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베젤 평원 전투 (2)
체스터 공국군도 사실 그리 순조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문제는 새로 등장한 총사령관이었다.
각국에서 보내 준 기간트 부대에는 각각의 사령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자신의 능력을 내세워 한 자리라도 차지하려고 기 싸움을 벌였다.
그 와중에 어디에서 보낸 건지 모를 자가 새로운 총사령관으로 등장했다.
문제는 그의 출신이 어딘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다들 그의 정체를 의심했다. 그리고 그가 총사령관이 된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짜증 나는군."
크라프트는 만사가 귀찮았다. 지금 그는 벽을 깨기 일보직전이었다. 엠페리움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굳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확신했다. 자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조용한 공간이라고, 그곳에서 명상을 통해 마음에 검을 세우고 그것을 갈고닦아야 한다고.
실전이 도움을 줄 시기가 있고, 그것이 오히려 방해가 될 시기가 있는데, 지금은 후자였다. 굳이 실전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
한데 이런 번잡스러운 전쟁터에 온 것도 못마땅한데 어설픈 놈들의 기 싸움까지 보고 있으려니 짜증이 솟구치다 못해 살의가 일었다.
크라프트는 치솟는 살기를 억지로 가라앉혔다. 지금은 이런 살의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지금은 마음을 명경지수처럼 고요히 가라앉혀야 한다.
"후우, 참자. 이러다가 간신히 세운 검이 박살 날라."
그동안의 명상을 통해 마음에 검 한 자루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제 벽을 깨기 위해 그 검을 갈고닦아야만 한다. 그렇게 벼린 마음의 검으로 벽을 부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 어렵게 세운 검을 여기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다스려야만 했다.
그걸 완성하기만 하면 크라프트는 엠페리움에서 가장 강한 기사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아마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이런 전쟁터에 불려 다니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무엇이든 거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크라프트는 그 부분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을 참아 낼 수 있었다.
"쓸데없는 피를 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잡음을 줄이고 일을 빨리 끝내려면 어쩔 수 없지."
크라프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감시 겸 경계를 위해 막사 밖을 지키고 있는 호위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휘관을 모두 불러 모아."
크라프트의 명령에 기사 몇 명이 다급히 움직였다. 어쨌든 그는 공왕이 임명한 총사령관이었다. 또한 다른 지휘관들에게 미리 들은 명령도 있었다.
어쩌면 이번이 총사령관의 기를 꺾을 절호의 기회인지도 모른다.
잠시 소란이 일더니 여기저기서 지휘관들이 모여들었다. 그 수가 상당했다.
무려 5200기의 기간트가 모인 곳이다. 당연히 지휘관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크라프트는 그것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일단 지휘관을 반으로 줄여야겠군."
크라프트의 중얼거림은 아주 나직했지만,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었다.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다들 깜짝 놀라 크라프트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이를 갈았다. 지휘관을 반으로 줄인다는 말은 이곳에 있는 지휘관 중 절반을 잘라 낸다는 뜻이었다.
대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사령관! 지금 그 말, 진심이오?"
지휘관 중 하나가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동조하듯 여기저기서 성토가 쏟아졌다.
"우리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요!"
"지휘관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크라프트는 그 많은 성토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지극히 담담한 눈빛으로 지휘관들을 쭉 둘러봤다.
그는 격하게 성토하는 지휘관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리고 검을 뽑았다.
스릉.
크라프트가 검을 뽑자, 다들 깜짝 놀랐다.
"사령관!"
"이게 무슨 짓이오!"
지휘관들도 저마다 검을 뽑았다. 자칫하다간 이대로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또 이번 기회에 사령관을 정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후자의 비중이 훨씬 컸다.
몇몇의 눈빛이 일렁였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모인 지휘관은 모두 익스퍼트 이상이었다.
게다가 한두 명도 아니었다. 이곳의 모두가 나선다면 사령관은 당연히 죽은 목숨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확인했어야만 했다. 크란 제국의 기간트를 끌고 온 지휘관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표정이 긴장감으로 한껏 굳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눈빛 깊은 곳에 일렁이는 두려움을.
크라프트가 귀찮음이 물씬 느껴지는 태도로 검을 휙 내저었다. 마치 얼쩡거리는 파리를 쫓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것을 보며 검을 뽑은 지휘관들은 코웃음을 쳤다. 대체 저게 지금 뭐 하는 것인가.
지휘관들이 힘껏 땅을 박차고 앞으로 돌진했다. 일단 기선 제압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수틀리면 죽여 버리고 말이다.
투두두둑.
촤아아아!
앞으로 나가려던 지휘관의 몸통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그리고 피분수가 쏟아졌다.
크라프트가 눈에 담은 지휘관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몸통이 동강 나서 죽었다.
어마어마한 공포가 좌중을 휩쓸고 지나갔다.
"절반은 남기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쓸 만한 놈이 별로 없군."
남은 지휘관의 수는 3할 정도였다. 순식간에 절반이 넘는 지휘관이 죽은 것이다. 이는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크라프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지휘관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당장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뇌리를 뒤흔드는 공포가 그들의 이성을 와구와구 잡아먹었다.
"제자리로 돌아가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며칠 후에 공격을 할 테니까."
크라프트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막사로 돌아갔다. 그러자 막사 앞을 지키던 호위 기사 5명의 몸통이 비스듬히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투두둑.
촤아아악!
