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화 (192/217)

Chapter 3 전쟁의 목적 (1)

"이제 좀 한가해졌군."

제론은 테오스 용병단을 이용해 크란 제국의 공세를 막아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엠페리움의 동태를 살폈다. 이번 전쟁의 뒤에 엠페리움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전쟁을 방해하면서 그들의 의도를 알고자 했다.

물론 그것은 제론이 직접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마티를 이용해 바인이 조사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제론은 정보 수집을 바인에게 맡겨 놓고, 본격적으로 유적에 관계된 일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일단 중앙 유적을 클리어하는 일과 크란 제국의 유적을 모두 등록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제론은 거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자 했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이 새로 병합한 왕국을 하나로 만들면서 차츰차츰 제국으로 발돋움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보류시켜 놓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제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제론은 이런저런 복잡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중앙 유적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이스히스와 타히티를 동시에 상대해야만 한다. 둘과 치열하게 싸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만간 벨트에 있는 30개의 아공간을 모두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진정한 테오스의 기사단이 탄생하게 된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제론은 기분 좋게 웃으며 중앙 유적 로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싸울 시간이 되었다.

☆ ☆ ☆

"간신히 준비가 끝났군."

엠페리움에서 파견한 기사들이 거대한 마법진 위에 서서 중얼거렸다.

그 마법진 아래에는 관 하나가 묻혀 있었다. 그리고 그 관 안에 성체가 잠들어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성혼을 담은 육체가 누워 있었다.

이제 그 성혼을 깨우고 육체에 안착시킬 시간이 되었다.

물론 그냥 되는 건 아니었다. 그건 이제 조만간 이곳에 도착할 수많은 노예의 피와 영혼에 의해 이뤄질 일이었다.

"이번으로 마무리되면 좋겠는데……."

기사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씁쓸함이 가득했다.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였다. 같은 일을 다섯 번이나 하다 보니 이젠 정신적으로도 지쳐 버렸다.

게다가 그 일이라는 것이 수많은 목숨을 없애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피로감은 더 심했다.

슬슬 피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스스로를 느끼며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그것이 기사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이 짓을 조금만 더 하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노예를 끌고 와라."

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거대한 마나스톤을 꺼냈다. 그리고 그 마나스톤을 마법진 중앙에 박아 넣었다.

지이이이잉!

마나스톤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은은히 진동하며 마법진 곳곳에 스며들어 갔다. 이 마법진은 아주 특별했다. 테페룸을 특수한 방법으로 가공해서 만든 재료로 만들어졌다.

이 마법진 한 번 그리는 데 수천만 골드가 필요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마법진인지 충분히 알 만했다.

곳곳에 마나가 스며든 마법진이 검붉은 핏빛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맞춰 수천 명의 노예가 나타났다.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마법진을 바라보는 노예 무리의 눈에 아득한 절망감이 피어났다.

"뭣들 하느냐! 시간이 없다! 서둘러!"

기사의 명령에 병사들이 움직였다.

"빨리빨리 걸어!"

병사들이 창으로 사정없이 노예를 찔렀다.

"아악!"

"크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공포에 질린 노예들이 서둘러 달렸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마법진 위였다.

수천의 노예가 마법진 위에 올라갔다. 마법진이 크긴 했지만 수천 명이 모두 올라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절반 정도는 마법진 밖으로 삐져나왔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 부분은 용인한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병사의 눈빛에 다급함이 어려 있었지만 공포에 질린 노예들은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고오오오오오!

마법진에서 더욱 강렬한 핏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노예들을 휘감아 버렸다.

촤촤촤촤촤촤촤악!

"크아아악!"

"아악!"

"살려 줘!"

마법진의 중앙에서부터 노예들이 핏빛 기운에 의해 갈려 나갔다. 조각도 남지 않고 핏물이 되어 쏟아졌다.

그걸 본 노예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핏빛 기운은 그저 노예를 죽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도망치지도 못하게 했다.

촤촤촤촤촤촤악!

"아악!"

"으아악!"

수천의 노예가 몽땅 핏물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노예들이 그렇게 죽어 나갈 때, 기사들은 전부 품에서 핏빛 구슬을 꺼내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허공을 유영하던 무언가가 기사가 들고 있는 구슬에 빨려 들어갔다. 구슬은 무언가를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점점 더 짙은 핏빛이 되어 갔다.

