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5화 (196/217)

Chapter 5 함정 (1)

제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슈틀러가 결국 무릎까지 꿇었다. 그는 이번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를 처리한다고 뭐가 달라지지? 그저 적 하나가 사라질 뿐이야. 한데 거기에 조직의 전력을 투입하겠다고? 함정인 걸 뻔히 알면서 거길 들어가겠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제론의 신랄한 말에 슈틀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슈틀러 뒤에 서 있던 나머지 조직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도와주십시오."

그들은 제론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다. 물론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또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정보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지금까지의 경험만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런 제론이 도와준다면 이번 일은 분명히 성공할 수 있으리라. 물론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제론은 그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왜 괜히 희생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그저 시간을 더 두고 차근차근 공략해 나가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는 목표였다.

한데 왜 그걸 서두른단 말인가.

"내가 도와주면 뭐가 달라지지?"

그제야 슈틀러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성공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슈틀러도 이 일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들만으로는 절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안다는 말이었다.

제론은 가만히 슈틀러를 쳐다봤다.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그 깊은 곳에 냉철함이 번득였다. 그걸 보고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을 말해 봐라."

슈틀러는 기다렸다는 듯이 브리핑을 했다.

"현재 슈탐 후작은 펠츠 성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엠페리움의 시설에 숨어서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기다리고 있다, 라……."

슈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미리 준비한 함정입니다. 아마 그 시설 자체가 함정과 관계가 있을 걸로 보입니다."

"무슨 시설인지는 모르고?"

"예. 알아낸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위험하다. 아무런 정보가 없이 함정이라는 것 하나만 알고 쳐들어가야 한다. 그것도 단단히 벼르고 있는 적을 향해서 말이다.

"저희만으로는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되지?"

슈틀러는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무런 계획도 없습니다. 그 부분에서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제론은 조금 황당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슈탐 후작이라는 자가 레벨리오의 조직원을 그렇게 많이 학살했다니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고, 기회가 왔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있으려니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게 당연했다.

"좋아. 일단 좀 알아보고 오지."

제론은 하수도를 개조한 공간에 머물고 있는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을 슥 둘러봤다. 어느새 2천 명이 넘었다. 다른 곳에 흩어진 조직원들을 다시 모은 것이다.

'여기를 치면 이들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도 있겠군.'

제론은 엠페리움이 뭘 생각하는지 대충 짐작했다.

제대로 된 함정을 준비해 저들 모두가 움직이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망타진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목표였다.

아마 그 목표는 달성할 확률이 지극히 높을 것이다. 제론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말이다.

제론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슈틀러를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레벨리오의 수뇌부가 완전히 사라진 상황인데 굳이 이런 게릴라전을 이어 갈 이유가 따로 있나?"

슈틀러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레벨리오의 수뇌부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고? 그럼 그 남은 사람이 너희를 움직이고 있는 건가?"

슈틀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분은 지시를 내리거나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제론은 그 말을 들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황족인가?"

제론의 말에 슈틀러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렇게 집어낼 줄 알았다. 이제 더 숨기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렇습니다."

"역시 그래야 그동안의 일이 다 이해가 가지. 그럼 황족들도 엠페리움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슈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동안 엠페리움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움직여 왔으니 말입니다."

제론은 순간 레벨리오의 수뇌부가 황족 한 명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명이 아니군?"

제론의 날카로운 질문에 슈틀러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졌다. 제론이 거기까지 유추할 수 있으리란 건 사실 너무나 뻔했다.

"그렇습니다."

"몇 명이지?"

사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저 흘러가듯 나온 질문에 불과했다. 하지만 슈틀러의 답은 제론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전부입니다."

"음? 전부?"

"예. 모든 황족이 레벨리오의 수뇌부입니다."

제론은 깜짝 놀랐다. 설마 모든 황족이 작당해서 엠페리움에 대항하는 조직을 만들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황족이면서 황족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상대적 박탈감이 굉장했을 것이다.

'재미있군.'

어떻게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일 아닌가.

대륙 최고의 강대국인 크란 제국이 실제로는 황제와 황족이 아니라 엠페리움이라는 조직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이를 막기 위해 황족들이 나서서 불법 조직을 만들어 제국의 시설을 파괴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래서야 꼭 황족이 반란군 같지 않은가.'

크란 제국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엠페리움은 레지스탕스나 다름없었다. 한데 정작 상황은 그 반대가 되어 있으니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그럼 레벨리오의 진짜 목적은 황권을 원래대로 돌리는 일이겠군."

