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9/217)

Chapter 9 흡수 (2)

"나보고 지금 도망을 가란 말이오?"

"도망이 아닙니다. 잠시 피신하여 힘을 비축하는 것입니다."

"힘을 비축한다?"

"그렇습니다. 현재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의 수뇌부도 피신을 했습니다. 그들과 손잡고 힘을 비축해 단숨에 에어스트 왕국을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흐음."

국왕이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사실 기다리던 말이었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속 보이는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더 전쟁이 길어져 피해가 커지기 전에 피신하는 편이 나중을 위해서도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귀족 중 하나가 은근한 목소리로 계속 설득했다. 그의 말에 국왕뿐 아니라 나머지 다른 귀족들도 서서히 넘어가고 있었다.

결국 동조하는 사람이 하나둘 나타났다.

"제 생각에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체스터 공국이나 벨룸 왕국도 나름대로 힘을 숨겨서 망명하지 않았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들과 손을 잡으면 에어스트 왕국에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대로 시간을 더 끌다가 에어스트 왕국군이 들이닥치면 후일을 기약하기도 어려워집니다."

동조해서 말을 쏟아 내다 보니 슬슬 조급해졌다. 서두르면 한재산 챙겨서 망명할 수 있겠지만, 더 늦으면 자칫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나마 그렇게 해서라도 도망가면 다행인데, 만일 붙잡히기라도 하면 정말로 큰일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적의 왕족이나 귀족을 살려 두지 않고 처참히 죽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귀족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탰다. 그 모든 말을 듣고 있던 국왕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좌중이 조용해지자 이내 입을 열었다.

"좋다. 경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나도 따라야지. 당장 망명 준비를 하도록."

국왕의 결단에 귀족들이 반색했다. 그리고 서둘러 회의를 종료하고 돌아갔다. 이제부터는 도망갈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냥 도망이 아니었다. 가문의 기반을 싹 들어서 가져가야만 했다.

망명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일단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으니 다른 나라로 피신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게다가 국왕령으로 게이트를 개방해 버렸다.

게이트의 지분에 크란 제국 마탑의 것이 섞여 있었지만, 나머지 지분을 몽땅 포기하는 조건으로 당분간 무료 이용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것을 공표하는 것은 국왕을 비롯한 주요 귀족들이 외국으로 망명한 다음이 될 것이다.

☆ ☆ ☆

제론은 크란 제국에 있는 유적 중 하나에 앉아 편히 쉬고 있었다.

아직 전쟁이 끝난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굳이 제론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의 주력 부대를 괴멸시켰으니 에어스트 왕국군에 대항할 만한 병력도 남지 않았다.

게다가 그 두 왕국의 수뇌부는 이미 망명해 버렸다. 무주공산이 된 것이다.

그렇게 쓰레기 버리듯 나라를 버린 왕족과 귀족의 행태에 하위 귀족들이 크게 실망해서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았다.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을 거의 동시에 정리해 나가는데도 그 속도가 엄청났다.

제론은 느긋하게 태블릿을 꺼내 바인이 보낸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요즘에는 상당히 많은 보고서가 자주 올라오고 있었다. 바인은 문두스를 더 크게 키워서 막대한 정보를 다루는 게 가능해졌다.

"헥서 왕국도 수뇌부가 망명을 했군."

에어스트 왕국군은 헥서 왕국도 함께 점령 중이었다. 그 속도가 또 엄청나게 빨랐다.

세 왕국의 백성이나 하위 귀족들이 느끼는 배신감이 그만큼 컸다.

에어스트 왕국이 세 왕국을 점령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안정적인 흡수였고, 그다음이 텔레포트 게이트를 철거하는 일이었다.

"할 일이 많아졌군."

현재 에어스트 왕국에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제론뿐이었다.

