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6화 (207/217)

Chapter 8 벽을 넘어서 (2)

테오스가 완전히 부서졌을 리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테오스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점점 깊어졌다. 제론은 새삼 테오스와 자신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깨달았다.

당장에라도 부르면 테오스가 뛰쳐나올 것 같았다. 한데 아무리 불러도 테오스를 소환할 수 없었다.

제론은 눈을 감았다. 테오스를 되찾지 못하면 아무리 벽을 많이 부수고 넘어도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제론에게 테오스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아니, 또 다른 분신이었다.

테오스가 아공간에 없다면 과연 어디에 있을까? 테오스의 아공간은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테오스의 기사 전부가 들어가도 충분히 공간이 남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 정도가 아니었지만, 제론이 힘을 키우면서 테오스의 힘도 자연스럽게 늘어났고, 그와 동시에 테오스의 아공간도 쑥쑥 자라났다.

그렇게 넓은 아공간이었지만 그 안에 테오스가 있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아공간은 비어 있는 게 맞다.

아마 앞으로는 수납공간으로만 쓰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제론은 생각을 달리했다. 아공간에 없다면 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 부분을 깊이 고민하고 성찰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명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봤다.

'테오스!'

제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시나 하고 시도해 본 일이었는데, 진짜로 거기에 있을 줄은 몰랐다.

테오스는 제론의 몸속에 있었다. 온몸에 녹아들어 있었다. 거의 제론과 한몸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

테오스에 탑승한 채로 연달아 깨달음을 얻으면서 테오스 자체를 온몸으로 흡수해 버린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이야?'

테오스는 기간트였다. 초고대문명 기술의 정화로 이루어진 기간트였다. 한데 그 기간트를 자신이 흡수해 버렸다. 인간인 자신이 말이다.

'이러니 소환이 안 되지.'

제론은 과연 테오스를 소환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해내야만 했다.

테오스를 몸으로 흡수하긴 했지만, 테오스의 힘 자체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든 건 아니었다. 그러니 테오스를 소환할 수 없다면 힘이 급감한 거나 다름없었다.

제론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간절히 테오스를 불러냈다. 테오스의 존재 자체를 바라고 또 바랐다.

후아아아앙!

제론의 간절한 바람이 테오스에게 닿았다. 유적 로비 한가운데 테오스가 나타났다.

"이, 이게…… 이게 대체 뭐지?"

제론은 황당한 눈으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테오스로 변해 버렸다.

제론은 주먹을 꽉 쥐었다.

테오스의 거대한 주먹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자르르 흘렀다.

제론은 팔다리를 움직였다.

테오스의 거대한 팔다리가 제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제론은 검을 뽑았다.

아공간에서 테오스의 검이 쑥 뽑혀 나왔다. 그리고 제론의 움직임에 따라 검을 마구 휘둘렀다.

테오스의 검에서 거대한 마나가 휘몰아쳤다. 당연히 제론이 한 일이었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였다. 아니, 이젠 그조차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가 되었다. 당연히 그런 제론이 펼치는 검술이 평범할 리 없었다.

그리고 테오스가 펼치는 제론의 검은 훨씬 더 어마어마했다.

꽈과과과과광!

테오스의 검에서 응축된 마나가 튀어 나가 유적 벽을 마구 할퀴었다. 응축된 채로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기에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동안 어떤 힘으로 타격을 줘도 끄떡없던 유적의 벽이 형편없이 부서져 버렸다.

제론은 그제야 검을 멈췄다. 자칫 유적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후우우우."

제론은 숨을 길게 내쉬며 테오스를 돌려보냈다. 처음 부르기가 어려웠지 일단 성공하고 나니 부르고 돌려보내는 건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제론은 부서진 유적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혀를 차며 그것을 쓰다듬었다.

"쯧, 너무 힘에 취했어. 그나저나 설마 이렇게 쉽게 부서질 줄은 몰랐는데……."

그동안 아무리 큰 힘을 얻었어도 유적 벽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굳이 테오스에 타지 않아도 이곳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이번에 제론이 얻은 힘은 대단했다.

"이걸 어쩌지?"

제론의 중얼거림에 유적 시스템이 대답을 해 주었다.

―자동복구까지 36시간 남았습니다.

제론이 눈을 빛내며 부서진 벽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그 위를 타고 흐르는 마나를 확인했다. 부서진 부분이 더욱 확실히 떨어져 나가고, 그 뒤에 새로운 벽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모습이 보였다.

제론은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초고대문명 유적다웠다.

"자아. 그럼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니 슬슬 돌아가 볼까?"

제론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로비를 둘러싼 벽이 일제히 빛을 뿜어냈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유적이 제론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였다.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명령에 더 가까웠다. 제론을 강제하려는 듯했다.

"뭐지?"

제론은 차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생각해 보니 그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마치 유적을 모두 클리어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수련을 하고 유적을 클리어해 나갔다.

한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이 유적에 휘둘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또한,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적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그 빛은 제론의 머릿속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제론의 표정이 굳었다. 만일 마지막 희열의 벽을 넘지 못했다면 여기에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수준의 정신 간섭으로는 제론을 어쩌지 못한다. 제론의 정신력은 이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다.

제론은 유적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단숨에 파악해 냈다.

"그러니까 한시라도 빨리 모든 층을 클리어하라 이건가?"

유적이 제론에게 원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이쯤 되니 제론은 대체 유적이 왜 그렇게 제론을 압박하는지 궁금해졌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유적을 빨리 클리어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일단 내 주변의 안전부터 챙겨야지."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유적에서 나가 버렸다.

