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13/217)

Chapter 10 유적 클리어 (2)

크란 제국군에 멋지게 한 방 먹인 덕분에 제법 많은 시간을 번 제론은 곧장 유적으로 향했다.

계속해서 드는 꺼림칙한 느낌을 해결하기 위해선 일단 유적 클리어 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건 확신이었다. 이번에 얻은 깨달음 때문에 갖게 된 확신 말이다.

에어스트 왕국은 여전히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크란 제국군에 한 방 크게 먹이긴 했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크란 제국의 저력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아마 다음 공격은 훨씬 거대한 규모로 압박해 올 것이 분명했다.

에어스트 왕국은 그걸 막아 내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아모르 생산에 박차를 가했고, 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전쟁에는 이겼지만, 에어스트 왕국도 피해가 없을 수는 없었다. 아니, 제법 피해가 컸다.

물론 그 정도 피해로 크란 제국을 막아 냈으니 엄청나게 잘 싸운 것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당장 한 번 이겼다고 모든 전쟁이 끝난 게 아니었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사실 냉정하게 따지면 이 전쟁은 에어스트 왕국에 극도로 불리했다. 하지만 왕국민 누구도 전쟁에서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수뇌부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수뇌부는 오히려 더 승리를 확신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제론은 왕이라기보다는 신에 가까웠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몽땅 해결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니 아무리 크란 제국이 강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크란 제국에 힘이 있다면 에어스트 왕국에는 제론이 있었다.

그것이 에어스트 왕국의 수뇌부가 바라보는 제론이었다.

제론은 당분간 자신이 없어도 크게 상관이 없도록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유적에 갔다.

유적에서도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도전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아주 간단히 6기의 기간트를 물리쳤다.

이제 남은 건 7기의 기간트뿐이었다. 거기까지 클리어하면 벨트의 모든 아공간을 기간트로 채우게 되는 셈이었다.

즉, 30기의 기사가 생긴다는 의미였다.

"마지막 하나는 기사단장이려나?"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제론은 맨몸으로 완전한 성능을 발휘하는 이스히스, 타히티, 마크리아를 상대해야만 한다.

물론 자신 있었다,

제론은 곧장 유적으로 내려갔다.

"호오. 분위기가 정말 다른데?"

분위기뿐 아니라 시작하는 방식도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내려오자마자 6기의 기간트가 보였다. 마치 제론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제론은 6기의 기간트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완전한 성능을 발휘하는 기간트였다. 아마 예전이라면 1분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기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냥 시작하면 되나?"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간트들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엄습하는 강렬한 기운에 급히 몸을 옆으로 굴렸다.

화아악!

어마어마한 빛이 제론이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제론은 자세를 잡으며 기운만으로 자신을 공격한 존재를 확인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형태의 기간트였다.

머리에 뿔이 세 개나 달렸고, 어깨에도 뿔이 촘촘히 나 있었는데 이스히스나 타히티, 마크리아와는 다르게 검을 들고 있었다.

"이름이 뭐지?"

―디아스티마.

"기사단장인가?"

―그렇습니다.

제론은 눈을 빛냈다. 조금 전의 대화는 유적 시스템과 한 것이 아니었다. 디아스티마와 직접 나눈 대화였다. 즉, 디아스티마는 다른 기사와 달리 말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신기했다. 말하는 것이 인간과 거의 다를 게 없었다. 그저 몸만 기간트일 뿐이었다.

"널 꺾으면 되는 건가?"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 보이는군."

―시작하겠습니다.

디아스티마는 그렇게 말하고 곧장 몸을 날렸다. 거대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속도였다. 타히티의 고속 이동보다 훨씬 빨랐다.

하지만 제론은 이미 인간이라 여기기 어려울 정도의 강자였다. 디아스티마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 낸 뒤,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엉!

디아스티마의 거대한 검과 제론의 검이 부딪치며 충격파가 일어났다.

후우웅!

쿵쿵쿵쿵!

뒤에 늘어서 있던 6기의 기간트가 충격파를 거스르며 달려왔다. 그들의 진형은 지금까지와는 많이 달랐다.

