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전쟁의 목적 (2)
"전쟁이 너무 지지부진하군. 이래서야 제대로 피를 볼 수가 없지 않은가."
엠페리움의 회의실에서 복면을 쓴 사내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자가 그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전력을 더 투입해야 할 것 같소."
"우리가 일곱 왕국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인가?"
"그보다는 방해꾼이 있는 것 같소."
"방해꾼?"
"문두스."
"끄응. 문두스……."
문두스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짜증이 났다. 그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짜증 나는 보고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역시 이번에도 어김이 없었다.
"카체 백작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그라고 별수 있겠소?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정보전에서 밀리면 방법이 없는 법이오."
"끄응."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정해야만 했다. 엠페리움의 정보력은 문두스에 비해서 한참이나 모자란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보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힘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겠군."
"각자 알아서 내놓읍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전쟁을 길게 끌면 안 될 것 같소."
"동감하오. 에어스트 왕국 쪽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소."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에어스트 왕국 쪽에 나가 있던 대부분의 끈이 떨어져 나갔다.
에어스트 왕국은 모든 텔레포트 게이트를 폐쇄해 버렸다.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조치였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엠페리움이 정보를 얻는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 한데 그게 싹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어스트 왕국에 병합된 나라의 경우 엠페리움의 정보 조직이 차츰차츰 정리되는 중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 귀신같이 찾아내서 족족 박살을 내 버리는 통에 대부분의 정보 조직이 날아가 버렸다. 또한 아직 남아 있는 정보 조직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 모든 활동을 중지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에어스트 왕국 쪽의 정보가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다. 대체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그런 상황이니 이번 전쟁을 길게 끌어선 안 된다.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빨리 끝내서 그분의 부활을 서둘러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감춰 둔 전력을 꺼내야겠군. 난 베르 150기를 내놓겠소."
나머지 사내들도 각자 감춰 두었던 전력을 꺼냈다. 전쟁을 빨리 끝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주로 발굴형 기간트였는데, 다 모으니 무려 1천 기가 넘어갔다. 발굴형으로만 그 정도 수가 되면 어떤 왕국이든 단번에 밀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서두릅시다. 최대한 빨리 기간트를 모아서 전장으로 보내야겠소. 일단 모나트 왕국부터 쓸어버립시다."
"동의하오."
그들은 그렇게 중지를 모은 다음 곧장 움직였다.
1천 기가 넘는 기간트 부대가 곧장 전선으로 이동했다.
☆ ☆ ☆
제론은 엠페리움이 처참한 광경을 펼쳤던 장소에 도착해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피의 흔적도 없었다.
그렇게 많은 피를 쏟아 냈는데, 그 흔적이 전혀 없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제론의 감각은 이제 엄청난 수준에 올라 있었다. 당연히 시각이나 청각은 물론이고 후각도 어마어마하게 예민했다.
그런 제론의 후각에도 전혀 피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피를 흘렸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이곳에 머물렀던 기사들의 시큼한 땀 냄새도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인데 피 냄새가 없다니 그게 어떻게 말이 된단 말인가.
"그 마법진이 주변의 피까지 말끔히 빨아들인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불길했다. 제론은 태블릿을 꺼내 당시의 영상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남김없이 피를 빨아들이는 마법진과 그 피를 모두 받아들였을 걸로 의심되는 관, 그리고 기사들이 들고 있던 구슬까지 어느 하나 범상한 게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지? 그리고 저 관 안에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야?'
제론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엠페리움이 벌이는 일이었다. 그게 평범할 리 없었다. 아마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것이다. 저렇게 어마어마한 사람을 희생해 가면서 이뤄야 할 일이라는 것이 세상에 이득이 될 리 없지 않은가.
엠페리움이 가진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은 현시대에 없는 기술을 쓸 수 있었다. 그들의 시설에서 테페룸 가공 물질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제론은 그들의 목적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태블릿에 다급히 떠오른 보고들 때문이었다.
"모나트 왕국이 무너져? 그것도 고작 하루 만에?"
제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비록 모나트 왕국에 정보를 주지 않았다곤 하지만, 제아무리 크란 제국이라도 그들을 하루 만에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모나트 왕국에는 크란 제국군으로부터 빼앗은 기간트가 엄청나게 많았다. 그걸 이용해 원래보다 전력을 더 키울 수 있었다.
