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레벨리오의 잔당 (3)
"서, 설마 정말로 테페룸입니까?"
제론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슈틀러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테페룸이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테페룸은 쉽게 녹일 수 있는 금속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녹이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녹이는 게 불가능하니 당연히 액체 상태로 보관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안 갈 건가?"
제론의 말에 슈틀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의 휘하에 있는 천여 명의 조직원이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슈틀러는 고개를 돌려 제론을 바라봤다.
"다들 이 위에 올라가."
제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슈틀러가 손짓을 했다. 그러자 모든 조직원이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마법진이 워낙 컸기 때문에 모두 올라가고도 공간이 약간 남았다.
제론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조직원이 마법진에 올라탄 것을 확인하고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거대한 마법진이 앞에 나타났다. 그 마법진의 모양은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과 상당히 비슷했다.
샤아아아아.
제론의 마법진이 부서지며 빛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화아아아아아아악!
바닥의 마법진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제론은 마법진에 올라탄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슈틀러와 브릭이 당황한 얼굴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들이 막 뭐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강렬한 빛이 그들을 온통 휘감아 버렸다.
빛이 사라진 자리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다들 텔레포트를 통해 이동한 것이다.
제론은 잔여 마나의 흐름을 통해 마법이 제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다음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론의 손을 통해 마나가 흘러나갔다. 그 마나는 바닥의 마법진을 자연스럽게 감쌌다.
슈슈슈슈슈슈슈!
마법진이 마나에 잠겨 증발하기 시작했다. 테페룸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그대로 허공에 녹아들었다.
순간적으로 은신처 안의 마나 밀도가 수백 배나 높아졌다.
이런 마나를 그냥 내버려 두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고 마나를 빨아들였다.
쉬이이이이익!
제론의 온몸으로 마나가 스며들었다. 일단 받아들인 마나를 아랫배와 심장으로 나눠 보냈다. 지금은 융화되지 않지만 차츰차츰 마나호흡을 통해 녹이면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래 봐야 마나가 엄청나게 많이 늘어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버리는 게 아까워서 흡수했을 뿐이었다.
"자, 그럼 나도 슬슬 빠져나가 볼까?"
제론은 굳이 텔레포트를 쓸 생각이 없었다. 그냥 하수도를 통해 빠져나가면 된다.
태블릿을 꺼내 하수도의 상황을 확인한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빈틈은 그대로 있었다. 물론 이젠 아주 적은 수가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지만.
제론은 태블릿을 든 채로 일단 은신처를 빠져나갔다. 태블릿에 하수도의 거미줄 같은 길이 쫙쫙 그려졌다. 그리고 적의 위치가 빨간 점으로 표시되었다.
제론은 빨간 점이 오지 않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이미 마법을 통해 모습을 감추고 마나를 통제해 기척도 없앴기 때문에 웬만해선 제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빈틈을 찔러 이동하니 제론이 적에게 잡힐 리 없었다. 물론 잡히더라도 간단히 상황을 타파하고 도망쳤겠지만 말이다.
제론은 빠르게 하수도를 벗어났다. 하수도 밖에도 수많은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하수도 구멍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제론은 도시 밖으로 이어진 하수도 구멍을 선택했다. 그곳을 지키는 병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편이 나았다. 어쩌면 엠페리움은 레벨리오에 대한 관심을 상당 부분 접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레벨리오의 잔당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판단하면 수뇌부가 날아간 상황에서 굳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제론은 하수도를 빠져나가 빠르게 목적지로 향했다.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은 도시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벌판에 있었다. 제론은 마법까지 써서 속도를 높였다. 아직 그들과 헤어져선 안 된다. 그들에게 지시할 것이 있었다.
그리고 미처 챙겨 가지 못한 마나폭탄과 스크롤도 전해 줘야 하고 말이다.
제론의 신형이 마치 빨랫줄처럼 쭉 늘어났다. 그렇게 순식간에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사방을 살피는 장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레벨리오의 새로운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격렬하고 지능적이었다. 그리고 교묘했다.
레벨리오는 엠페리움에게 예전보다 훨씬 더 골치 아픈 존재가 되었다.
그 중심에 슈틀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