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2/217)

Chapter 10 레벨리오의 잔당 (2)

레벨리오의 뒤를 봐주던 자가 최근 연락을 끊었다. 물론 당분간 자중하고 있으면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평생 연락이 없을 수도 있었다.

"대체…… 우리에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요?"

제론이 단호히 대답했다.

"내게 필요하니까."

어찌나 단호하고 냉정하게 말했는지 슈틀러는 섬뜩함마저 느꼈다. 마치 모든 감정을 싹둑 잘라 내는 것 같았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정을 붙이지 말라고?'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의 레벨리오에는 제론이 꼭 필요했다. 잊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은혜를 잊고 날뛰는 쓰레기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언제부터 활동을 재개할 생각이지?"

"물건이 왔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오. 다만, 아직은 조직을 추스를 준비가 좀 필요하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다. 아마 현재 레벨리오는 정보력도 상당히 부족할 것이다.

아쉽게도 그 부분은 제론이 채워 줄 수 없었다. 제론이 이들에게 원하는 건 새로운 도시의 시설이었다. 이미 장악한 도시의 활동은 전혀 원하지 않았다.

'가만, 굳이 이들을 그렇게만 쓸 이유가 있나?'

제론은 광장을 둘러봤다. 천 명이 넘는 사람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뭔가를 하고 있었다. 이런 은신처가 최소 다섯 군데만 더 있어도 어마어마한 인원이 된다.

그들을 그냥 놀리는 건 인력 낭비였다.

물론 저들도 놀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 제론에게 도움이 되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너희, 레벨리오의 목적이 정확히 뭐지?"

제론의 뜬금없는 물음에 슈틀러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풀렸다. 생각해 보면 이런 질문을 이제야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많은 도움을 무상으로 제공하는데 무슨 일을 하는 조직인지도 모른다는 것이 정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그저 엠페리움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전부인가?"

"……엠페리움으로부터 이 대륙을 구해 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요."

"대륙을 구한다고? 엠페리움이 꼭 대륙을 멸망시키려는 것처럼 들리는군?"

슈틀러가 묘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럼 그것도 모르고 우리를 도운 거요? 대체 우리를 이렇게 도와주는 이유가 뭐요?"

"나도 목적은 같아. 엠페리움을 무너뜨리는 것이지."

슈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도움을 주지도 않았을 테니까. 생각해 보면 지금 레벨리오와 제론은 손을 잡은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엠페리움에 대한 정보를 좀 줄까?"

슈틀러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게 가능하오?"

"명확한 정보를 주겠다는 게 아니야. 너희들이 아마 상당히 열심히 발로 뛰어서 정확한 정보로 만들어야 할 거야."

"하면 이 마나폭탄과 스크롤은……."

"아, 지금까지 하던 일도 계속해야지. 너희도 알겠지만 그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 엠페리움의 힘이 거기에서 비롯되니까."

슈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레벨리오의 수뇌부라면 누구든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후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생각해 보면 정말로 힘든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벌써 포기하고 조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슈틀러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정보를 주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슈틀러의 말에 제론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물었다.

"레벨리오에서 너의 위치가 어느 정도지?"

슈틀러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슈틀러는 수뇌부 중에서도 중간 이하에 속하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많이 달라졌다.

"수도의 본거지가 날아가는 바람에 수뇌부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알기에 기대를 가지고 물어본 것이었다. 예상이 맞다면 슈틀러의 지위는 상당히 높아졌을 것이다.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갑니다."

"세 손가락 안이라…… 그 말은 세 번째라는 뜻이 아니군?"

슈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와 같은 지위를 가진 자가 둘 더 있습니다. 셋이 의논을 해서 레벨리오를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제론은 슈틀러의 말을 듣고 레벨리오의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라면 레벨리오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봐도 괜찮을 듯했다.

사실 수도의 본거지가 날아가면서 레벨리오는 거의 와해 직전이었다. 레벨리오의 수뇌부가 사라지면서 자금이 말라 버린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해 레벨리오에 지급되는 보급도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이젠 모든 걸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그런 상황을 굳이 제론에게 시시콜콜 애기하진 않았다. 하지만 제론은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이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식량 조달은 어떻게 하고 있지?"

"아직 아무 대책도 없소."

제론이 의아한 눈으로 슈틀러를 쳐다봤다.

"대책이 없다고?"

"남은 식량이 조금 있소. 당분간은 그걸로 버텨 보고 다음 일은 떨어진 다음 정할 생각이오. 그래서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있소."

"움직임을 최소화한다고? 정찰도 안 한단 말인가?"

"그렇소."

"그럼 아까 내보낸 사람은 뭐지? 정찰을 보낸 것도 아니고 식량 조달을 위한 것도 아니면 그냥 혼자서 나간 건가?"

제론의 말에 슈틀러의 안색이 급변했다.

"누군가 나갔소?"

제론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길에 마주쳤지. 물론 내 모습이 안 보였을 테니 들키진 않았지만."

제론은 시시각각 변하는 슈틀러의 표정을 보고는 사태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배신자가 나온 것이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군. 보아하니 다들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야."

배고픔 때문에 조직을 배신했다고 믿기는 싫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슈틀러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부끄럽소."

난감했다.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을 이제 어디로 피신시킨단 말인가.