마크리아와 이스히스가 각자의 거리를 지키며 제론을 견제했고, 타히티가 빈틈을 노려 빛의 화살을 날렸다.

한데 너무나 잘 맞물려 들어갔다. 제론이 어떻게 움직이든 그 미묘한 차이를 파악해 내고 간격을 맞추는데, 만일 제론이 마지막 벽을 넘지 못했다면 그 연쇄 공격을 견디지 못했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 맞물리는 연쇄 공격 사이에 갑자기 빈틈이 만들어졌다. 그 빈틈을 디아스티마의 검이 파고들었다.

쩌어어엉!

제론은 간신히 그 검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허공에 붕 떠서 날아갔다.

허공에 뜬 제론을 향해 수십 발이나 되는 빛의 화살이 날아갔다.

콰콰콰콰콰콰!

고작 두 기의 타히티가 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화살이었다.

제론은 그제야 디아스티마의 진짜 능력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증폭과 지휘였다.

디아스티마는 휘하 기사들을 적절히 지휘해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의 능력을 증폭시킬 수 있었다.

제론은 검을 휘둘러 화살을 쳐 냈다.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화살을 쳐 내며 그 힘을 이용해 착지 지점을 바꾸면서 가속도를 얻었다.

타다닥!

착지와 동시에 빠르게 달린 제론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타히티를 먼저 노렸다. 원거리 공격부터 없애야 앞으로의 싸움이 편해진다.

타히티가 고속 이동으로 제론의 공격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걸 예상한 제론은 타히티의 움직임에 맞춰 급가속했다.

꽈앙!

타히티의 어깨가 매끈하게 잘렸다. 제론의 검이 그곳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제론의 검에는 세상 그 무엇이라도 자를 수 있을 것 같은 예기가 차르르 흘렀다.

타히티의 한쪽 팔을 자른 제론은 미련 없이 돌아서서 몸을 날렸다. 타히티의 가장 큰 무기는 활인데, 한쪽 팔로는 활을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 전력에서 제외된 거나 다름없었다.

제론의 다음 목표는 근처에 있던 마크리아였다. 하지만 그 목표는 이룰 수 없었다. 디아스티마가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쩌어어어엉!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그것을 버텨 냈다. 발을 땅에 붙인 채로 충격파를 이겨 내고 디아스티마의 검을 옆으로 흘렸다.

꽈앙!

디아스티마의 검이 바닥을 때렸다. 돌과 흙이 제론에게 쏟아졌다. 놀랍게도 각각의 돌과 흙에 마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제론은 정신없이 검을 휘둘러 그것을 막아 냈다.

쩌저저저저정!

그리고 빛의 화살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큐웅!

제론은 훌쩍 점프를 해서 화살을 피했다. 하지만 화살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방향을 바꿔 제론을 쫓아갔다.

결국 제론은 마법을 썼다.

후웅!

제론의 몸이 하늘을 날아 방금 화살을 날린 타히티 앞에 떨어졌다. 워낙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그 어떤 기간트도 반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찰나의 빈틈은 제론에게는 억겁의 시간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길었다.

콰콰콰콰콰콰!

제론의 검에서 거센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 수백 개를 동시에 던진 듯했다.

카각! 카각! 카각!

타히티의 몸이 십여 조각으로 잘렸다. 제론의 검격이 워낙 강력해서 아무리 초고대 기간트라도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2기의 타히티를 먼저 처리하고 나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제론은 눈을 빛내며 다음 목표를 정했다. 이번에는 이스히스였다.

이스히스는 순간적으로 멀리서 돌격하는 능력이 있기에 미리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

제론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는지 이스히스와 마크리아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제론의 앞을 디아스티마가 막아섰다.

디아스티마의 주변으로 나머지 기간트들이 모여들었다. 바로 옆에 이스히스가, 그리고 살짝 뒤에 마크리아가 자리했다.

각자의 무기가 가진 간격을 고려한 위치 선정이었다. 이 역시 디아스티마의 명령에 따른 것이리라.

