장. 붉은 하마 함수지 -- >
3장. 붉은 하마 함수지(6)
“저, 정신 좀 드삼?”
강현이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수지의 모습이었다. 수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는데 정말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강현이 다시 기절할만한 결정적인 대사를 날렸다.
“정말 다행이삼.”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눈물을 훔치는 수지의 모습을 강현은 외면하기로 했다.
“여긴... 어디?”
강현이 주변을 살피면서 물었다. 병원침대와 뒤쪽의 바이털사인을 표시해주는 기계를 봐서는 일단 병실로 보이긴 했다.
하지만 1인실인데다가 얼핏 봐도 비싸 보이는 고급 명화와 예술품이 곳곳에 놓여있었다. 바닥에는 고급스러운 카펫에 널찍한 가죽 소파. 침대 정면에는 대형텔레비전 그리고 냉장고까지.
거의 고급호텔을 방불케 했다.
“이곳은 도퍼 전용 병실이삼.”
이어지는 수지의 설명은 이랬다.
강현을 집어삼킨 뱀 몬스터가 갑자기 정체불명의 검은 물질로 변해버렸다. 수지가 거기에 와서 강현을 끄집어냈는데, 힐러들에게 부탁해서 아무리 힐을 걸어도 깨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이에 담당자가 응원부대를 요청해서 정부 도퍼들이 파견 나와서 그 지역에서 겨우 탈출해 이쪽으로 옮겨왔다고 했다. 옮겨진 뒤 병실에서도 계속해서 힐러들이 힐을 해줘서 이제야 깨어났다고 했다.
설명을 듣고보니 그야말로 구사일생이었다.
“덕분에 무사했네. 고마워.”
“으응.. 아무것도 아니삼.”
말하면서 수지는 창피한 듯 얼굴을 휙 숙였다. 강현은 도대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소파에 시선이 갔다.
거기에는 같은 레이드 팀원이었던 힐러 두 명이 너부러져 있었다. 둘 다 안색이 파리한 게 수지가 힐을 부탁한 게 아니라 뼈가 삭을 정도로 뽑아낸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걸 확인한 강현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곧장 소파쪽으로 가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 네에. 별거 아니에요.”
“강현님이 인사하는데 퍼질러서 받으삼?”
‘응? 왜 강현님?’
수지가 버럭 하자. 힐러 둘이 벌떡 일어났다. 군기 바짝 든 게 갓 자대배치 받은 이등병 못지않았다. 강현이 수지의 태도에 더욱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보다 괜히 쉬는 데 방해한 거 같아서 더욱 미안했다.
“아, 아냐. 이분들도 좀 쉬셔야지. 저보다 안색이 안 좋아 보입니다.”
“하하...”
힐러들이 서로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긴장이 풀렸는지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보다 아까 지원 왔을 때. 장난 아니었지? 난 일급요원들이 그렇게 몰려온 건 처음 봐. 분위기 되게 험악했잖아.”
“그러게. 무슨 보안서약서까지 작성하라고 하고. 그 여자 담당자 얼마나 무섭던지 칼처럼 딱딱 처리하는 게 우리 담당자랑 너무 달랐단 말야. 무슨 컴퓨터도 아니고.”
두 힐러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한 사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설마?’
“유강현씨 일어나 있나요?”
그 말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면서 채영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고 수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님 중환자실에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오면 어떻하삼?”
“제 계산으로는 이제 충분히 회복하고 의식을 차렸을 시간입니다. 아니라면 꾀병 부리면서 도퍼 병실을 점유하면서 국고를 축내고 있으신 거겠죠.”
채영은 노도와 같이 쏟아 붙이면서 강현을 쳐다봤다. 수지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네네. 이제 나았어요.”
강현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쪽 담당자가 더 낫다는 소릴 하는 게 아니었어.’
*****
채영이 병실에 있던 모든 사람을 이끌고 간 곳은 병원 2층에 있는 회의실이었다. 거기에는 원래 수지팀의 레이드 담당이었던 김지운 담당자와 남은 레이드 팀원. 그리고 입구를 지키듯 정부 측 도퍼 요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도퍼 요원이면 최소 5등급이라고 했지?’
강현은 문을 지나치면서 힐끗 봤다.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요원들은 미동도 하지 않아 로봇처럼 보였다.
레이드 팀원은 기다란 테이블 빙 둘러 앉아있었는데 화이트보드의 반대쪽 끝 중앙에 수지의 자리와 내 자리가 비어있었다.
‘이런 데 앉는 취미는 없는데.’
거기다 바로 수지의 옆자리라 아무리 앉아도 비좁아 보였다.
“자 사인하세요.”
자리에 앉자마자 채영이 서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서약서가 적혀있었다.
“아까도 저분들이 서약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건 왜 쓰는 건가요?”
