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부활 (1)
마법진이 그려진 복면을 쓴 10명의 사내가 바닥에 이마를 댄 채 엎드려 있었다. 그들은 엠페리움의 수뇌부였다.
그리고 젊은 사내 하나가 그런 그들을 나른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그 말 한마디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내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고스란히 가슴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그는 정말로 고마워했다.
사내는 무심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이리저리 돌려 봤다.
자신의 손인데도 생소했다. 아직 제대로 몸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움직임이 어색했고, 주름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는 남의 것 같았다.
"거울을 가져와라."
사내의 명령에 마치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듯 옆에 서 있던 시녀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사내가 볼 수 있도록 커다란 거울을 들었다.
사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런저런 표정을 지으며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확인했다.
'저게 나란 말이지.'
아직 어색하긴 했지만 마음에 들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수려한 미남자였다. 게다가 가볍게 걸친 옷 사이로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몸도 상당히 훌륭했다.
사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일단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을 정리하느라 미처 떠올리지 못한 것 한 가지를 확인해야만 했다.
사내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맴돌았다.
아랫배와 심장에 꽉 뭉친 마나 덩어리가 느껴졌다. 새 몸을 얻는 바람에 힘도 처음부터 다시 얻어야 하는지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을 듯했다.
물론 예전 그가 가지고 있던 힘에 비하면 좁쌀만큼도 안 되는 작은 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본이 되는 씨앗의 유무는 그가 힘을 얼마나 빨리 되찾게 해 주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우우우웅.
주변의 마나가 사내의 의념에 따라 은은하게 진동했다. 그 진동을 느낀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이걸 직접 몸으로 느끼고 나니 진정 그들의 왕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일단 난 당분간 몸을 추슬러야겠다. 한 달 정도 걸릴 것이다. 그 전에 내가 급히 해야 할 일이 있느냐?"
10명의 수뇌부가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댔다.
"폐하의 옥체가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이옵니다!"
10명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에 사내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가슴이 울리는 것 같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수뇌부 중 하나가 일어나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장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제게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사내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나섰다.
이내 방 안에는 9명의 수뇌부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드디어……!"
"드디어 폐하께서 부활하셨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부활을 위한 준비에만 수십 년이 걸렸다. 부활 의식에 필요한 재료와 기술, 그리고 마법을 준비하느라 그들의 세월 대부분을 바쳤다.
물론 그들의 왕이 죽기 전에 전해 준 것들이 없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해냈다. 크란 제국이 직접 전쟁을 일으키는 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이 잘 풀렸다.
왕이 부활했으니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왕의 힘으로 그들도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몸을 준비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다. 반쪽 부활이 되지 않으려면 몸에 각종 안배가 필요했다. 그래서 다시 힘을 되찾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어야만 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끝났다. 왕은 힘을 되찾을 것이고, 그들은 다시 예전처럼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후우. 앞으로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우선 부활의 법부터 정확히 전수받아야 하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그들의 부활은 왕이 맡았다. 당연히 왕의 부활은 스스로 해결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왕의 죽음이 너무나 급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왕이 색다른 것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부활의 준비를 미룰 정도로 깊은 흥미를 느끼는 바람에 다른 모든 걸 제쳐 두고 거기에 매달렸다.
물론 그 덕분에 그들의 힘만으로 왕의 부활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또한 왕이 다시 힘을 되찾는 시간도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이 모든 것이 왕이 관심을 가진 그것 덕분이었다.
"사실 난 폐하께서 우리를 넘어서는 고대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셨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했네."
"나도 마찬가지일세.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테니까."
"어쨌든 이제 한시름 놓았군. 슬슬 우리의 몸이 무너질 때를 대비해서 새로운 육체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그래야지. 그래도 각자 나름대로 준비해 둔 것이 있지 않나? 난 조금 준비했네만……."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니 그 정도 준비를 안 했을 리 없었다.
"앞으로 거기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겠군."
"하면 지금 하는 전쟁은 어쩌면 좋겠나?"
그 말에 나머지 수뇌부가 차갑게 웃었다.
"어쩌긴. 생명을 더 많이 확보해 놔야 하지 않겠나? 그 일곱 왕국을 정벌한 다음 그들을 이용해 피와 영혼을 모을 생각이네."
"대륙 전체에 피바람이 불겠군."
"항상 해 오던 일 아닌가."
그 말에 다들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련한 눈으로 회상에 잠겼다.
그동안 대륙에 벌어졌던 큰 전쟁은 전부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오로지 부활을 위해서.
☆ ☆ ☆
에어스트 왕국은 새로운 점령지를 안정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지금까지는 여력을 상당히 남겨 두고 차근차근 진행했는데, 갑자기 방침이 바뀌었다.
새로운 방침을 세운 것은 에어스트 왕국의 국왕인 제론이었다.
제론이 갑자기 나타나 모든 것을 바꿔 버렸다. 또한 군사 훈련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 갑작스러운 행보에 다들 당황했다. 하지만 유능한 인재들답게 그러면서도 조금도 차질 없이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렇게 에어스트 왕국의 방침을 바꾼 제론은 다시 크란 제국으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더욱 치열하게 유적을 등록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겨 버렸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크란 제국의 정보망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었다면 미연에 막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에어스트 왕국의 일을 처리한 다음, 크란 제국에 도착했을 때, 바인으로부터 새로운 보고서가 들어왔다.
"난민이 대거 이동했다고? 무려 30만 명?"
크란 제국군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30만 명의 난민을 모아 어디론가 끌고 갔다는 보고였다.
다만 그들이 향한 곳이 마티의 범위를 벗어나는 바람에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물론 유추는 가능했다.