지독한 의식이었다. 그걸 지켜보는 병사들도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도 움직이거나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지금 움직이면 위험하다는 것을 지난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내 바닥에는 핏물만 남았다. 그리고 그 핏물이 마법진을 향해 스며들어 갔다. 아니, 마법진이 핏물을 남김없이 싹싹 빨아들였다.

스으으으으으.

핏물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는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그걸 듣고 있으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벌써 몇 번째 같은 광경을 보고 같은 소리를 듣는데도 그러했다. 이건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종류의 끔찍한 의식이었다.

"후우. 끝났군."

바닥의 마법진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마법진을 구성하는 물질과 핏물이 혼합되어 아래에 파묻은 관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땅을 파라!"

기사의 명령에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리고 서둘러 땅을 파헤쳤다. 이곳에 더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오래 남아 있으면 정신이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땅을 적당히 파헤치자 검붉은 관이 나타났다. 표면에 새빨간 마법진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는데,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두려웠다.

기사들이 다가가 관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멀었군. 아무래도 숫자를 늘려야겠어."

생각해 보면 고작 수천의 노예를 이용하자고 수뇌부에서 전쟁을 결정했을 리가 없었다.

'역시 수만 단위는 되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 어쩌면 최소한 10만은 모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10만이나 되는 사람을 한데 모으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 중이니 가능하기는 하겠지.'

기사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시간이 없었다. 구슬에 모으는 영혼도 턱없이 모자랐다.

이 일을 빨리 끝내려면 더 잔인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 스케일을 키우는 수밖에 없었다.

"관을 마차로 모셔라. 돌아간다!"

기사의 명령에 병사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이내 화려하고 튼튼한 마차가 나타났고, 그 안에 관이 실렸다.

그리고 마차와 함께 모든 기사와 병사들이 떠나갔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걸로는 그러했다.

☆ ☆ ☆

제론은 유적 로비에 누워서 숨을 헐떡였다. 조금 전 싸움은 정말로 치열했다. 지금까지 중에 최고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승리했다.

"이제야 대충 패턴에 익숙해졌군."

제론은 세 기간트를 동시에 상대해서 이겼다. 이스히스와 타히티, 그리고 마크리아가 동시에 덤벼드니 처음에는 제대로 반응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충분히 그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세 기간트가 싸울 때 쓸 수 있는 패턴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거기에만 익숙해지면 그럭저럭 상대가 가능했다.

물론 그 전에 제론의 실력 자체가 높아진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결코 그들을 이길 수 없었으리라.

"이제 8기가 되었군."

이스히스와 타히티가 각각 3기씩이고 마크리아가 2기였다. 이번에 동시에 3기의 기사를 얻으면서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볼 때 앞으로는 더 많은 기간트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즉, 한 번에 얻는 기사의 수가 더 많아진다는 뜻이었다.

'이대로라면 몇 번 더 이기면 벨트의 아공간을 꽉 채울 수 있겠어.'

벨트를 꽉 채우려면 앞으로 22기의 기사를 더 얻으면 된다. 상대하는 기간트의 수가 계속 늘어날 거라고 가정하면 최대 네 번만 더 승리하면 된다.

물론 한 번 한 번의 싸움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수가 늘어나면 공격 패턴도 훨씬 다양해질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제론은 자신 있었다. 남은 싸움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빨리 끝날 것이다. 지금 제론은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더 강해지면 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벽을 무너뜨리면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제론은 습관적으로 아공간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그리고 바인의 보고를 확인했다.

"음?"

이번에 온 바인의 보고는 제론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누워 있던 제론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바인의 보고를 찬찬히 읽었다. 제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거 완전히 미친놈들이로군."

마티를 통해 저장한 영상이 태블릿에서 펼쳐졌다. 제론은 그 영상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지독했다.

"대체 저건 누구의 관이지?"

궁금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확인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관을 든 병사들이 마티의 영역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건 직접 몸으로 뛰는 수밖에 없겠어."

제론은 잠깐 유적에서 나가 보기로 결정했다. 사실 30기의 기사를 모두 채우기 전에는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저 문제는 그냥 내버려 두면 큰일 날 것 같았다.

태블릿을 다시 아공간에 넣은 제론은 사건이 벌어진 곳에서 가장 가까운 유적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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