그러니 설사 테오스 용병단이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쉽게 크란 제국에 밀려날 리 없었다.
"게다가 크란 제국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쳤다고?"
크란 제국은 동시에 7개국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니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마당에 더욱 전력을 집중해 공격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다른 왕국의 전력을 빼돌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테오스 용병단이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전황을 유리하게 바꿔 놓았다.
그걸 다 해결하기 위해선 적지 않은 전력이 필요했다. 즉, 한군데로 전력을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한데도 고작 하루 만에 모나트 왕국을 무너뜨렸다고 하니 믿기가 어려웠다.
제론은 이어지는 보고를 서둘러 읽었다.
"1천 기의 발굴형 기간트가 추가로 투입되었다고?"
제론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기존의 기간트 부대에도 더 많은 기간트를 보냈다. 단숨에 전력이 절반 이상 늘어난 셈이었다.
그로 인해 전황이 급격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다른 왕국들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대단하긴 대단하군."
제론은 이 전쟁이 일단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테오스 용병단을 빼돌리고 그 이후의 일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 시간을 끌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젠 불가능해 보였다.
제론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 ☆ ☆
"빨리빨리 움직여라!"
촤아악!
"꺄악!"
새까만 채찍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때마다 비명이 울렸다. 채찍질 소리와 비명 소리가 어우러져 사람들에게 공포를 선사했다.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이 거지꼴로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다들 핼쑥하기 그지없었고, 몸은 피골이 상접해서 뼈만 남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데도 그들을 관리하는 병사와 기사들은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거침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짜악! 짜악!
"멈추지 말고 걸어라! 꾸물대면 차라리 죽고 싶어지는 것이 뭔지 알게 될 것이다!"
짜악! 짜악!
"아악!"
"꺄악!"
연달아 채찍이 움직였고, 그때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는 건 공포가 주는 힘이었다.
그들은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은 엄청난 넓이의 벌판이었다. 그곳에는 먼저 도착해서 뭔가를 준비한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복장을 보면 마법사와 기사인 듯했다. 그들은 난민들이 도착하자 눈을 빛내며 인솔 책임자에게 다가갔다.
"목표치는 맞췄나?"
"30만 명입니다."
기사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잘했다."
그들이 세운 목표치가 30만 명이었다. 그동안 관에 흡수시킨 사람과 관에 새겨진 마법진의 변화를 토대로 계산한 숫자였다.
아마 계산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번 한 번으로 모든 일이 끝날 것이다.
"다들 저 위로 모아."
벌판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인원이 30만 명이나 되니 그들을 모두 처리하기 위해선 평소보다 몇 배나 더 큰 마법진이 필요했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와 병사들이 움직였다.
"다들 움직여!"
짜악! 짜악!
채찍이 날았고, 사람들이 비명과 함께 우르르 걸어갔다. 이내 모든 사람들이 벌판 위에 그려진 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당연히 마법진에 모두 올라갈 수 없어서 대부분은 마법진 밖에 위치했다. 물론 전혀 상관없었다.
일단 발동하기만 하면 이 마법진은 모든 사람을 핏물로 만들어 흡수할 것이다.
거기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마법진이 커진 만큼 영향력을 미치는 범위도 넓어졌을 테니 평소보다 훨씬 더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기사들이 품에서 구슬을 꺼냈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흡수하는 아티팩트였다.
아티팩트에 마나를 흘려 넣으니 은은한 진동과 함께 구슬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진이 가동되었다.
우우우우웅!
촤촤촤촤촤촤악!
"으아아아악!"
"꺄아아악!"
마법진 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인간이 기이한 힘에 의해 갈려 나가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도망치려고 애썼지만 누구도 도망치지 못했다. 마법진에서 흘러나온 핏빛 기운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며 사방을 휩쓸었다.
"크윽!"
멀리 떨어져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거기에 휘말렸다. 그들의 예측보다 마법진의 범위가 훨씬 넓었다.
콰콰콰콰콰!
병사들을 휩쓴 핏빛 소용돌이가 더욱 반경을 넓히며 그 뒤에 선 기사들까지 휘감았다.
다들 기겁을 하며 물러나던 와중이었는데, 기운이 퍼지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채 도망치기도 전에 휩쓸려 버렸다.
