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새로운 게이트 (1)
에어스트 왕국이 레늄 왕국과 미테 왕국을 순식간에 무너뜨리자,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도 더 이상 전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놀랍게도 에어스트 왕국은 두 왕국을 집어삼키면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즉,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막강한 전력을 이끌고 국경을 넘으면 순식간에 당한다는 걸 잘 알기에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은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군은 국경에 모여 있었다. 왕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기간트 부대가 모두 합류한 것이다.
무려 2천 기에 달하는 아모르가 고스란히 남았다. 부서진 아모르는 즉시 수리해서 다시 투입되었다.
또한 이 와중에도 에어스트 왕국에 있는 아모르 제작 공장에서는 끊임없이 아모르를 토해 내고 있었다.
제론은 진지에 질서정연하게 줄 맞춰 서 있는 2천 기의 아모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군."
확실히 이런 기간트 군단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무려 2천 기의 아모르였다. 이들이 일제히 진군하면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아무도 아모르에 타고 있지 않다. 기간트만 소환해 놓고 다들 쉬고 있는 중이었다.
제론은 결코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인 카이트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레늄 왕국과 미테 왕국은 가진 바 힘도 크지 않았고, 원래 한 나라였기에 병합도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체스터 공국이나 벨룸 왕국은 그렇지 않다. 거기에 헥서 왕국까지 무너뜨려 흡수하려면 적지 않은 부작용을 감당해 내야만 한다.
그걸 차근차근 해결하면서 전투까지 벌여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이쪽에는 바인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전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망을 갖춘 문두스가 있었다.
그들의 힘을 이용하면 비교적 쉽게 장악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레늄 왕국과 미테 왕국을 병합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겠지만 말이다.
아모르 군단을 보고 있는 사람은 제론뿐이 아니었다. 제론 옆에 카이트도 함께 서 있었다. 카이트 역시 남다른 감회에 잠겨 있었다.
"그나저나 아쉽군요. 체스터 공국과 벨룸 왕국이 조금만 더 싸워 줬으면 훨씬 편해졌을 텐데 말입니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하지만 달라질 건 없어."
"맞습니다. 우리는 강합니다."
카이트의 어조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위압감 넘치는 기간트 군단을 보고 있으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투지가 끓어올랐다.
"적이 국경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군이 진을 친 곳은 체스터 공국과의 국경이었다. 먼저 체스터 공국을 친 다음 곧장 벨룸 왕국까지 연이어 격파할 계획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무모하다고 기겁했겠지만, 카이트는 자신 있었다. 이번 전쟁은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었다.
"벨룸 왕국이랑 제법 치열하게 싸운 모양이야. 남은 전력이 고작 그것뿐이니."
카이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예상외였다. 현재 체스터 공국이 배치한 전력은 고작 기간트 1200기에 불과했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반나절 안에 완전히 뭉개 버릴 수 있었다. 2천 기의 아모르가 내뿜는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벨룸 왕국의 칼끝이 향한 방향이 좀 걱정됩니다."
벨룸 왕국도 국경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한데 그 위치가 참으로 애매했다.
레늄 왕국 쪽으로 진격할 태세였다.
물론 벨룸 왕국의 전력도 그리 시원치 않았다. 그들의 전력도 체스터 공국과 비슷했다.
하지만 전혀 방비가 안 된 상태라면 그조차 상당한 위협이 된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전력을 둘로 나누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차근차근 부수면 돼."
"하지만 저들이 먼저 행동에 나서면 곤란해집니다."
"그쪽은 충분히 시간을 끌어 줄 병력이 있다."
카이트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시간을 끌어 줄 병력이라니, 대체 그런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아모르 200기가 추가로 준비되었거든."
"200기나 말입니까?"
카이트는 혀를 내둘렀다. 마치 틀로 기간트를 찍어 내는 것 같지 않은가. 2천 명의 라이더에게 간신히 기간트를 지급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200기나 추가했단 말인가.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던 카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아모르를 탈 라이더가 없을 텐데요? 남은 라이더는 대부분 견습이라서……."
제론이 씨익 웃으며 카이트를 쳐다봤다.
"우리 견습은 실력이 탄탄하잖아. 실전만 겪으면 진짜 라이더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카이트는 퍼뜩 떠오른 게 있어서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다른 왕국이 습격했습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헥서 왕국에서 하이쓰 산맥을 넘어왔다. 덕분에 제대로 된 실전을 경험한 200명의 라이더가 생겼지."