제론이 사라지자 유적 벽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리고 안타깝게 깜빡였다. 마치 시간이 없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유적에서 나간 제론은 다른 사람을 만나기 전에 일단 태블릿부터 확인했다. 바인이 꾸준히 보고서를 보냈을 테니, 그것만 봐도 돌아가는 상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제론은 태블릿을 꺼내자마자 깜짝 놀랐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이 날짜였는데, 자기 생각과 한 달이나 차이가 났다.

"설마 날짜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었다, 태블릿은 그 무엇보다 정확했다. 절대 틀릴 리가 없었다.

"그럼……!"

짧은 순간이라고 여겼던 깨달음의 시간이 실제로는 한 달이 넘게 이어졌다는 뜻 아닌가.

제론은 잠시 멍하니 그 순간을 되돌아봤다. 벽 하나하나를 부수던 때는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다시 돌이켜봐도 그랬다.

"믿을 수가 없군."

제론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무려 두 달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틴 셈이었다. 한데도 몸은 탄탄하기 그지없었다.

근육이 온몸을 촘촘히 뒤덮고 있었다. 게다가 몸에서 느껴지는 활력은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식사를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사람 같았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재구성의 효과였다. 최적의 상태를 항상 유지할 수 있도록 육체는 물론이고 몸 내부의 기운까지 변해 버렸다.

"설마 앞으로도 계속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는 건 아니겠지?"

제론은 그런 실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태블릿에 집중했다. 한 달이 더 지나갔으니 생각보다 상황이 다급할 수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야만 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바인은 꾸준히 보고를 올렸다. 매일 최소 3장 이상의 서류로 이루어진 보고서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제론은 그것을 시간순으로 쭉 읽었다.

이번에 깨달음과 함께 두뇌 쪽도 개발되어 이해력이나 암기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기에 그저 대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역시 그 함정에 레벨리오가 끝장났군."

에어스트 왕국을 노린 섬광의 창은 제론이 막아 냈지만, 그것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던 레벨리오는 전멸해 버렸다.

"또 전쟁이라……."

크란 제국의 뒤에는 엠페리움이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거대한 전쟁을 일으킨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말이다.

"호오. 생각보다 선전하고 있는데?"

불과 얼마 전에 메르츠 왕국이 함락되었다. 메르츠 왕국은 크란 제국의 공세를 몇 달이나 버텨 냈다.

물론 고작 몇 달 만에 왕국이 넘어간 거니 엄청나게 빠른 속도이긴 했다. 하지만 그 상대가 크란 제국이니 굉장한 선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전은 딱 거기까지였다. 일단 메르츠 왕국이 넘어가고 나니, 나머지 왕국들은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속속 무너져 버렸다.

전 대륙의 전력을 메르츠 왕국에 집중한 상황이었다. 그 모든 걸 크란 제국은 고작 한 달 만에 밀어 버렸다. 그러니 주변에 있던 왕국이 쉽게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제 남은 왕국은 3개뿐인가? 그나마도 오래지 않아 끝장나겠군."

보고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크란 제국, 아니, 엠페리움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그 3개 왕국이 무너지고 나면 그다음은 바로 에어스트 왕국 차례였다. 제론은 에어스트 왕국이 그동안 크란 제국이 일으킨 대륙정복전쟁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확인했다.

"계속 기간트와 물자만 지원했군."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지원군을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남은 자들이 가진 권한을 최대한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물품 지원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아모르를 지원한 것도 상당한 월권이었다. 물론 제론은 절대 그것을 문제 삼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칭찬해 주고 싶었다. 그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데 한 달이나 걸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야."

이렇게 시간을 끌어 주는 바람에 에어스트 왕국의 피해가 전혀 없었다.

크란 제국도 정면으로 밀어붙이는 것에만 집중해 뒤 공작은 전혀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계속 진군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었으니 이대로 잘 끝날 거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정복된 곳의 행태가 심상치 않은데……."

엠페리움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정복한 지역에는 마티가 촘촘히 깔려 모든 상황이 바인에게 전달되었다.

크란 제국은 정복한 왕국을 공포 정치로 다스렸다. 크란 제국 휘하로 들어가 식민지가 된 왕국민은 매 순간 벌벌 떨어야만 했다.

하루에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인간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과 치욕 속에서 개처럼 죽어 갔다.

그리고 엠페리움은 유적에 대한 조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기묘하게 생긴 아티팩트를 들고 유적 근방을 구석구석 뒤졌다.

"에너지를 찾는 거로군."

제론은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엠페리움은 크란 제국 내에 있던 에너지원을 대체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제론이 초고대유적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흐름을 바꿔 버렸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거지?"

제론은 혹시나 싶어서 보유한 모든 유적의 에너지 흐름을 바꿔 놓았다. 에어스트 왕국의 것만 제외하고 말이다.

에어스트 왕국의 에너지원은 유용하게 쓸 계획이었다. 수도에 지은 왕궁처럼 성을 지어도 되고, 또 공장을 지어 돌려도 된다.

그러니 엠페리움이 정말로 원하는 걸 얻으려면 에어스트 왕국을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그것도 소용없었다. 제론을 굴복시켜야만 했다.

"이 탄압도 분명히 거기에 관계된 걸 거야."

제론은 엠페리움이 예전에 어떤 짓을 벌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피와 영혼을 모으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아마 이번 전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좋아. 대충 파악했으니 슬슬 가 볼까?"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하 연무장에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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