이제야 아귀가 조금씩 맞아떨어진다. 아마 레벨리오를 조직하는 데에도 엄청난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골라내기도 쉽지 않았을 테고, 또 그들을 이용해 조직을 강하게 키우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레벨리오가 이런 반편이 같은 조직이 된 것이다. 고작해야 광장에 있는 분수대나 부수고 다니는 어설픈 조직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이들로서는 할 만큼 한 셈이긴 하지.'

광장의 분수대는 인공 소드 마스터를 양산하기 위한 실험 장치 중 하나였다. 그걸 파괴해서 엠페리움의 수단이 될 것을 미리 없애는 것이니, 나름대로 중요한 일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시설에 비해서 경계 수준이 형편없이 낮았다. 그러니 제대로 된 힘을 갖추지 못한 레벨리오의 입장에서 그 정도면 정말 할 만큼 한 것이었다.

제론은 잠시 고민했다. 레벨리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할 점이 많았다.

'그나저나 용케 배신자가 나오지 않았군.'

황족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그러니 그중 배신자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배신자가 더 많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데도 아직 이렇게 조직이 괴멸되지 않은 걸 보면 철저하게 비밀을 지켰다는 뜻이었다.

지난번 본거지가 털린 것도 포로로 잡아간 드로센 자작에 의한 것이지, 특별히 내부의 정보가 샌 것이 아니었다.

"사실 저희 레벨리오에 관한 사항은 폐하만이 알고 계십니다."

제론의 의문을 느꼈는지 슈틀러가 알아서 말을 꺼냈다. 그는 간절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걸 던져서라도 눈앞의 조력자를 얻고 싶었다.

"나머지 황족은 그저 조력자에 불과합니다. 물론 아무리 조력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굉장한 각오로군."

확실히 대단했다. 아무리 그래도 황족이다. 황족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각오를 과연 쉽게 할 수 있을까?

엠페리움에게만 고개를 숙이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존재 아닌가. 한데 그 모든 걸 포기할 정도라니, 보통 각오로는 불가능했다.

슈틀러가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에는 몰랐으니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레벨리오 자체가 거의 붕괴하였기에 황족을 제외한 레벨리오의 실질적 업무를 담당하는 수뇌부가 몽땅 사라져 버렸다. 슈틀러는 그 와중에 아주 자연스럽게 최고 수뇌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실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엠페리움에게 있어서 황족은 그저 노예에 불과했다. 게다가 누구도 엠페리움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일개 기사나 남작의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만일 황족이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황족이라도 엠페리움의 손길을 피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야말로 노예보다 못한 처지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그렇게 몰락한 황족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된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가능성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법이었다.

모든 황족은 엠페리움을 두려워했고, 또 그 때문에 함부로 황족의 권위를 세우지도 못했다.

크란 제국 백성의 처지에서는 어찌 보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족으로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 레벨리오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 엠페리움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한편 궁극적으로 그들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황족에게는 그것을 이룰 만한 능력이 있었다. 가만히 두려움에 떨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이 엠페리움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서 오는 차이었다.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보통 귀족의 경우, 오히려 황족이 훨씬 무서운 존재였다. 다만 엠페리움과 다른 점은 존재 자체를 명확히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황족은 엠페리움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가지는 두려움이 훨씬 더 컸다.

슈틀러는 잠시 고민했다. 그 부분을 명확히 설명해 주지 않는 편이 제론을 설득하는 데 더 유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감추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결국 거짓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최소한 제론과는 끝까지 신뢰를 이어 가야만 했다.

"실은…… 황족들도 그리 편한 상황이 아닙니다."

슈틀러는 그 말을 시작으로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제론은 슈틀러의 말을 들으며 레벨리오에 대해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제론이 가만히 슈틀러를 쳐다봤다. 솔직히 의외였다. 이렇게 모든 속내를 다 털어놓을 줄은 몰랐다. 이는 자칫하면 레벨리오 자체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사항 아닌가.

"좋아. 일단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그를 처리하는 걸 최대한 도와주겠다."

"감사합니다!"

슈틀러의 눈에 격동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아마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론이 도와준다면 이번 계획은 무조건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예전에 봤던 그 굉장한 기간트가 나선다면 슈탐 후작쯤이야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가 있는 펠츠 성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성공에 대한 자신감은 변함없었다.

"계획이 어떻게 되지?"

슈틀러의 계획은 아주 단순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슈탐 후작이 펠츠 성에 머무는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복잡한 계획을 세울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단순하게 힘을 이용한 것이었다.

기존에 수많은 반복을 통해 효과가 입증된 방법을 쓰되, 힘을 더욱 집중하고 희생을 감수해 더욱 과감하게 밀고 나갈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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