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정복전쟁 (2)
각 군의 사령관을 임명한 것은 사령부 회의에서였다. 카체 백작은 그 회의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사령부의 기를 꺾기 싫었다. 또한 자신이 가진 정보만으로 각 군의 사령관을 결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말이다.
한데 그 결과가 이렇게 나왔으니 이젠 그 모든 것이 사령부의 귀족들 책임이 되었다.
"능력이 없었던 건지, 운이 없었던 건지 모르겠군."
카체 백작의 말에는 의심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당연히 사령부의 귀족들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더욱 깊이 조아렸다.
여기서 괜히 나섰다간 집중 포화를 맞고 쓰러진다. 자신만 죽는 게 아니라 가문까지 풍비박산이 날 수도 있었다. 이럴 때는 그저 숨죽이고 있는 것이 최고였다.
란체 왕국의 쉘터 대공은 대군을 직접 이끌고 크란 제국군을 맞이했다.
그리고 1왕자는 상당한 병력을 동원하고도 모자라 엠페리움의 지원까지 받아서 크란 제국이 공격 시점에 딱 맞춰 쉘터 대공의 뒤를 쳤다.
한데 쉘터 대공의 그 많은 병력이 결정적인 순간 싹 빠져나가 버렸다.
대체 어떤 방법을 써서 어디로 빠져나갔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로 최고의 작전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결국 1왕자가 이끄는 병력과 크란 제국군이 부딪쳤다.
카체 백작이 분노하는 부분이 바로 그 점이었다. 만일 크란 제국 사령관에게 생각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결코 거기서 막무가내로 돌진해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적진에 크란 제국의 기간트가 섞여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최소한 의심이라도 했을 것이다.
한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전력만 믿고 무작정 밀어붙였다.
당연히 1왕자가 이끄는 병력은 큰 힘을 쓰지 못하고 끊임없이 밀려났다. 하지만 독기만 남은 1왕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대항했다.
결국 크란 제국군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까지 큰 패배를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 순간, 쉘터 대공의 병력이 크란 제국군의 뒤를 치기 전까지는 누구도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쉘터 대공은 병력을 어디로 빼돌려서 데려왔는지, 크란 제국군의 뒤를 쳤다.
크란 제국군은 앞뒤로 찌부러지는 형국이 되었다. 게다가 쉘터 대공의 전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제대로 힘을 쓰지도 못했다.
크란 제국군의 선택은 1왕자군을 밀어 버리고 그쪽을 통해 후퇴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쪽을 관통해 란체 왕국으로 그냥 밀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결국 1왕자군을 완전히 밀어 버릴 수 있었는데, 그 순간 쉘터 대공의 병력이 크란 제국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란 제국군은 신출귀몰한 쉘터 대공의 병력 운용 앞에 크게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했다.
그리고 쉘터 대공의 기간트 군단이 그들을 추격하며 어마어마한 피해를 안겼다.
결국 란체 왕국에 크란 제국이 준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란체 왕국의 골칫거리인 1왕자를 처리해 주었고, 또 1왕자에게 지원한 엠페리움의 기간트를 몽땅 잃어버렸다.
반면 쉘터 대공은 적절한 순간 치고 빠져서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했다.
이제 란체 왕국을 치려면 새로운 병력을 모아야만 했다. 물론 그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쉘터 대공이 쓴 그 신출귀몰한 병력 운용의 비밀을 알아내지 않으면 같은 결과가 반복될 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란체 왕국은 내가 직접 가는 수밖에."
카체 백작의 말에 사령부 귀족들이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바라봤다.
"나 대신 갈 사람이 혹시 있나?"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갈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란체 왕국은 병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반면 란체 왕국을 정벌하기 위해 간 7군은 거의 괴멸된 거나 다름없었다.
거길 맡으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셈인데, 누가 가겠는가.
그런 위험한 곳을 카체 백작이 직접 맡아 주겠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전략을 좀 수정해야겠다. 앞으로 란체 왕국 쪽은 버티기로 들어간다. 나머지 왕국에서의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모든 전력을 란체 왕국에 투입한다."
카체 백작의 말에 사령부 귀족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감이 높아졌다. 앞으로 대체 얼마나 밀어붙일지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패배한 지역에 보강 전력을 보내도록. 다시 패배하면 사령관부터 참수할 테니 각오하라는 전언도 함께 보내라."
카체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전투 결과가 잘 나오길 바라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한 카체 백작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뇌가 녹아 버릴 정도로 머리를 굴려. 그럴듯한 작전을 짜란 말이야. 그게 사령부의 일 아닌가? 기간트도 없이 최전방에서 싸우고 싶지 않으면 죽을 정도로 머리를 써야 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카체 백작이 밖으로 나갔다.
막사 안에는 한동안 긴장과 침묵이 감돌았다. 다들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할 뿐이었다.
☆ ☆ ☆
쉘터 대공은 흐뭇한 눈으로 포어트를 바라봤다. 이번 전쟁에는 포어트의 공이 가장 컸다. 아니, 포어트가 끌어들인 비밀 세력 문두스의 힘이 일등공신이었다.
"대체 그런 자들을 어디서 찾은 건가? 난 그런 조직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말이야."
"사실 절 도와준 은인입니다."
쉘터 대공의 눈이 커다래졌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래? 대체 어떤 은혜를 입었기에 자네가 그렇게 말하는지 궁금하군."