제론은 가만히 서서 그들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아직 제론은 모든 힘을 발휘하지 않았다. 사실 디아스티마의 힘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제 충분히 확인했다. 기대에는 약간 못 미쳤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만족할 수 있었다. 디아스티마는 강력함보다는 독자적으로 전술을 쓸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었다.

"슬슬 끝내야겠군."

온몸의 마나를 폭발적으로 회전시켰다. 이는 마법을 쓸 때 마나링을 가속하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제론은 주먹을 꽉 쥐었다.

뿌드드득!

제론의 주먹에 거대한 기운이 응축되었다. 제론은 그것을 앞으로 가볍게 내질렀다.

꽈아앙!

이스히스 한 기가 뒤로 휙 날아갔다. 가슴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제론은 날아가는 이스히스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연이어 주먹을 내질렀다.

꽈앙! 꽈앙! 꽈앙!

남은 세 기의 기간트가 뒤로 날아갔다. 조금 전 이스히스와 마찬가지로 가슴이 움푹 들어간 채였다.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제론이 날린 것은 고도로 압축된 마나덩어리였다.

1차로 물리적 충격을 준 다음 안으로 스며들어서 2차로 내부를 한바탕 휘저어 마나코어 자체를 망가뜨렸다. 기간트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제론은 이번엔 옆으로 대충 손을 휘둘렀다.

쩌엉!

멀찍이 떨어져서 기회를 엿보던 외팔 타히티가 날아갔다. 옆구리에 긴 상처를 입은 채로 말이다.

꽈과광!

타히티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제론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기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제론은 오직 디아스티마만 쳐다봤다.

디아스티마는 천천히 제론 앞으로 걸어갔다.

쿵! 쿵! 쿵! 쿵!

제론은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디아스티마는 제론 앞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쿠웅!

무릎을 꿇는 소리가 제론의 가슴을 울렸다.

―마스터.

디아스티마가 고개를 조아렸다. 몸체가 거대했지만, 고개를 숙이니 머리에 난 뿔이 제론 앞으로 내려왔다.

제론은 그 뿔에 손을 갖다 댔다.

화아아악!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디아스티마를 삼켰다. 또한, 바닥에 널브러진 기간트와 그 잔해들도 모두 삼켰다.

빛이 사라졌다. 그가 감싼 모든 것들과 함께.

제론은 고개를 돌려 공간의 한가운데를 쳐다봤다. 지금까지는 그곳에서 선물이 나왔다.

지이이잉.

아니나 다를까 기둥이 솟아났다.

제론은 그 기둥에 천천히 다가갔다. 기둥 안에는 디아스티마를 비롯한 6기의 기간트가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디아스티마가 제론 앞에 한족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마스터.

제론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뒤, 그들을 모두 벨트의 아공간에 넣었다.

그 순간, 벨트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기사를 모두 모아야만 얻을 수 있는 벨트의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벨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점점 모여들었다. 그리고 빔이 되어 바닥으로 쏘아졌다.

그 자리에 빛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한 명 나타났다. 사람이 완전히 형체를 갖추자, 벨트의 빔이 사라졌다.

제론은 그가 이 유적과 관계된 초고대문명의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분위기를 보니 시간이 제법 많이 흐른 모양이군."

빛으로 이루어진 사내가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제론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반갑군. 난 카타그라고 하네."

"제론입니다."

제론은 빛으로 이루어진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신기했다.

"초고대문명의 분이십니까?"

"초고대문명? 그렇게 불릴 정도로 오래되었나? 잠깐만 기다려 주게."

카타그는 눈을 감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에 기이한 문양이 물결쳤다.

잠시 후, 눈을 뜬 카타그가 기이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시스템이 한 번 리셋되었군. 최소 1만 년 이상이 흘렀다는 뜻인데……."

카타그가 중얼거리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여기까지 와서 날 불러냈단 말인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몰라서 오히려 괜찮았던 건지……."

"무슨 말씀입니까?"

카타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기가 유적의 끝이라는 뜻이다. 이 유적을 완전히 클리어한 걸 축하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