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부활 (2)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리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온몸에서 줄기줄기 뿜어내는 위압감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그 익숙함에 눈물을 흘렸다.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왕이시여!"
10인의 신하가 일제히 부복했다. 왕은 그들의 조아림을 느긋하게 즐기며 그 사이를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왕좌에 앉았다.
마치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딱 맞았다. 왕은 편안한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벌써 수백 년 동안 써 온 왕좌였다. 그 익숙함과 편안함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좋군."
왕의 말에 신하들이 고개를 더욱 깊이 조아렸다. 왕의 기쁨은 곧 자신들의 기쁨이었다. 그들은 애초에 그런 존재였다.
왕이 앞에 없을 때는 딴생각을 하고 왕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막상 왕 앞에 서면 한없이 초라해지고, 모든 것을 왕에게 갖다 바쳐야만 하는 것이 그들에게 지워진 숙명이었다.
고작 한 달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왕은 자신의 예전 힘을 모두 되찾았다. 대체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나름대로 준비를 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역시 페하시군.'
10인의 신하는 경이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고개를 조아리고 있어서 그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자,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 너희가 필요한 일을 하도록 하자. 뭘 원하느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신하들은 저마다 답을 동료에게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도 왕에 대한 불충이었다.
결국 모두 입을 맞춰 동시에 말을 했다.
"생령주를 원합니다."
왕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왕이 손을 한 번 내저었다.
퍼버버벅!
땅에 닿을 듯 숙인 고개 바로 위 바닥에 뭔가가 박혔다. 각각 하나씩 모두 10개였다.
신하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워낙 날카롭고 강렬한 기운을 동반했는지라 머리통이 날아가는 걸로 착각을 했다.
그들은 왕이 노린 것이 자신의 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크게 안도했다. 만일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왕의 심기를 거슬렀을 것이다.
신하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머리맡에 박힌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리고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새, 생령주!"
그것은 생령주였다. 대체 언제 이걸 10개나 만들었단 말인가.
"힘을 되찾으면서 무료할 때마다 하나씩 만들어 봤다. 마침 너희가 원한다니 잘됐군."
신하들의 눈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역시 자신들의 왕이었다. 수십 년을 기다린 보람이 느껴졌다.
"이제 생령주를 얻었으니 슬슬 전쟁을 시작해야겠군."
왕의 눈에 언뜻 광기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었다. 눈동자 깊은 곳에 똬리를 틀었다.
어쨌든 수십 번의 생을 반복해 온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보통 사람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광기로 똘똘 뭉쳐 있었다.
"오랜만에 피를 볼 수 있겠군. 재미있겠어."
왕의 입매가 뒤틀렸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피의 폭풍을 예고하는 듯했다.
물론 왕 앞에 고개를 조아린 10명의 신하 역시 그와 비슷한 눈빛이었다. 그들은 영생을 위해서라면 세상 그 어떤 것이든 희생시킬 준비가 된 자들이었다.
☆ ☆ ☆
"완전히 미친놈들이로군."
제론은 레벨리오와 함께 거의 동시에 3개의 유적을 등록한 다음 태블릿을 통해 바인의 보고서를 확인했다.
크란 제국이 또 전쟁을 벌였다. 아니, 정확히는 크란 제국이 아니라 크란 제국에 의해 식민지가 된 7왕국이 동시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게다가 그냥 전쟁이 아니었다. 잔인한 학살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었다.
마티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보면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들이 없었다.
"대체 저건 뭐지?"
제론은 심각한 표정으로 기사들이 저마다 들고 다니는 검을 쳐다봤다.
특이한 검이었다. 사람을 죽인 다음 심장에 찔러 넣으면 피를 몽땅 빨아들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손잡이와 검신을 연결하는 폼멜에 작은 구슬 두 개가 박혀 있었다. 하나는 붉은색이었고 다른 하나는 푸른색이었는데, 피를 빨아들일 때는 붉은 구슬이 빛났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순간에는 파란 구슬이 반짝 빛났다.
모든 기사가 그 검을 들고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전쟁보다는 사람을 죽여 피를 빨아들이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쟁 중에 죽는 기사가 있으면 동료가 반드시 그의 검을 회수하는 걸로 봐서 검에 박힌 두 개의 구슬이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역할을 할 걸로 보였다.
"피를 모아? 보아하니 저 파란 구슬은 영혼을 모으는 것 같고……."
제론은 그 광경을 보며 대번에 예전 영상으로 확인했던 그 처참한 의식이 떠올랐다.
마법진에 사람을 몰아넣고 완전히 핏물로 갈아서 흡수하던 그 영상 말이다. 거기에서도 기사들이 커다란 구슬을 들고 뭔가를 흡수했다. 제론은 그것이 영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즉, 지금 전쟁을 벌이는 7개 왕국의 기사들이 그때 크란 제국 기사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피와 영혼을 모아서 뭘 하려는 거지?"
그냥 피를 모으는 것도 아니었다. 저 구슬 안에 들어가는 것은 피보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였다. 그게 뭔지는 제론도 알 수 없었다.
"초고대문명의 지식을 뒤지다 보면 뭔지 나올까?"
그럴 수도 있었다. 제론은 태블릿을 들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단어로 검색해 보았다.
