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8/217)

Chapter 8 벽을 넘어서 (3)

대전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하지만 대전에 모인 신하들의 눈빛에 원망과 희망이 동시에 어려 있는 걸 보면, 누군가 불씨만 던져도 충분히 아수라장이 되어 버릴 것이다.

왕좌에 앉은 제론이 좌중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수고 많았다."

침묵은 잠시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세나였다. 이 중에서 누구보다 제론과 가까운 사람이니 자신이 나서는 게 옳다고 여긴 것이다.

"폐하께서는…… 어디에 다녀오신 건가요?"

그녀는 침착하려고 애썼지만, 목소리에 담긴 원망을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그만큼 기다리는 시간이 힘들었다. 상황이 점점 악화하니 그 힘겨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지기만 했다.

"조금 다쳐서 몸을 추스르느라 늦었다."

제론의 말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쳤다니, 대체 뭐가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괘, 괜찮으신가요?"

세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가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본 제론이 빙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것 없다. 몸은 더 좋아졌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대전에 모인 사람들 전부가 걱정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렇게 제론을 보던 바이스의 뇌리에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설마 두 달 전에 수도를 덮쳤던 불꽃들이……!"

바이스의 말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바이스는 그때의 정황을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마탑주였으니까.

제론이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자, 바이스는 자신이 알아본 바와 생각한 바를 정리해서 천천히 말했다.

"당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마나의 반응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곧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치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아! 그때 수도 상공에서 있었던 불꽃놀이가 그럼……."

"그건 불꽃놀이가 아니라 폭발력을 가진 마나의 잔해가 쏟아지는 걸 수도의 방어 시스템이 막아 내며 만들어 낸 현상이었소."

모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설마 그때의 불꽃놀이가 그런 것인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다들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제론이 목숨을 걸고 위험을 막아 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다. 어쨌든 이렇게 살아났고, 훨씬 강해졌으니까."

재론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찌나 담담했는지 다들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수습할 정도였다. 괜히 아무것도 아닌 일에 과한 반응을 보인 모양새가 된 듯해 쑥스러웠다.

"자, 이제 인사는 이쯤 하면 됐으니 슬슬 진짜 회의를 시작하지. 언제쯤 우리 왕국에 크란 제국이 쳐들어올 것 같나?"

"아무리 최대로 잡아 봐야 닷새를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최대한 물자 지원을 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크란 제국의 힘을 막아 낼 수 없습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예상하던 바였다. 사실 이제는 크란 제국으로부터 세 왕국을 구해 내는 건 늦어 버렸다.

"전쟁 준비는 잘되어 가나?"

이미 바인의 보고를 통해 알아낼 건 다 알아냈지만 그래도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물었다.

"최전방에 3천 기의 아모르를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뒷받침할 기간트 부대가 준비 중입니다. 전후방 합해 총 1만 기의 아모르입니다."

"3년 동안 쓸 수 있는 물자도 확보했습니다."

"예비 전력을 빠르게 양성 중입니다."

제론은 보고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들이 제법 멀리 바라보며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 전쟁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도록."

이번 전쟁에는 제론도 빠질 수 없었다. 하지만 제론의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해서 유적 클리어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아모르는 보통 기간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아모르의 성능은 이번 크란 제국과의 전쟁에서 제대로 증명되었다.

게다가 다른 왕국에 전한 아모르는 다운그레이드형이었다. 출력이나 성능이 원래의 것보다 떨어졌다. 그런 아모르로도 크란 제국의 기간트를 압도했다. 또한, 발굴형 기간트에도 밀리지 않았다.

그러니 에어스트 왕국이 준비한 진짜 아모르의 성능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아마 크란 제국도 이번에는 고생깨나 할 것이다.

'아니, 우리가 이긴다. 내가 나설 테니까.'

제론의 눈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이번에 벽을 넘으며 얻은 힘은 어마어마했다. 기분대로라면 혼자서 크란 제국과 전쟁을 벌여도 이길 것 같았다. 물론 기분과 현실은 다르겠지만, 그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일단 적의 선봉과 예봉을 꺾은 다음 유적을 클리어해야겠어.'

제론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지금 더 급한 것은 유적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왠지 유적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참으로 묘했다. 이상하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나? 빨리 움직이도록."

제론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들 예를 취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날부터 에어스트 왕국이 더욱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전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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