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5화 (206/217)

Chapter 8 벽을 넘어서 (1)

제론이 테오스에 탄 채로 유적 로비에 누운 지 무려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제론과 테오스는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것 같지만, 내부적으로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제론은 맹렬히 죽음과 싸우고 있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워낙 강했기에 주변에 있는 모든 기운과 힘을 이용해 몸을 치유해 나갔다.

섬광의 창은 크란 제국에 남은 모든 유적의 에너지가 집중된 형태였다. 그 때문에 아직도 크란 제국에 있는 엠페리움의 시설들은 몽땅 가동이 중지된 상태였다.

그 정도 위력을 테오스와 둘이서만 막아 냈으니 사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제론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또렷하고 맑았다. 다만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정신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물론 제론은 그쯤이야 얼마든지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동안 유적에서의 수련은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 내는 과정이었다. 그걸 통해서 새로운 힘을 얻고, 그 힘에 익숙해졌다.

그러니 이런 고통쯤은 얼마든지 견뎌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한 달이나 지난 지금도 정신을 맑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지금도 제론은 끊임없이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 아니, 죽음과 싸우는 중이었다.

제론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위태롭게 걸었다. 조금만 삐끗하면 곧장 죽음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제론은 그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통해 보통 사람은 결코 얻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그것도 지속해서 말이다.

죽음을 끊임없이 경험하면서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한 달이나 겪으면서 제론은 조금씩 변해 갔다.

그런 변화를 통해 제론 앞에 드리워진 거대한 벽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테오스가 큰 역할을 했다. 테오스는 자신의 몸이 부서져 흩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힘과 역량을 제론의 치유에 집중했다.

물론 테오스의 상태도 좋지 않았기에 그 영향력은 지극히 미약했다. 하지만 그 미약한 힘 덕분에 제론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다.

만일 테오스의 힘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제론은 이 한 달 동안 몸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제론에게 큰 기연이 되었다. 그런 절묘한 상황 덕분에 제론 앞에 드리워진 거대한 벽에 균열을 만들었으니까.

쩌저저적!

제론은 끝없이 펼쳐진 벽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실제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제론의 정신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아니, 제론의 마음을 가둔 단단한 요람을 부수는 소리였다.

꽈과과광!

결국 벽이 산산이 부서졌다. 순간, 제론의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독할 정도의 고양감이 제론의 몸과 마음을 지배했다.

보통이라면 이쯤에서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여전히 정신을 놓지 않았다. 마음을 꽉 붙잡았다.

그런 제론의 뇌리로 수많은 깨달음의 물결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것은 그냥 깨달음이 아니었다.

'테오스?'

제론의 뇌리로 스며드는 것은 테오스와 관계된 지식이었다. 아니, 지식을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우득! 우득! 우드드득!

제론의 온몸이 뒤틀렸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찾아왔다. 몸의 뼈와 근육, 피부를 비롯한 모든 장기가 새로 태어나는 중이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고통을 동반했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편하다. 의식이 사라진 사이 몸의 재구성이 끝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제론은 이 와중에도 정신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또 한참을 참아 내자, 이내 제론의 뇌리와 마음에 뭔가가 스며들었다.

제론의 눈앞에 거대한 벽이 또 나타났다. 그리고 그 벽은 생겨나자마자 산산이 부서졌다.

그렇게 벽이 나타나고 부서지기를 아홉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 나서야 제론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모든 고통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의 순간은 끝나지 않았다. 고통이 끝남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희열이 몰려왔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처럼 모든 고통을 이겨 낸 뒤에 찾아온 희열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제론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오히려 고통을 참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것도 이겨 냈다. 아득히 피어나는 고양감으로 인해 날아가 버리려는 정신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 큰 희열로 변했다. 진짜 깨달음에 의한 희열이었다. 당연히 정신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느낌도 없었고, 그저 지극한 충족감만 가득했다.

제론은 그 순간 심장의 마나링과 아랫배의 마나 덩어리가 하나로 합해지는 걸 느꼈다. 온몸의 마나가 하나로 뭉쳐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었다.