게이트 설치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전수한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에 오로지 제론 혼자서 그 많은 게이트를 설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재 틈틈이 유적 간 텔레포트를 통해 에어스트 왕국 곳곳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하고 있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원하는 모든 도시에 게이트를 만드는 데 몇 년은 걸릴 듯했다.

"레벨리오의 활동도 도와야 하는데……."

현재 제론이 해야 할 일을 크게 나누면 그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어느 하나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텔레포트 게이트의 설치는 거대해진 에어스트 왕국의 물류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레벨리오의 활동을 지원해야 향후 크란 제국의 유적을 등록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크란 제국에 꽁꽁 숨어서 눈을 번득이는 엠페리움을 상대할 수 있게 된다.

엠페리움의 힘은 제론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들을 그냥 방치했다간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차근차근 병행하자."

일단 하루에 최소 하나의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들기로 했다. 잠을 줄이는 한이 있어도 그건 반드시 할 필요가 있었다.

크란 제국 마탑이 수집하는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 점령지의 텔레포트 게이트를 몽땅 폐쇄했다.

당연히 크란 제국 마탑의 반발이 있었지만 제론은 그걸 깨끗이 무시했다.

크란 제국 마탑은 에어스트 왕국 출신에게 타 왕국의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제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다.

예전을 기준으로 3개 왕국과 1개 공국이 병합되었다.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 안에서만 제론의 게이트를 통해 물류 혁명을 일으켜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살 수 있었다.

타 왕국과 무역을 하는 상단의 경우 타격을 입겠지만, 4개 나라의 병합이 가져오는 막대한 이득이 있다면 타 왕국의 모든 걸 포기해도 상관없었다.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각종 시뮬레이션을 통해 제론이 직접 확인했다.

게다가 제론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이번 전쟁에 기간트를 지원한 왕국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일단 이번에 병합한 나라들을 안정시키고 나면 차츰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들이 반발을 하든 움츠러들든 상관없었다.

반발하면 박살 내서 새로운 영토로 흡수하고, 움츠리면 계속 압박하면 그만이었다.

그들은 이번 일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를 것이다. 행한 일의 몇 배로 말이다.

이번 전쟁에 기간트를 지원한 왕국들은 대부분 소국이었다. 다만 연합을 형성하고 있어서 주변 강국의 힘을 버틸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연합을 해도 엄청난 힘이 밀고 들어가면 힘없이 와해될 것이다. 에어스트 왕국은 이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아모르 생산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확인해 볼까?"

태블릿을 조작한 제론은 흥미로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모르 생산량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제 아모르 공장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느낌이었다. 기간트 제작에 숙련이 붙으며 속도와 질이 함께 증가했다.

"그래도 아직 멀었지."

최소한 2천 기 이상의 아모르가 더 필요했다. 이번에 새로 실전을 겪으며 급격히 성장한 견습 라이더에게 아모르를 지급해야만 했다.

또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정식 라이더가 생기면 바로 아모르를 지급해야 한다.

게다가 조만간 아모르를 다운그레이드해서 타 왕국에 판매할 계획이었다.

그 모든 걸 소화하려면 아모르를 훨씬 많이 생산해 내야만 했다.

지금 속도로 아모르를 생산단하면 머지않아 이번에 새로 정식 라이더가 된 자들에게 모두 지급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뒤로 생산되는 아모르는 적당량을 우선적으로 란체 왕국에 수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란체 왕국의 상황은 다른 어떤 왕국보다 세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왕국 전역을 뒤덮는 거대한 마티의 영역 덕분이었다.

현재 란체 왕국은 두 개의 파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포어트라는 새로운 소드 마스터가 등장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포어트는 쉘터 대공 아래로 들어가 1왕자와 대립했다.

그리고 바인은 지속적으로 쉘터 대공 쪽에 특별한 정보를 지급해 힘을 실어 주었다.

당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쉘터 대공 쪽에 유리한 구도가 만들어져 갔다.

