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베젤 평원 전투 (3)
"자, 다들 준비하라고 해."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테오스를 소환했다. 소환과 동시에 탑승이 되는 테오스의 특징에 따라 테오스는 나오자마자 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위이이이이잉!
테오스의 마나링이 맹렬히 가속했다. 함정을 파는 데에는 마법이 최고였다.
테오스가 옆으로 팔을 쭉 뻗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쫙 폈다. 그러자 그 앞에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이제 제론은 더 이상 테오스의 존재나 위력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테오스의 힘이 잘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안전해진다.
제론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앞으로 계속 규모를 키워 갈 기간트 군단이 있었다.
샤아아아아아.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지며 빛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 빛가루가 바람을 타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제론의 눈에는 빛가루가 날아가는 방향 멀리 있는 300기의 기간트 부대가 똑똑히 보였다. 빛가루는 그곳을 목표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촤촤촤촤촤!
빛가루가 결국 빛줄기로 변해 300기의 기간트를 덮쳤다. 그 기간트 부대가 빛줄기에 맞더니 환하게 빛났다. 그렇게 빛무리에 휩싸인 그들은 그대로 이동을 멈췄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거대한 빛무리가 생겨났다. 가끔 꿈틀거리긴 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제론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처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앞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기간트 군단이었다.
이번에는 테오스가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직 마법을 펼칠 때는 아니었다. 하지만 미리 준비해서 타이밍을 딱 맞춰야만 했다.
"돌격 준비!"
카이트의 명령이 떨어지자, 2천 기의 아모르가 일제히 움직여 진형을 바꾸었다.
방어 진형을 돌격 진형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에어스트 왕국군의 라이더는 이 정도 진형 변형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심지어 돌격 중간에 진형을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쿵! 쿵! 쿵! 쿵!
체스터 공국군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슬슬 돌격을 시작할 타이밍이었다.
위이이이이잉!
테오스의 마나링이 가속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9개의 마나링을 모두 써야 할 정도로 큰 마법이었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어찌나 복잡하고 아름다운지 다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마법진은 나타난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뒤로도 마나링이 계속 가속하며 점점 자라났다.
복잡한 문양이 자라나 반경이 커지는 광경은 정말로 경이로웠다.
그렇게 자란 마법진이 마치 거대한 벽처럼 앞을 가려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다음이 되어서야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샤아아아아아아아.
빛가루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마치 하늘로 강물이 흘러가는 듯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높이까지 올라갔다.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테오스가 손을 내렸다. 거기에 타고 있는 제론은 숨을 훅 내쉬었다. 정말로 힘들었다. 상당히 어려운 마법이었다. 테오스의 힘을 빌려서 펼쳤기에 5천 기에 달하는 기간트를 덮칠 만한 마법이 되었다.
만일 제론이 맨몸으로 펼쳤다면 그 정도 위력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테오스가 고개를 돌려 카이트가 탄 아모르를 쳐다봤다.
카이트는 그 신호를 바로 알아차렸다.
"돌격!"
카이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모르 군단이 일제히 달려갔다.
쿵쿵쿵쿵쿵쿵쿵!
엄청나게 빠르게 달리는데도 진형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모르 군단이 달려들자, 체스터 공국군은 오히려 속도를 늦췄다. 돌격을 그대로 받을 이유가 없었다.
크라프트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적절한 명령을 내렸다. 속도를 줄인 것도 모두 크라프트의 명령에 의해서 이뤄진 일이었다.
돌격하는 적은 길을 터 주며 옆을 공략하면 된다.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타이밍이 엄청나게 중요했다.
크라프트는 그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그를 위해 지휘관의 마음을 짓누른 것이다.
크라프트가 적당한 타이밍을 잡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크라프트는 물론이고 체스터 공국군의 모든 기간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들 경악했다.
하늘에서 뭔가가 잔뜩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들이 하늘을 꽉 메워 빛이 가려진 것이다.
"대체 저게 뭐지?"
크라프트가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곧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주먹만 한 쇳덩어리였다. 그것들이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콰우우우우우!
쇳덩어리는 내려오면서 점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뜨겁게 달아오른 쇳덩이가 일제히 바닥을 때렸다. 당연히 그 사이에 있던 기간트들 역시 쇳덩이에 얻어맞았다.
피할 겨를이 없었다. 워낙 광범위하게 쏟아졌기에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었다.
꽈과과과과과과과광!
크라프트는 자신에게 떨어진 쇳덩이를 향해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쩡! 쩡! 쩡! 쩡! 쩡!
수십 개의 쇳덩이를 옆으로 쳐 냈다. 그럴 때마다 온몸에 충격이 쌓였다. 그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쉿덩이를 모두 쳐 냈을 때 그의 검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우그러지고 뜯어져 더 이상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크라프트는 멍하니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바라봤다. 무려 4900기의 기간트가 거기에 있었다. 한데 몸이 성한 기간트는 거의 없었다,
완전히 뭉개진 기간트가 중앙 부분에 몰려 있었고, 움직일 수는 있지만 전투가 불가능한 기간트가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리고 비교적 멀쩡한 기간트가 외곽에 있었다.
어쨌든 이대로는 적을 상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어스트 왕국의 아모르 군단은 딱 그 시기에 짓쳐 들었다.
꽈과과과과광!