제론이 이곳에 도착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났으니 아마 지금쯤 크란 제국의 병력이 하수도로 들어왔을 것이다. 도망칠 길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한 번 더 도와줘야 할 것 같군."

제론의 말에 슈틀러가 깜짝 놀라 바라봤다.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었다.

"원하는 게 뭐요?"

제론이 씨익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 있는 모두."

슈틀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설마 우리를 당신 발아래 놓고 싶다는 거요?"

"발아래 둔다는 말은 좀 심하고. 내 조직에 들어오라는 뜻이지. 하는 일은 지금까지와 다르지 않을 거야. 어때?"

슈틀러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레벨리오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건 곤란하오. 난 우리 조직을 떠날 수 없소."

"내 말을 오해했군. 조직을 떠나라는 말이 아니야. 통째로 내 휘하에 들어오라는 뜻이지."

슈틀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그 말 아닌가.

"말장난 따위를 할 생각도 시간도 없소."

"잘 생각해 보라고. 그러니까 지금까지처럼 마음대로 조직을 운영해. 그러다가 내 지시가 떨어지면, 그 지시 사항만 이행하면 되는 거야. 어때? 이래도 같다고 생각하나?"

"그 말은 우리를 독립적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뜻이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앞으로 상당히 많은 일이 벌어질 거야. 요즘 분위기 안 좋은 거 알지? 이럴 때 나 같은 든든한 버팀목에게 잠시 기대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슈틀러는 마음이 흔들렸다.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혼자 결정할 수 있어. 난 다른 사람들을 원하는 게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만 원해."

"그건……!"

슈틀러는 할 말이 없었다. 대체 그게 무슨 뜻인가, 자신보고 레벨리오에서 나오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레벨리오는 레벨리오고 난 나야. 적을 두 개 두는 건데 어렵나? 서로 배척되면 어느 편을 들어도 상관없어."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슈틀러는 제론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모두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슈틀러는 말투와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이제부터 제론은 자신의 상관이 되었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돌아섰다.

"잠시만 기다려. 금방 돌아올 테니까."

제론은 광장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은밀한 곳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호오, 많이도 몰려왔군."

하수도 안에 들어온 병사의 수가 상당했다. 하지만 왠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적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싹 쓸어버릴 것 같았는데, 그런 모양새가 아니었다.

물론 병력이 많긴 했다. 그리고 상당한 실력자들이 많이 들어왔다.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고 적을 괴멸시키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이 빈틈은 뭐지? 만일 이쪽으로 도망쳤으면 다 놓치는 거 아닌가?"

포위망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물론 그 구멍으로 빠져나갈 확률이 적긴 했다. 하지만 만일 저들이 정말로 절실하게 레벨리오를 잡아내려 했다면 그런 구멍조차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저 구멍을 통과해서 가기에는 이미 늦었군."

조금 더 서둘렀다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인원이 좀 많긴 했지만 제론이 한바탕 휘저어 주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너무 늦어 버렸다.

"일단 돌아가서 준비를 해야겠군."

태블릿을 이용해 도시 주변 상황도 모두 파악했다. 도망칠 위치까지 정한 제론은 서둘러 은신처로 돌아갔다.

제론이 돌아온 걸 확인한 슈틀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자신들을 버리고 그냥 갔을까 봐 상당히 걱정을 했다.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고 믿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슈틀러와 브릭이 제론에게 다가갔다. 둘의 표정에는 다급함이 어려 있었다.

"준비할 테니 다들 물러나라고 해."

제론의 말에 슈틀러와 브릭이 서둘러 주변을 정리했다. 순식간에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아공간에서 마법진을 그릴 재료를 꺼낸 제론은 일단 바닥의 물기를 싹 말려 버렸다.

화아아악!

강렬한 열기가 제론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바닥이 바짝 말랐다.

제론이 손을 뻗어 바닥을 가리켰다. 손앞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샤아아아.

마법진이 부서지며 바닥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바닥이 평평하게 깎여 나갔다.

파파파파파팍!

평평해진 바닥에 제론이 시약을 이용해 마법진을 그렸다. 단방향 텔레포트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은 엄청나게 거대했다. 사람들이 물러나 만들어진 넓은 공간을 거의 꽉 채울 정도였다.

시약을 바닥에 줄줄 흘려서 마법진을 그렸는데, 그냥 물을 흘리는 거나 다름없는데도 엄청나게 정교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시약이 바닥에 닿는 순간 빛을 내며 안착했다.

그렇게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의 위용은 모두를 압도했다.

다들 멍하니 마법진이 그려지는 광경을 바라봤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은 가느다란 펜으로 그려도 제대로 그리기 어려울 정도로 세밀하고 정교했다.

한데 그런 마법진을 그저 시약을 바닥에 줄줄 흘려서 그렸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정말로 멋진 마법진이었다. 은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 빛에 몸이 닿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힘이 느껴졌다.

제론 옆으로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슈틀러였다. 그 뒤를 브릭이 서둘러 따라왔다.

"대, 대체…… 대체 무엇으로 그리신 겁니까?"

슈틀러는 대번에 알아봤다. 마법진을 그린 시약이 아주 특별하다는 것을 말이다. 제론의 능력도 굉장했지만, 시약이 없다면 이런 마법진은 절대 만들어질 수 없었다.

제론이 시약이 든 병을 흔들며 말했다.

"느낌이 안 오나? 아는 줄 알았는데."

제론의 말에 슈틀러가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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