제론과 바인은 그 뒤를 예측했다. 그래서 아모르의 생산을 서두른 것이다.

아마 조만간 란체 왕국은 거대한 전쟁에 휘말릴 것이다. 제론과 바인의 예상대로라면 1년 안에 크란 제국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아니, 크란 제국이 아니라 엠페리움에서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현재 곳곳에서 그 비슷한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그 조짐은 에어스트 왕국군이 체스터 공국군을 박살 낸 다음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5200기의 기간트가 박살 나며 체스터 공국이 회생 불능의 상태에 빠진 순간부터 크란 제국 내에 전쟁과 관련된 움직임이 조금씩 나타났고, 바인은 그것을 정확히 집어냈다.

그것은 크란 제국의 분위기라기보다는 엠페리움이 조장한 분위기일 확률이 높았다.

적어도 제론과 바인은 그렇게 판단했다.

"가만 보면 이놈들은 무슨 전쟁을 못 일으켜서 안달이 난 것 같단 말이야."

사실 제론이 더 적극적으로 이번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있었다.

에어스트 왕국이 참전하기 전까지 저들은 약탈을 무한정 허용하는 전쟁을 벌였다. 물론 약탈까지 가기 전에 모든 것이 정리되었지만, 만일 에어스트 왕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어마어마한 참극이 벌어졌을 것이다.

피를 본 군대가 약탈을 시작하면 결코 약자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한없이 잔혹해지며, 상황에 미쳐 버린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거의 기간트 전투로만 끝이 나 버렸다. 워낙 압도적인 승리라서 보병이 할 일이라고는 점령지를 정리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에어스트 왕국군은 결코 약탈을 하지 않았다. 전쟁의 목적 자체가 영토를 흡수해 왕국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왕국의 백성이 될 사람들을 약탈해서 뭐하겠는가. 에어스트 왕국군의 목표는 안정이었다.

약탈을 금지하고 합리적인 행정 체계를 도입해 점령지 백성들에게 더 나은 생활을 보장하고 신뢰를 심어 주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행정력은 대륙 최고였다. 제론이 초고대문명에서 뽑아 도입한 체계가 행정의 전체 흐름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것은 특별한 몇 가지 아티팩트가 없으면 실현이 불가능한 체계와 방식이었다.

제론은 그 아티팩트를 무한정 제작해 공급했다.

아티팩트 제작을 맡은 것은 마탑이었다. 에어스트 왕국 마탑은 그 어떤 마탑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과 마법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티팩트 제작 기술도 최고였다.

에어스트 왕국 마탑은 그 기술력과 마법을 이용해 실용적인 아티팩트를 잔뜩 제작했다. 그것은 새로운 점령지에 어마어마하게 풀려 나갔다.

그리고 점령지 안정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되다 보니 피를 볼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치안도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바인의 정보력을 통해 완전히 믿을 만한 자들을 뽑아 치안대를 조직했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왕족과 귀족에 대한 반발심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에어스트 왕국에 대한 적의도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약탈을 하지 않고 거의 기간트 전투로만 전쟁을 끝냈기 때문에 백성들이 피부로 느끼는 악감정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나마 약간 있던 감정도 에어스트 왕국군을 통해 들어온 아티팩트와 행정 체계, 그리고 풍부한 식량 때문에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에어스트 왕국은 성공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새로운 점령지를 흡수해 나갔다.

"그럼 분위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볼까?"

제론은 바인의 보고서와 자신이 직접 다루는 마티를 통해 크란 제국의 분위기를 확인했다. 역시 은밀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크란 제국은 무려 7개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중 가장 강한 나라가 란체 왕국이었고, 나머지 왕국은 고만고만했다.

그래도 하나하나가 거의 헥서 왕국에 필적할 정도로 강했다. 그 정도 역량조차 없다면 크란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살아남을 수 없었다.

"설마 이 7개 왕국 전체와 한꺼번에 전쟁을 벌이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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