피분수가 막사 앞을 흥건히 적셨다. 또 한 번의 공포가 해일처럼 좌중을 휩쓸었다.
"명령을 두 번 내리게 할 셈인가?"
막사 안에서 나직한 크라프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사신의 호통보다 더 무서웠다.
남은 지휘관들이 후다닥 물러갔다.
크라프트의 막사 앞은 피비린내와 적막만 가득했다.
크라프트는 체스터 공국군 지휘관들의 정신을 힘과 공포로 짓눌렀다.
만일 그가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할 것이었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크라프트가 원한 것은 짧은 기간 동안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정신을 짓눌러서라도 명령에 절대복종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크라프트는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먹혔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전투 준비를 지시했다.
정신을 짓눌러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했다. 이번 전투는 어떻게 성공적으로 끝낸다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정신을 압박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크라프트는 이번 전투에 모든 걸 걸 생각이었다.
어차피 엠페리움의 명령은 체스터 공국이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크라프트는 이번 전쟁을 끝까지 수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번 전투로 끝낼 계획이었다.
보아하니 에어스트 왕국군은 지금 모인 전력을 완전히 잃으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 듯했다.
이쪽에는 5200기의 기간트가 있었다. 이 정도 전력을 보존할 수만 있다면 향후 전쟁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즉, 이번 전투에 얼마나 적은 피해로 적을 완벽하게 궤멸시키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리고 크라프트는 그걸 해낼 자신이 있었다.
5200기의 기간트가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그 광경은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질식할 정도로 위압감이 넘쳤다.
크라프트는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봤다. 별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이길 전쟁이었다. 자신이 나선 이상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크라프트는 자신의 기간트를 소환했다. 그의 기간트는 히엠스였다. 일단 그가 가진 역량을 소화해 낼 수 있는 기간트가 현재는 그것뿐이었다.
히엠스에 탑승한 크라프트는 한 손을 번쩍 들어 에어스트 왕국군의 진영을 가리키며 외쳤다.
"진군!"
5200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쿵!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울림이 규칙적으로 반복되었다. 5200기의 기간트가 만들어 내는 발 구름 소리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크라프트는 히엠스를 움직여 조금 떨어진 곳에서 느긋하게 그 뒤를 따라갔다.
일단 작전은 세웠다. 5200기의 기간트 중 일부는 크게 우회할 것이다. 당연히 네불라 부대를 쓸 것이다.
밤에 기습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괜히 기습 사실을 들켜서 네불라 부대를 잃어버리는 게 오히려 더 손해였다.
지금 정면 대결을 하면서 은밀히 빼돌려 우회 기습을 하는 편이 훨씬 큰 효과를 얻어 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마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기만 하면 최소한의 피해로 적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무려 300기나 되는 네불라가 적의 뒤를 친다면 순식간에 적의 후미가 무너지지 않겠는가.
일단 진형이 무너진 적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그때부터는 오합지졸을 상대하는 거나 다름없어진다. 아무리 대단한 기간트를 몰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크라프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의 히엠스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그가 기다리는 건 사실 에어스트 왕국의 아모르 군단이 아니었다. 저 뒤에 있을 진짜 신형 기간트였다.
피가 끓어올랐다.
"휘유. 저걸 어떻게 상대한다……."
설마 저렇게 많이 모일 줄은 몰랐기에 카이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이길 자신은 있었다. 카이트는 그만큼 아모르의 힘을 믿었다.
하지만 그냥 이긴다고 전부가 아니었기에 난감했다. 에어스트 왕국은 계속 전력을 공급받기가 어려웠다. 사실 힘겨운 전쟁을 이어 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피해를 최소로 줄여야만 했다. 그게 어려웠다.
"아무튼 준비를 해야겠지."
카이트가 막 방어 진형을 짜라고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그 옆에 밝은 빛무리가 일어났다.
"헉!"
카이트는 허리에 매달린 검을 꽉 쥐었다. 하지만 빛이 사라지고 나타난 사람을 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폐하!"
제론이었다. 딱 맞춰서 나타난 것이다.
"벌써 시작했나?"
"아직 거리가 좀 있으니 대처할 시간은 있습니다."
카이트는 다급히 말하고는 적진을 바라봤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진형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니 상당히 훈련을 잘 받은 라이더였다.
"수가 많군."
"예. 5200기쯤 됩니다."
"정면으로 붙으면 우리 피해가 제법 크겠는데?"
"아무래도……."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쓸 만한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어쨌든 제론은 테오스의 주인이었다.
"내가 해결하지. 저들의 진형을 무너뜨릴 테니까 돌격 준비를 해."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는 적을 살폈다. 그리고 눈을 빛냈다. 적진 후미에서 은근슬쩍 뒤로 빠지는 일단의 기간트 부대를 발견했다.
"뒤통수까지 때리려고 준비 중이었군."
제론은 머릿속으로 몇 가지 작전을 구상했다. 일단 우회 기동하는 적은 섬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300기라…… 적당하군."
300기 정도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정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제론이 빠져 버리면 이쪽에 문제가 생긴다.
300기가 빠져 봐야 4900기가 남는다. 그 정도 숫자면 4900이든 5200이든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내가 빠지지 않으면서 저들을 섬멸할 방법이라…….'
남은 방법은 딱 하나였다. 제론은 함정을 파서 우회 기동하는 별동대의 발을 묶어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