2차 피해가 발생했다. 비교적 멀쩡했던 기간트들이 완전히 부서져 나갔고, 뭉개진 기간트는 짓밟히는 바람에 고철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전투가 불가능한 기간트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이건…… 말도 안 돼……."
크라프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조건 승리할 거라 자신했다. 한데 이게 대체 뭔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쿵! 쿵! 쿵!
크라프트 앞에 아모르 한 기가 다가왔다. 크라프트는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아모르를 바라봤다.
그 아모르의 주인은 카이트였다. 크라프트는 직감적으로 눈앞의 기간트가 적의 사령관임을 알아차렸다.
"일단 머리부터 차근차근 잘라 가야겠군."
전투에서는 졌지만 최소한 사령관의 목이라도 가져가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라도 안 하면 위신이 서지 않았다.
크라프트의 히엠스가 찌그러진 검을 들어 아모르를 겨눴다.
아모르가 달려들었다.
꽈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이번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제론은 전장을 슥 둘러봤다. 압도적이었다. 그런 큰 마법을 썼으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마법은 9개의 마나링을 풀가동하고도 펼치기 어려운 마법이었다. 적 전력이 너무 많아서 살짝 무리를 한 것이다.
하늘 높은 곳에 쇳덩이를 소환해 떨어뜨리는 마법으로 그저 쇳덩이가 떨어지면서 얻는 힘만으로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엄청난 위력의 마법이었다.
만일 마법을 조금 변형시켜서 쇳덩이의 크기를 키우고 높이를 더 높이면 지형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위력도 낼 수 있었다.
어쨌든 어려운 마법이었지만 그걸 성공시켰고, 그로 인해 전투가 훨씬 수월해졌다.
아군의 피해는 극히 미미할 것이다. 이미 초토화된 적을 그저 유린하기만 하면 끝이었으니까.
제론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적 사령관과 대치 중인 카이트가 보였다.
적 사령관의 역량이 상당한 것 같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적 사령관의 히엠스에는 충격이 쌓여 있었다. 실제로 카이트의 실력이 조금 모자라겠지만 기간트 성능의 차이가 있으니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제론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빛무리를 쳐다봤다.
"내가 저것만 해결하면 되겠군."
그곳에는 300기의 네불라가 있었다. 그것만 정리하고 나면 이 전투는, 아니, 이 전쟁 자체가 사실상 끝나는 거나 다름없었다.
테오스가 천천히 빛무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어느새 테오스 뒤로 타히티, 이스히스, 마크리아가 하나씩 나타나 따라갔다.
네불라 부대의 대장인 츠바이는 억지로 당황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주위를 둘러봤다.
온통 새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주변에 있는 동료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던 츠바이는 갑자기 아래에서 뭔가가 휙 솟아나자 깜짝 놀라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나타난 것은 거대한 오우거였다. 새까만 오우거였는데, 츠바이는 저런 색의 오우거가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크워어어!"
오우거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츠바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쩌저저정!
츠바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무슨 오우거가 이렇게 강해!"
오우거의 팔이 네불라의 검을 모두 막아 냈다. 팔이 잘라져야 하는 게 당연한데, 너무 멀쩡했다.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쿠오오오!"
오우거가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부우웅!
풍압이 네불라의 몸을 흔들 정도로 강력했다. 츠바이는 깜짝 놀라 검을 들며 몸을 비틀었다.
쩌어엉!
빗겨 막았는데도 충격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츠바이는 기겁을 하며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네불라 특유의 민첩한 움직임이 오우거의 두 번째 공격을 간신히 피해 냈다.
후웅!
쩌저저저저저정!
네불라의 검이 오우거의 몸을 난타했다. 팔로 막았을 때와는 달리 몸에서는 피가 튀었다. 하지만 그 어떤 상처도 깊지 않았다.
그저 베는 것만으로는 큰 타격을 입힐 수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오우거의 상처가 거의 즉시 아물어 버린다는 점이었다.
"정말 괴물이로군."
츠바이는 기가 질렸다. 대체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잠깐 여유를 가지니 슬슬 다른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 괴상한 빛무리에 갇힌 것은 자신뿐이 아니었다. 동료들도 함께 갇혔다.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자신도 이렇게 고전하는데 동료들은 과연 무사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젠장!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츠바이는 이를 악물었다. 검은 오우거가 또 달려들었다. 오우거의 주먹에 무지막지한 바람이 뭉쳐 휘몰아쳤다.
후웅! 후웅!
츠바이의 네불라가 오우거의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그리고 검을 그대로 찔렀다.
꽈득!
네불라의 검이 오우거의 가슴을 꿰뚫었다. 온 힘을 다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오우거는 고작 그 정도로 죽지 않았다. 오우거가 네불라를 꽉 끌어안았다. 가슴이 꿰뚫린 채로 기간트를 옥죄는 오우거의 힘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꽈드득! 꽈득!
네불라가 비틀어지며 부서지는 소리가 몸 곳곳에서 들려왔다. 츠바이는 크게 당황했다.
"이익!"
네불라가 몸부림쳤다. 하지만 오우거의 힘이 워낙 대단한지라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도 조금씩 비틀어 틈을 만들 수 있었고, 네불라는 결국 검을 뽑으며 푹 주저앉아 오우거의 품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촤악!
가슴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콸콸 쏟아지는 피를 보고 있으니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츠바이는 이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