"크아아악!"
고통스런 비명이 벌판을 가득 울렸다.
이미 끌려온 사람들은 다 죽은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들을 데려온 기사와 병사들도 몽땅 죽었다.
그 정도로 마법진의 범위가 넓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손에 아티팩트를 든 기사들뿐이었다.
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에서 핏물이 되어 마법진으로 끌려 들어가는 동료를 곁눈질로 확인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끌려갈 것만 같았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듯해서 두려웠다.
콰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핏빛 소용돌이가 탐욕스럽게 피를 흡수해 마법진으로 이끌었다.
그 모든 피가 마법진 속으로 깨끗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어마어마한 수의 영혼이 구슬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내 소용돌이가 사라졌다. 그리고 마법진도 사라졌다.
살아남은 기사들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손에 든 구슬을 놓치지 않으려 소중하게 품었다. 그걸 놓치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구슬이 뿜어내는 빛에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 구슬에 영혼이 꽉 찼다는 뜻이었다.
기사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관을 꺼내야만 했다.
품에 구슬을 넣은 기사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그들은 저마다 검을 뽑아 땅을 파헤쳤다. 마나가 담긴 검이 땅을 거칠게 헤집었다.
이내 관이 나타났다. 관에 새겨진 마법진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끝났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필요가 없었다.
"크윽!"
기사들이 갑자기 신음을 흘렸다. 품에 넣은 구슬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다.
"뭐, 뭐지?"
가슴에서 연기가 흘러나왔다. 구슬이 달아오르면서 옷과 살을 태운 것이다.
"크악!"
기사들이 다급히 품에 넣었던 구슬을 꺼내 바닥에 휙 던졌다. 가슴에 파고들던 구슬을 강제로 빼내는 바람에 손에도 극심한 화상을 입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자신의 손과 바닥의 구슬을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전해 들은 바가 없었다.
스으으으.
바람이 불었다. 기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바람인 줄 알았는데 바람이 아니었다. 관에서 흡력이 일어난 것이다. 그 흡력 때문에 주변 공기가 흘러가 바람이 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구슬이 관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착! 착! 착! 착!
구슬이 관에 달라붙었다. 마치 원래 구슬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 놓은 듯 구슬이 달라붙은 자리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구슬이 그 자리에 들어가니 끼워 맞춘 듯 딱 맞았다.
수십 개의 구슬이 관에 절반쯤 박혔다. 그리고 관의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구슬의 빛이 하나로 합해지면서 더욱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화아아아악!
기사들은 순간적으로 눈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빛을 본 순간 눈이 멀어 버린 것이다.
"크아악!"
눈알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에 다들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고통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흐어억!"
기사들은 갑자기 온몸이 분해되는 고통에 괴성을 질렀다. 눈이 멀어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몸이 조각조각 잘려 나가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실했다. 온몸이 고통스럽다가 서서히 감각이 사라졌다.
그리고 기사들이 핏물로 변해 관으로 스며들었다.
그 자리에는 요요로운 빛을 흘리는 관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지이이이잉.
관이 은은하게 진동했다. 흘러나오는 빛도 점점 더 강해졌다.
그리고 한순간 빛이 하늘로 쭉 솟아올랐다. 마치 핏빛 기둥이 하늘을 꿰뚫는 것 같았다.
핏빛 기둥은 나타남과 거의 동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관에서 흘러나오는 빛도 모두 사라졌다.
관에 새겨진 마법진이 희미해졌다. 그리고 관이 푸석푸석해지더니 풀썩 주저앉았다.
먼지구름이 자욱이 일어났다.
휘이익!
바람이 불어 먼지를 싹 날려 버렸다.
그 자리에는 젊은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사내는 벌거벗고 있었는데, 자신의 몸이 신기한지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좋은 몸이로군."
사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옷이 없었지만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따악.
사내가 손가락을 튀기자 사방의 마나가 빨려들었다. 그리고 마법이 펼쳐졌다.
앞으로 사내의 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감각이 극도로 예민한 자들 외에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소드 마스터 말이다. 물론 기준은 고대였다.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치 싱그러운 공기와 햇볕을 즐기기라도 하듯 양팔을 넓게 벌리고 고개를 살짝 치켜든 채 눈을 감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