결과적으로 제론은 모든 마나를 잃었다. 하지만 모든 마나를 진실로 얻었다.

제론은 온몸이 꽉 차는 기분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테오스의 눈을 통해서 보는 천장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는 천장이었다. 그리고 그 천장을 통해 유적 밖의 모습이 보였다.

에어스트 왕궁 구석구석이 보였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방식으로 모든 에어스트 왕궁이 제론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천장에 비추는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이젠 에어스트 왕국 곳곳을 보여 줬다. 마치 제론의 마음이라도 읽는 듯, 가장 궁금한 곳만 골라서 착착 보여 줬다.

제론은 가만히 그것을 보며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는 에어스트 왕국의 모습에 안도했다.

이제 알고 싶은 건 다 알았다. 남은 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이 얼마나 건재한지 모두에게 보여 주는 일뿐이었다.

제론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 테오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론은 테오스 안에 있었다. 깨달음의 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르지만 제론이 느끼기에는 지극히 짧았다.

한데 그 짧은 순간 동안 테오스가 사라져 버렸다. 제론은 지금 맨몸으로 유적 로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테오스!"

제론은 테오스를 불렀다. 하지만 테오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제론은 억지로 차분함을 유지하며 다시 한 번 테오스를 불렀다.

"테오스!"

하지만 테오스는 이번에도 제론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마치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제론은 다시 한 번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현재 제론의 힘은 연이은 깨달음과 육체의 재구성 덕분에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힘이 강해졌어도 테오스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는 없었다. 테오스는 제론이 가진 힘의 상징과도 같았다. 제론과 함께 성장해 나가는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테오스는 어쩌면 제론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런 테오스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독이었다. 만일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전이라면 어떻게든 행동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제론은 충분히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후우. 일단 차근차근 확인해 보자."

제론은 우선 그동안 얻은 테오스의 기사들을 불러내기로 했다. 기사를 불러내는 건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제론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었다.

슈슈슈슈슉!

그들을 떠올림과 동시에 모든 기사가 순식간에 나타났다.

모두 17기나 되는 테오스의 기사들이 제론을 에워싼 상태로 나타났다. 그들은 제론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 나타나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제론에게 고개를 살짝 조아렸다.

그들을 보며 제론은 씨익 웃었다. 이들이 이렇게 건재한데 테오스가 사라졌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

슈슈슈슉!

테오스의 기사들은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제론은 다시 곰곰이 테오스를 떠올렸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차근차근 짚어 나갔다.

일단 테오스는 제론이 죽지 않도록 최대한 애를 썼다. 그동안 몸체가 계속 흩어졌지만 그래도 완전히 사라질 정도는 아니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제론은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제론의 의념은 곧장 벨트의 아공간에 닿았다.

새로 각성한 제론의 능력은 가공할 정도였다. 제론은 아공간 안을 감각으로 휘저을 수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이 강해진다면 아공간에 간섭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제론은 현재 초고대에 12개 이상의 마나링을 가진 마법사만이 가능했다는 마법을 펼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의념만으로 마법을 일으키는 것이다. 생각의 흐름이 곧 마나의 흐름이 되는 경지였다.

그렇기에 아공간에 간섭할 수 있었다. 아공간도 마법으로 이루어진 공간, 당연히 다른 마법적 힘을 통해 변형을 가할 수 있었다. 물론 아공간 자체가 상당히 난해했기에 변형 자체가 지극히 어려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아공간에 더욱 확실히 간섭하기 위해선 더 높은 경지와 실력이 필요했다. 최소한 제론이 조금 전 깨뜨렸던 그 거대한 벽 하나는 더 깨뜨려야만 할 정도로 큰 힘이 있어야만 했다.

아공간 안의 기운이 제론의 감각에 걸렸다. 제론은 벨트의 아공간에 머무는 테오스의 기사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건 이스히스로군. 이건 타히티고…….'

모든 기사를 마치 눈으로 보듯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벨트 중앙에 위치한 아공간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니, 알아냈다. 그 아공간은 비어 있었다.

'대체…… 대체 테오스는 어디로 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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