“그건 뱀 몬스터가 쓰러지면서 생긴 검은 물질에 대해서 함구하겠다는 거였어요.”
힐러가 그렇게 설명해줬다.
“그거라면... 저번에 제가 쓰러트린 설치류 몬스터랑 같은 거죠?”
“조용히!”
채영답지 않게 빽 소리쳤다. 꽤 열 받았는지 쭉 뻗은 눈썹이 삐뚤어졌다.
“지금 거기에 대해서 함구하라는 서약서를 쓰게 하고 있는데 당신은 정말.”
“이게 누구더러 당신이라고 하는 거삼?”
열 받은 수지가 벌떡 일어났다.
“저기..일단 그건 다들 쓰셨으니까 강현님도 얼른 써주시고. 레이드 정산을 시작하죠. 많이들 기다리셨는데.”
“옳소.”
담당자 김지훈이 끼어들어 중계하자 도퍼들 사이에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수지가 그들을 휙 쳐다봤다. 그러자 쥐죽은 듯이 입을 딱 다물었다.
“휴우. 알았으니까 얼른 진행하죠. 저 때문에 많이들 기다리셨을 텐데”
“음. 님이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삼”
수지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강현이 채영으로부터 건네온 서류를 받았다. 정산이 끝나고 읽어보고 사인하겠다고 하자. 채영은 그걸로 만족한 듯이 김지훈 담당자 옆에 섰다.
김지훈 담당자는 채영에게 시작해도 되겠느냐고 눈빛을 보내자. 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은 서류를 보면서 이런저런 설명과 함께 정산금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채영 씨한테 꼼짝 못 하는 거 보니까 선후배 사이일까?’
수지와 지훈의 관계 못지않게. 채영과 지훈의 관계도 재미있어 보였다.
먼저 계산된 정산금은 개구리 몬스터를 사냥해서 얻은 코어 와 사체였다. 사체는 의외로 가격이 쌌는데, 대부분 식용으로 처리된다고 부가 설명을 덧붙였다.
도퍼들쪽에서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왜 새삼 인제 와서 설명하고 있느냐며 항의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지훈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규정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채영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어쨌든 뱀 몬스터의 등장 때문에 개구리 몬스터의 사냥시간은 꽤 짧았기 때문에 개인당 돌아가는 정산금이 1억이 조금 넘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딱 봐도 높은 등급이었던 뱀 몬스터의 정산이었다.
“일단 드문 일이긴 합니다만, 이번 뱀 몬스터 사냥 후 획득한 코어는 없습니다.”
지훈이 그렇게 이야기하자마자. 도퍼들 사이에서 말도 안 된다며 불만이 터져 나왔다. 몬스터 가격의 대부분은 코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조용! 현장을 확인한 바로는 대부분이 뱀 몬스터의 정산금에 대한 권리가 없습니다.
점점 소란이 커지자. 채영이 소리쳤다.
일반적으로 몬스터 레이드 후에 나오는 정산액은 분란이 생기지 않게 인원수에 나눠서 분배한다.
하지만.
제대로 정산금을 못 받을 경우가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도퍼 자격증을 취하지 못하고 몬스터를 사냥했을 경우. 이 경우에는 일반인이 마구잡이로 몬스터를 사냥했다가 피해가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해서이다.
둘째로는 몬스터를 쓰러트리는 데 기여를 제대로 못 했을 경우. 레이드에는 참가했지만 탱커 임에도 단번에 쓰러져버린다든가. 몬스터에게 전혀 딜이 안 들어간다든가. 하는 경우에 정산을 못 받았다. 이는 레이드를 진행하는데 자신의 실력에 맞지 않는 레이드에 끼어들어서 되려 발목을 잡는 걸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예거를 먹지도 않고 딜하는 시늉만 하고는 레이드에 참여했다며 정산해달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셋째로는. 강현이 아직 겪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정산금을 높이기 위해서 레이드 후 다른 도퍼를 공격해서 살해했을 경우다.
마지막 경우에는 발각되면 정산금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당연히 도퍼 자격증을 박탈하고 체포된다.
강현의 경우 첫 번째 두 번째 경우 모두 겪어서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여기 도퍼들 대부분이 두 번째 상황에 적용됐으리라.
“그럼 계속하시죠.”
겨우 조용히 시킨 채영이 지훈을 쳐다봤다. 지훈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 계속 진행했다.
“어쨌든. 이번에 정산받으실 도퍼님은 유강현님과 함수지님입니다. 각각 5억씩 되겠네요.”
회의실 내의 공기가 술렁였다.
두 사람은 앞서 개구리 몬스터의 정산금을 더해서 한번에 6억 정도까지 벌어들인다는 소리였다. 수지도 생각보다 높은 숫자에 놀랐다.