상당히 다양한 지식이 나왔지만, 딱히 이거다 하는 것이 없었다. 초고대에는 피에 관해서도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대부분 치료를 위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영혼에 대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몇 시간이나 태블릿을 뒤적였지만 특별히 알아낸 건 없었다. 제론은 결국 포기하고 태블릿을 아공간에 넣었다.
답답했다.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에어스트 왕국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과 계속 초고대유적을 정복해 나가는 것 외에는 없었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새로운 유적을 찾아갈 시간이 되었다.
☆ ☆ ☆
"역시 생령주를 채우는 데 전쟁만큼 효과적인 건 없군."
"그러게 말이오. 벌써 절반은 채운 것 같군."
"이 구슬 하나에 피의 정화와 영혼을 함께 가둘 수 있다니 정말 폐하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소."
"그나저나 이번 전쟁은 그동안과는 좀 달라서 살짝 꺼림칙하군. 안 그렇소?"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엠페리움이 취한 방법은 크란 제국을 직접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왕국들을 크게 뒤흔들어 전쟁을 일으키는 식이었다.
때로는 크란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왕국에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고, 또 때로는 크란 제국과 국경을 맞댄 곳에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부활해야 할 인원이 총 11명이나 되다 보니, 죽여야 하는 인간의 수도 엄청났다.
생령주를 꽉 채우는 데 필요한 생명의 수가 때에 따라 변하기에 어떤 경우 수십만 명이 넘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때도 있었다.
그리고 부활의 법을 발동시키는 데 들어가는 최소한의 생명력이 있기에 적어도 5만 명 이상의 희생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니 11명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최소 55만 명의 생명을 죽여야만 했다. 그리고 운이 나쁘면 수백만 명이 넘는 생명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말이 수백만 명이지 정말로 어마어마한 수였다. 그냥 보통 전쟁 한 방으로 채울 수 있는 인원이 아니었다.
정말로 큰 전쟁을 일으키고 그와 더불어 학살을 해야만 처치가 가능한 숫자였다.
더구나 전쟁의 양상이 기간트 위주로 돌아가면서 생명을 취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전투 중에 취할 수 있는 생명이 거의 없었기에 전투가 끝나고 민간인을 학살하면서 생명을 채워야만 했다.
어쨌든 예전에는 그런 대학살을 다른 왕국들만 움직여서 행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못해서 상당히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폐하께서는 어쩌고 계시오?"
"우리가 부탁했던 것을 준비 중이시오."
그 말에 다들 눈을 빛냈다. 그들이 현재 간절히 원하는 것은 에너지 감지 아티팩트였다.
여전히 레벨리오의 공격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한동안 사라져서 이제 완전히 와해된 줄 알았는데, 최근 다시 기승이었다.
"아무래도 전쟁은 전쟁이고 레벨리오 놈들을 박살 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소."
"동의하오."
"하면 무슨 수를 내 봅시다. 그놈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은데……."
"그러려면 그럴듯한 미끼가 필요하오."
"미끼라면 적당한 것들이 많지 않소."
"부활하기 전에 마무리를 지었으면 좋겠소."
"슈탐 후작을 이용하는 건 어떻소?"
"슈탐 후작이라……."
슈탐 후작은 소드 마스터였다. 물론 고대 기준이었고, 레벨리오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레벨리오 입장에서는 가장 죽이고 싶은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레벨리오의 조직원을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었다.
특히 지난번 레벨리오의 본거지를 습격할 때, 엄청난 활약을 통해 수백의 레벨리오 조직원을 학살했다.
레벨리오에서는 슈탐 후작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하지만 슈탐 후작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는 엠페리움에서 철저히 감추고 보호하는 중이었다.
레벨리오의 능력으로는 절대 그의 위치를 알아낼 수 없었다. 또한, 습격도 쉽지 않았다. 슈탐 후작은 소드 마스터였다. 웬만한 습격으로는 그를 어쩌지 못한다.
슈탐 후작을 전면에 내세우면 분명히 레벨리오의 습격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레벨리오의 습격을 막아야 할 곳이 워낙 많아서 지금이야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지만, 막아야 할 곳을 하나로 한정하면 얼마든지 대처가 가능했다.
"슈탐 후작 정도면 레벨리오도 혹할 수밖에 없긴 하겠소만……."
"뭐 걸리는 거라도 있소?"
"슈탐 후작은 그냥 희생시키기엔 너무 큰 패 아니오?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유능한 사람을 잃기라도 하면 곤란하오."
"뭘 그리 걱정하시오. 슈탐 후작은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상당한 강자에 속하오. 그가 쉽게 당할 리 없소. 게다가 함정을 잘 파기만 하면 레벨리오는 슈탐 후작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할 거요."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표했다.
냉정히 따져 계산해 보면 그 말이 옳다. 슈탐 후작이 어떤 존재인가. 같은 소드 마스터라도 그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레벨리오의 소드 마스터는 지난번 습격에서 죽어 버렸다. 레벨리오는 이제 소드 마스터를 막아 낼 무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마나폭탄을 이용해 기습하면 모르겠지만, 그 부분은 미리 대비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좋소. 그렇게 결정합시다."
"동의하오."
"나도 동의하오."
다들 동의를 표하자, 의견을 냈던 사내가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다들 동의했으니 일을 진행하겠소. 아마 아주 재미있을 거요."
하지만 다른 자들은 전혀 그 말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정이 난 순간부터 그들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지금 이 순간 오직 하나, 부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