"절 소드 마스터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쉘터 대공은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포어트를 소드 마스터로 만들어 주다니.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제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 주었습니다. 벽을 깰 실마리를 던져 준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아마 그들이 아니었다면 전 아직도 그저 그런 실력으로 전장을 전전했을 것입니다."
"흥미롭군."
"그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자세히 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도 믿기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하면 자네에게 아모르를 선물로 준 것도 그들이겠군."
"그렇습니다."
사실 포어트에게 그 모든 일을 해 준 것은 제론이었다. 하지만 포어트는 그 사실을 그대로 말할 생각이 없었다. 제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쉘터 대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두스는 정말로 굉장한 도움을 주었다.
탁월한 정보력을 통해 적의 공격 시점과 작전을 고스란히 알 수 있었다. 심지어 1왕자가 뒤통수를 칠 것까지 알아냈다.
그뿐 아니라 아모르까지 지원해 주었다. 물론 막대한 자금을 들여 구입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걸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한 일이었다.
현재 아모르는 대륙 최고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번 전투의 회피 작전의 중심이 바로 문두스였다. 문두스는 특별한 방법으로 쉘터 대공의 병력을 크란 제국군 뒤로 이동시켰다.
어떤 방법으로 이동시켰는지는 알 수 없었다. 미리 준비한 거대한 상자 안에 들어간 채, 상자만 그들이 옮겼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이용한 기만전술을 통해 전장을 빠져나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당시 상황을 곱씹어 볼수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분명히 뭔가 다른 방법이 있었다. 아주 특별한 그들만의 방법이 말이다.
"아무튼 그들의 수장을 만나 보고 싶네. 자네가 한번 힘을 써 보게."
"최대한 애써 보겠습니다."
포어트는 정중히 대답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두려웠다. 쉘터 대공이 문두스를 집어삼키려는 시도를 하면 정말로 큰일이었다. 문두스 뒤에는 에어스트 왕국이 있었다.
그리고 에어스트 왕국에는 제론이 있었다. 그 붉은 학살자 제론이 말이다.
포어트는 제론에 대한 고마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왠지 제론이 마음먹으면 란체 왕국 정도는 단숨에 뒤집어엎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긴, 이젠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없군.'
포어트는 이미 제론의 사람이었다. 란체 왕국에서 쉘터 대공을 위해 싸우고 있지만, 그것 자체가 제론이 원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었다.
제론을 떠올린 포어트가 팔뚝에 돋는 소름을 쓰다듬어 잠재웠다.
현재 란체 왕국에는 쉘터 대공도 모르는 소드 마스터가 무려 10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제론의 은혜를 입어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당연히 제론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아마 이번 전쟁이 길어지면 그들이 하나둘 나설 것이다.
'과연 쉘터 대공이 란체 왕국의 왕이 될 수 있을까?'
포어트는 그 생각이 들자 또다시 팔뚝에 소름이 오돌오돌 돋았다.
제론과 문두스를 떠올리기만 해도 두려웠다. 그리고 함께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안도했다.
☆ ☆ ☆
"폐하. 재고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엔트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엔트 옆에는 바이스와 카이트, 그리고 세나가 있었다.
다들 불안이 가득한 표정으로 제론만 바라봤다.
제론은 씨익 웃었다. 어찌나 미소가 밝은지 순간적으로 불안감이 싹 날아갈 정도였다.
"모습을 바꾸고 갈 테니까 아무도 모를 거야. 걱정할 거 없어."
"하지만 새로운 용병단이, 그것도 기간트를 무려 100기나 보유한 용병단이 나타났다고 하면 다들 의심을 할 것입니다."
"문두스 못 믿어? 다 알아서 할 거야. 정보는 벌써 조작해 뒀어. 그리고 소문도 적당히 흘리고 있고."
"하지만……."
제론이 단호히 말했다.
"이번 전쟁이 그렇게 단순한 것 같아? 엠페리움 놈들이 뭔가를 꾸미고 있어."
제론은 세 사람을 슥 둘러봤다.
"하지만 폐하께서 용병대장이라니요. 너무 위험합니다."
"내가 위험할 것 같아?"
제론이 자신만만하게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제론이라면 그 어떤 상황에서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믿음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전쟁터였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 아닌가.
제론의 고집을 못 꺾을 것 같자, 이번에는 세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저는요? 이젠 아모르도 다 만들었는데, 전 또 기다려요?"
제론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세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엠페리움 놈들을 정리하고 난 다음에 우리 결혼하자."
결혼이라는 말에 세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지금까지 얼마나 기다려 왔던 말이던가.
하지만 남은 길이 너무 험난했다. 엠페리움이라니, 아직 실체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놈들인데 대체 언제 그들을 정리한단 말인가.
그래도 희망은 생겼다. 그걸로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제론은 환하게 웃으며 뒤로 슬쩍 물러났다.
"그럼 다녀오지."
"폐하!"
"기다려 주십시오!"
다들 다급히 제론을 불렀지만 이미 그 자리에 제론은 없었다.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중앙 유적으로 텔레포트한 것이다.
다들 허탈한 표정으로 방금 전 제론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이튿날, 크란 제국과의 전쟁에 특별한 용병단이 참전했다는 소문이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그 용병단의 이름은 테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