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5화 (216/217)

Chapter 11 에어스트 대륙

거대한 동공에 피로 이루어진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수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한가운데서 파문이 일어나더니 거칠게 출렁였다.

호수 곁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깁스 남작은 잔뜩 긴장했다. 부디 저 안에서 나올 괴물이 일말의 이성이라도 갖고 있기를 기도했다.

촤아아아아!

출렁이던 호수의 피가 순식간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존재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쏴아아아아아!

호수 밑바닥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는 존재에게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싹 흡수되었다.

번쩍!

사내가 눈을 뜨자 동공 안이 핏빛으로 가득 찼다.

깁스 남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신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저 호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존재는 과거의 그 어떤 약속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한없이 차가운 눈빛이 그걸 증명했다.

"크흐흐흐흐. 드디어 완성되었구나."

깁스 남작은 그 목소리에서 거대한 악의를 느꼈다. 그리고 그 악의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향하는 것도 함께 느꼈다.

"커억!"

깁스 남작이 고통스럽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핏빛 사내가 천천히 걸어 깁스 남작 앞에 도착했다.

"생각해 보니 내 종이로구나. 살려 주마."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깁스 남작을 압박하던 악의가 씻은 듯 사라졌다.

"허억! 허억! 가, 감사합니다!"

사내가 깁스 남작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동공 위를 올려다봤다.

쩡!

동공 윗부분이 싹 날아가 버렸다. 말 그대로 사라진 것이다. 사내가 쳐다본 것만으로 산 하나가 증발해 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동공은 작은 산 아래에 있었으니까.

그걸 본 깁스 남작이 덜덜 떨었다. 상상을 초월한 힘이었다. 이런 존재가 세상으로 나가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니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끝장이다. 세상은 다 끝났어.'

그냥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거대한 악의로 이루어졌다. 아마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멸할 것이다.

그렇게 떨고 있을 때, 동공 위 뚫린 구멍을 통해 뭔가가 뚝 떨어졌다.

깁스 남작은 화들짝 놀라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나타난 자는 상상치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제, 제론 폰 에어스트?"

제론이 씨익 웃으며 깁스를 노려봤다.

"너로구나."

제론은 깁스 남작이 어떤 사람인지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마티를 통해 무수한 정보가 뇌리에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정리해서 착착 정보로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통해 깁스 남작이 엠페리움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에어스트 가문을 몰락시킨 원흉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넌 일단 거기서 지켜보고 있어라."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텅!

깁스 남작이 힘없이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몸에 큰 충격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통스러웠다.

놀라운 것은 그가 벽을 파고들어 꽉 박혔다는 점이었다. 보통 사람이 그 지경이 되면 온몸이 으스러질 것이다. 한데 몸은 멀쩡했다.

깁스 남작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제론에게서 거대한 뭔가가 느껴졌다. 엠페리움의 왕을 볼 때와는 또 다른 공포가 슬금슬금 밀려왔다.

어쨌든 그는 꼼짝없이 그곳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예 움직이질 못했으니까.

제론은 눈앞에 선 존재를 가만히 쳐다봤다. 온통 핏빛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가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기에 찾아온 것이다.

"엠페리움의 왕답지 않군. 아예 마왕이 되어 버렸는데?"

"크흐흐. 피와 쾌락의 왕이지."

사내는 마왕이라는 말에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크흐흐흐. 거슬리는 놈이로군. 죽어라."

사내가 손가락을 들어 제론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통해 악의 덩어리가 튕겨 나갔다. 조금 전 산을 날려 버린 것보다 수십 배는 더 강력한 일격이었다.

제론은 손을 들어 그것을 잡았다.

꽈드드득!

제론의 손을 갈아 버리겠다는 듯 악의 덩어리가 맹렬히 회전했지만, 제론의 손을 망가뜨리지도, 거기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소멸했다.

그제야 사내의 표정이 변했다.

"넌 뭐냐?"

"알 필요 없다."

제론이 사내를 향해 한 발 걸었다. 그러자 어느새 사내 앞에 나타나 사내의 목을 쥐고 있었다.

사내가 당황하며 몸부림쳤다.

"크아아아아아!"

괴성을 내지르며 반항했지만 온 세상의 힘을 한 몸에 지닌 제론의 힘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태어나선 안 될 균열 같은 존재로군."

사내를 쥔 제론은 더더욱 그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었다. 세상을 몸에 담으며 세상의 흐름을 파악했다. 초고대문명에서 상차원의 비밀이라고 여겼던 것이 바로 세상의 흐름이었다.

엠페리움의 왕은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존재였다. 세상의 균열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내버려 두면 세상을 파괴할 것이다.

제론의 손에 막대한 기운이 어렸다.

왕의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다.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소멸을 눈앞에 두니 어쩔 수가 없었다.

파스스스스.

엠페리움의 왕이 그 표정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제론은 손을 탁탁 털고는 돌아서서 벽에 박힌 깁스 남작을 쳐다봤다.

깁스 남작은 벽에 박힌 채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었다. 감히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인 왕을 가루로 만든 자였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제론은 손가락을 틱 튕겼다.

퍽!

깁스 남작이 그대로 사라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든 원흉인 깁스 남작을 살려 둘 수는 없었다.

제론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모든 것이 끝났다.

"아니, 아직 끝난 건 아니지."

제론이 씨익 웃었다. 아직 등록하지 못한 유적이 무수히 남아 있었다.

크란 제국을 제외한 나머지 유적은 거의 다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직 잔뜩 남아 있었다.

게다가 크란 제국도 아직 발을 들이지 못한 두 왕국도 남아 있었다. 그곳의 유적에는 아직 손도 못 댔다.

1년 내내 눈보라가 몰아치는 북쪽 끝, 슈네 왕국과 사막 속에 있는 비스테 왕국 말이다.

제론은 천천히 걸어서 동공을 나섰다. 이제 정말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크란 제국이 시작한 대륙정복전쟁은 결국 제국의 패배로 끝났다.

크란 제국의 선봉이 전멸하고 본진이 유린당한 상황에서 에어스트 왕국의 아모르 군단이 파죽지세로 진격해 크란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거기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것은 에어스트 왕국의 새로운 기사단이었다.

30기의 기간트로 이루어진 기사단이었는데, 그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크란 제국군의 기간트 부대가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어찌나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지 종적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전술도 상당히 훌륭했고, 기간트의 성능 자체가 달라서 크란 제국군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기사단의 이름은 디아스티마였다. 에어스트 왕국에서 디아스티마 기사단의 존재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은 오로지 국왕인 제론뿐이었다.

어쨌든 에어스트 왕국은 크란 제국을 무너뜨려 흡수했다. 시작은 크란 제국이 했지만, 대륙 정복은 에어스트 왕국이 한 셈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크란 제국을 정복한 뒤, 제국에서 암약하던 비밀 조직을 색출한 다음, 크게 공표했다.

엠페리움은 그렇게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몰락과 함께 말이다.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목이 잘려 가장 잘 보이는 성문 위에 효수되었다.

사람들은 엠페리움이라는 조직이 수백 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크란 제국 황실 자체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끝났다. 크란 제국은 물론이고 전 대륙에 걸쳐 흩어져 있던 엠페리움의 모든 조직원이 색출되었고,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았다.

그렇게 엠페리움이 사라졌다.

전쟁이 끝난 뒤, 에어스트 왕국은 제국으로 칭호를 바꿨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을 에어스트 대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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