즉각 주위에 자기가 받은 몫은 나눠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자기 패거리들에게 이야기했다. 그제야 패거리들은 진정되는듯했다.
강현도 눈치도 보이고 순간적으로 그렇게 나눠버려 주고 싶었다. 앞으로 도퍼 생활을 생각하면 돈 버는 건 문제없을 테니까. 괜히 너무 욕심부리는 듯 보이기 싫었다.
하지만.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돈 때문에 고생한 동생을 생각하면 선심 쓰듯 쉽게 나눠줄 수는 없었다. 아직 아파트 대출금이며 각종 빚이 남아 있을 테니까.
그때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채영답지 않게 흥분하는 모습. 출동한 일급 도퍼 요원
그게 합쳐지면서 무언가 떠올랐다.
“잠깐만요.”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강현이 입을 열자 모두 주목했다.
“이거 말이죠. 비밀유지 서약서라며 거창하게 쓰여 있는데. 쓴다고 해서 뭔가 혜택은 없나요?”
“그건 그냥. 의례적으로 쓰는 겁니다.”
지훈의 식은땀이 배는 늘었다. 채영도 혀를 찔렸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의례적이라고요? 전 레이드 처음이라도 이런 의례를 잘 모르겠는데. 혹시 이런 거 쓴 적 있어?”
“아니 없삼.”
“그래요. 아까는 도퍼 요원들 기세 때문에 사인은 하긴 했는데...저도 처음 써봐요. 누설하면 도퍼자격 박탈이라니.”
얼굴이 익숙한 근딜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뭘 원하는 거죠?”
채영이 굳은 표정으로 물어왔다. 표정을 더욱 놀라게할 생각이 들자 왠지 즐거웠다.
“2억.”
강현의 제시에 채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주변의 다른 도퍼들도 웅성거렸다.
“맙소사”
“종이쪼가리 하나에 2억이라고?”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이미 사인했잖아.”
소란스러운 도퍼들을 향해. 채영이 쏘아붙였다.
“다른 분들은 이미 사인하셔서 안 됩니다. 만약 누설하신다면 쓰여있는 그대로 도퍼 자격을 박탈할 겁니다.”
“월권행위다.”
“정부 놈들이 하는 일들이 다 그렇지.”
돈이 걸리니까 다들 눈이 뒤집혔다. 채영의 말에도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자자. 싸우지 마시고 조용히 해주세요.”
강현이 말을 이어가기 위해서 나섰지만. 웅성거림은 더 커져만 갔다. 그때.
“조용히 하삼!”
수지가 발을 쿵 하고 굴리면서 외쳤다. 그러자 도퍼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강현이 수지를 보며 웃으면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아니삼... 계속 이야기하셈.”
금방의 박력은 어디에다 팔아버렸는지 수줍은 목소리로 다시 얼굴을 푹 숙였다.
“이미 계약서에 사인하신 분들이 계시다... 그럼 전 이 계약서를 좀 수정해야겠네요.”
채영은 이제 거의 레이저로 변한 눈빛으로 강훈을 쳐다봤다. 저 정도면 눈빛으로 사람을 살인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앞으로 한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된다고 생각한 강훈이 자신의 조건을 밝혔다.
“제가 받는 2억에 더해서 다른 분들도 기밀유지의 조건으로 2억을 받을 수 있도록 재계약하는 겁니다.”
강현의 말이 마치자마자 소회의실이 떠나갈 듯 함성이 터졌다. 다들 고생하고 1억 조금 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거기에 손에 안 잡히던 2억까지 더해지자 누구도 불만을 가지지 않은 듯 보였다. 강현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돌렸다.
“우와 짱이다.”
“이보다 더 명판결은 없을 겁니다.”
“2억이라니 이걸로 뭐 사러 갈까?”
“난 스포츠카부터 뽑을 거야.”
“유강현 만세다! 만세!”
도퍼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서로 떠들었다. 그 모습을 수지가 흐뭇하게 지켜보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에헷. 다들 봤삼? 우리 강현님이 원래 좀 쩜.”
‘아니 수지 넌 왜 자랑스러워 하는 건데? 그보다 우리 강현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지의 말투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던 채영에게 말을 걸었다.
“정부 측에서도 그냥 종이 쪼가리 한 장에 입을 틀어막는 것보다 금전까지 걸어두는 게 좋을 겁니다. 발설하면 회수한다는 조항 정도 추가하면 되겠죠.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정보라면 말이죠.”
그 말에 채영이 굳은 얼굴을 한결 풀었다. 괜히 정부 측과 척을 지는 것으로 보였지만. 채영이라면 손해 득실을 따져서 납득해 줄리라는 것과. 차후에 이번 일로 담당자로서 사심을 개입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지를 수 있는 일이었다.
“좋죠. 그렇게 하죠.”
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성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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