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8/217)

Chapter 9 흡수 (1)

베젤 평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에어스트 왕국군은 그 여세를 몰아 체스터 공국을 차근차근 무너뜨려 나갔다.

그러는 와중에 벨룸 왕국과의 국경에서 소소한 전투가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거의 비슷한 전력으로 대치하고 있으니 단숨에 큰 전투로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국지전은 상당히 빈번하게 벌어졌다.

그리고 그런 식의 국지전이 조금씩 벨룸 왕국의 전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거기에 당황한 벨룸 왕국은 무리를 해서라도 증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왕국의 재정을 탈탈 털어 기간트를 구입하고, 그것을 전장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좋은 선택은 아니었지만, 벼랑 끝에 몰린 벨룸 왕국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에어스트 왕국이 벨룸 왕국보다 훨씬 발 빠르게 움직였다.

국지전을 통해 상대의 전력을 잔뜩 깎은 다음 곧장 치고 들어간 것이다.

에어스트 왕국의 선봉에 선 200기의 아모르가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벨룸 왕국군은 국지전에서 야금야금 병력을 잃어 기간트의 수가 1천 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 상황에서 200기의 아모르가 벨룸 왕국군의 진형을 뒤흔들고, 그 뒤를 나머지 기간트 군단이 들이밀고 들어가니 제대로 대항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사실상 양측의 라이더 실력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에어스트 왕국군의 라이더는 전부 견습, 혹은 채 견습 딱지도 떼지 못한 신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단지 아모르 200기의 힘이 큰 격차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어쨌든 에어스트 왕국군은 벨룸 왕국과의 첫 번째 전투를 대승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비록 약간의 피해를 입긴 했지만, 그쯤이야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그로 인해 벨룸 왕국만 다급해졌다. 어떻게든 기간트를 조달해 전력을 맞출 생각이었는데, 채 그렇게 하기도 전에 당해 버렸으니 이젠 더 이상 손 쓸 방도가 없었다.

결국 벨룸 왕국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국왕을 비롯한 주요 귀족들이 몽땅 옆 나라로 망명을 해 버렸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벨룸 왕국과는 더 이상 치열한 전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비 라이더로 구성된 에어스트 왕국군은 국경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벨룸 왕국의 영토를 정리해 나갔다.

체스터 공국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첫 전투에 쏟은 전력이 워낙 막대했는지라, 더 이상 기간트를 투입할 여력이 없었다.

반면 에어스트 왕국군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체스터 왕국도 벨룸 왕국과 같은 선택을 했다. 공왕을 비롯한 주요 귀족들이 옆 나라로 망명을 한 것이다.

체스터 공국도 그렇게 벨룸 왕국도 그렇고, 왕족이나 귀족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망명을 하면서 그 모든 걸 싸 들고 갈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은 상당한 재산을 포기하고 목숨을 구걸하러 떠났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나라를 수복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결과가 어찌 되었건 수뇌부가 몽땅 사라진 덕분에 에어스트 왕국은 비교적 손쉽게 두 왕국을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령과 흡수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제론은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을 완벽하게 흡수하기를 원했다. 더불어 아직 남아 있는 헥서 왕국도 꿀꺽 삼킬 계획이었다.

헥서 왕국의 주력도 제론에게 한 번 박살이 났기 때문에 사실 큰 걸림돌은 없었다.

제론은 기세를 탔을 때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병력을 반으로 쪼개 헥서 왕국의 국경을 넘었다.

☆ ☆ ☆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헥서 왕국의 국왕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대신들을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도 국왕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후우, 아무도 의견이 없단 말이오? 이대로 우리 왕국을 에어스트 왕국에 갖다 바쳐야겠소?"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데도 의견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어려운 상황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파죽지세로 4개나 되는 나라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막대한 영토를 소화시키는 중이었다.

속속 정보가 들어왔다. 그 정보를 토대로 판단하면 에어스트 왕국은 이미 크란 제국만큼이나 대단한 힘을 가진 게 분명했다.

헥서 왕국도 나름대로 상당한 정보를 사방에서 수집했다. 그래서 이번 전쟁에 크란 제국이 은밀히 관여했고, 또 주변 왕국들이 기간트를 상당히 지원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한데 에어스트 왕국은 그 모든 전력을 단숨에 박살 내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그 와중에 헥서 왕국에서 보낸 병력까지 쓸어 버렸다. 무려 하이쓰 산맥을 넘어가 기습한 기간트 군단을 말이다.

그것이 헥서 왕국의 주력군이었다. 그래서 현재 헥서 왕국은 에어스트 왕국의 침공을 제대로 막아 낼 여력이 부족했다.

국왕은 좌중을 쓸어 봤다. 그는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의 왕족과 귀족이 무슨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장 망명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았다. 죽어라 발악하면 아무리 에어스트 왕국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쉽게 왕국을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다.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이 손도 못 써 보고 당했다는 걸 알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이 커져 갔다.

"폐하. 잠시 피신을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피신?"

국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겉보기에는 분노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기다렸던 말이었다. 하지만 속내를 절대 드러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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