지난번 벌였던 일을 반복했을 것이다. 지난번에는 수천 명이었지만 이번에는 30만 명이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대체 그렇게 많은 사람을 학살해서 무엇을 이루려 한단 말인가.
제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음이 무거웠다. 또 막지 못했다.
이런 걸 막으려면 더욱 넓고 촘촘한 정보망을 가져야만 했다. 그러려면 일단은 유적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전쟁은 어떻게 되었지?"
당연히 전쟁에 관한 보고도 있었다. 모나트 왕국을 집어삼킨 크란 제국은 파죽지세로 나머지 왕국도 밀어붙였다.
1천 기가 넘는 발굴형 기간트가 일제히 몰려오는데 그걸 제대로 막을 수 있는 왕국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나머지 왕국도 순차적으로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이제 란체 왕국만 남아 있었다.
란체 왕국은 아모르를 공급받은 덕분에 크란 제국의 공세를 꿋꿋이 버텨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1천 기의 발굴형 기간트가 몰려오는데 아무리 아모르 군단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걸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제론은 일단 7개 왕국은 더 이상 손댈 수 없다고 판단했다. 란체 왕국을 지금 가서 도와 봐야 시간과 힘만 낭비할 뿐이었다.
지금은 차라리 새로운 유적을 등록하는 편이 나았다.
아직 크란 제국에는 등록해야 할 유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 모든 유적을 다 등록하지 않으면 엠페리움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솔직히 아직 제론은 그들에 대해 너무나 모른다.
지금까지 알아낸 거라고는 크란 제국에 근거지가 있다는 점과,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어떻게든 그들에 대해서 알아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있었다.
향후 그들이 얼마나 더 미친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뭘 하든 미리 알아내기만 하면 막아 내는 게 가능했다.
제론은 오랜만에 레벨리오에게 연락을 취했다. 일단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편이 좋았다.
차근차근, 하지만 빠르게 유적을 차지할 것이다.
☆ ☆ ☆
한 달이라는 시간은 어떻게 보면 길고, 또 짧다면 엄청나게 짧은 시간이었다.
엠페리움의 수뇌부에게 있어서 최근 한 달은 정말로 긴 시간이었다.
한 달 만에 7개 왕국을 복속시켰다. 그들을 크란 제국의 영토에 편입시키진 않았지만 식민지로 만들어 이미 착취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앞으로 하게 될 일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이 할 진짜 일은 전쟁이었다. 어마어마한 피를 부를 전쟁 말이다.
그 전쟁에서 7개 왕국은 지독한 짓을 저지를 예정이었다. 일단 포로는 없었다. 병사건 민간인이건 족족 죽일 것이다.
왕이 돌아오셨으니 그분의 방법으로 부활이 가능했다. 그것은 왕을 부활시킨 방법보다 훨씬 간단하고 효과적이었다.
그 방법을 살짝 응용해서 예전 란체 왕국의 테페룸 광산을 말려 버리고자 했었다. 물론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걸 위해선 왕이 내려 주는 생령주가 필요했다. 그 구슬은 피의 정화와 영혼을 담을 수 있었다. 하나의 생령주로 한 명을 부활시킬 수 있으니 얼마나 효율적인가.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그래서 한 달 30일을 마치 30년 같이 기다렸다. 생령주를 채워 넣을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말이다.
"생령주에 몇 명의 피를 채워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 반 기대 반이로군."
생령주에 채워야 하는 피의 양과 영혼의 수는 정해지지 않았다. 생령주의 상태에 따라 달랐다. 그리고 생령주의 상태는 소유주에 따라 달라졌다.
현재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다들 늙었다. 생령주를 통해 부활하는 경우 수명이 엄청나게 늘어나서 오랫동안 버틸 수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시간이 지나 버렸다.
모든 것이 왕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제 대체 얼마나 많은 피와 영혼이 필요할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우리도 30만 명 정도면 되지 않겠소?"
"글쎄. 우리는 폐하와 많이 다르니 그보다 훨씬 많이 들지 않겠소?"
"하지만 폐하를 부활시킨 방법은 생령주가 아니었으니, 효율 면에서 상당히 떨어졌을 거요."
"확실히 그건 그렇지."
"어차피 의미 없는 대화일 뿐이오.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 않겠소?"
그 말에 다들 수긍했다. 확실히 생령주의 비밀에 대해서는 아무리 애써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들의 왕이 그걸 감춘 게 아니었다. 워낙 난해하고 어려운 데다가 이해하는 데 특별한 재능과 능력이 필요했기에 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일단 생령주를 받고 부활의 법을 제대로 배우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오."
"동의하오."
설사 생령주가 없다 하더라도 부활의 법을 정확히 꿰고 있으면 충분히 부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부활의 법 자체가 생령주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제대로 익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10명이 동시에 배우면 각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부분이 다를 테니 나름의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혹시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수월하게 왕을 부활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사실 어설픈 부활의 법으로 부활이 가능한 사람은 그들의 왕이 유일했다. 왕 자체가 완성되어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영영 왕을 깨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번에는 정말로 완전히 끝나는 줄 알았소. 그러니 다음에는 결코 이런 일이 반복되어선 안 되오."
"당연한 일 아니겠소? 미리미리 준비해 둡시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표정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슬슬 왕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아직 나타나지 않아 불안했다.
만일 왕이 이대로 훌쩍 떠나 버리면 그들은 완전히 닭 쫓던 개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왕이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왕에게 있어서 엠페리움의 수뇌부는 오랜 신하이자 동료였다. 또한 노예이기도 했다. 그들은 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수족을 그냥 내다 버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그들이 아니었다면 다시 부활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것 아닌가.
그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거대한 존재감이 그들을 짓눌렀다.
"허억!"
"이, 이것은!"
존재감이 너무나 거대해서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드디어 그들의 왕이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