카이트의 표정이 밝아졌다. 200기의 아모르라면 충분히 상대를 견제할 수 있었다. 아니, 그걸 떠나서 자신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문제는 만일의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가 얼마나 빨리 그곳에 갈 수 있느냐, 로군요."
"금방 갈 수 있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제론은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안 그래도 슬슬 그 부분에 대한 일을 시작할 참이었다.
"점령지를 관리하면서 최우선적으로 텔레포트 게이트를 철수시켰겠지?"
"그렇게 진행했습니다. 현재 우리 왕국과 점령지 내에 남은 텔레포트 게이트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게이트를 관리하던 마법사는?"
"다들 떠났습니다. 확인은 안 해 봤지만 크란 제국 마탑으로 돌아간 걸로 판단됩니다."
"그렇겠지."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모두 크란 제국 마탑이 파견한 마법사였다. 사실 냉정히 따지면 마법사라기보다는 장사꾼이나 정보원에 더 가까웠지만 말이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상당히 많이 쓰이는 유용한 시설이었다. 수많은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수시로 사용해 왔다.
한데 이제 그게 사라져 버렸으니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물론 아직까지는 그런 불만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은 전시였고, 병합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점령지의 귀족이나 상인들의 경우는 외출도 조심하는 상황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영주나 귀족을 존중하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없애는 방향으로 처리했기에 다들 숨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조만간 여유가 생기면 분란의 씨앗이 될 것이다. 그걸 미연에 방지하려면 최소한 텔레포트 게이트 정도는 만들어 줘야만 했다.
일단 급한 대로 전장에서 가까운 곳부터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써먹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벨룸 왕국은 그들을 이용해서 견제하면 되니까 걱정할 거 없고, 체스터 공국을 병합하는 것에 집중하도록."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카이트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체스터 공국은 영토가 그리 넓은 편도 아니었다. 물론 하나에서 넷으로 갈라져 생긴 미테 왕국이나 레늄 왕국보다야 크지만, 그래도 다른 왕국에 비하면 영토가 좁은 편이었다.
문제는 벨룸 왕국이었다. 벨룸 왕국은 구 레늄 왕국보다 오히려 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헥서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그 두 왕국에 비하면 체스터 공국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그 이후 영토를 병합하는 과정이 훨씬 어려웠다. 각 영지가 마음먹고 반항을 시작하면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각 영지가 반항을 하는 바람에 점령을 포기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영지의 반항은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전쟁 상황이 아닌데도 그러니 전쟁으로 점령당하면 얼마나 지독하겠는가.
그걸 생각하면 점령지가 넓으면 넓을수록 제대로 된 병합이 어렵다는 건 불문가지였다.
차라리 식민지로 만들어 착취를 하는 건 훨씬 쉬웠다.
그 왕국의 백성 중 몇을 선발해 권력을 쥐여 주면 된다. 그러면 알아서 수탈을 하고 뇌물을 갖다 바칠 테니까.
하지만 지금 에어스트 왕국이 하려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완벽하게 한 나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그러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적당한 시기에 진군해. 난 텔레포트 게이트 문제를 해결하고 올 테니까."
카이트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제론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 ☆ ☆
벨룸 왕국군은 모든 전력을 모아 에어스트 왕국이 점령한 곳, 레늄 왕국과의 국경을 향해 진군했다.
기간트를 박박 긁어모으니 1400기에 달했다. 그 정도 전력이면 단숨에 국경을 무너뜨리고 안쪽 깊은 곳까지 진출이 가능할 것이다.
벨룸 왕국군의 총사령관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공격은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다.
사실 벨룸 왕국 측에서는 에어스트 왕국에 은밀히 사절단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국왕인 제론의 옷자락도 보지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에어스트 왕국의 태도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체스터 공국과 손을 잡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으르렁거리며 전쟁을 벌이던 사이였지만 각각의 위기 앞에서는 얼마든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정치였다.
벨룸 왕국이 맡은 임무는 솔직히 체스터 공국에 비하면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체스터 공국은 정면으로 에어스트 왕국군의 주력과 싸워야만 한다. 그들에게 뭔가 복안이 있으니 그 일을 맡겠다고 스스로 나섰겠지만, 어쨌든 에어스트 왕국군의 어마어마한 전력과 정면으로 붙으면 결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벨룸 왕국군은 텅텅 빈 것이나 다름없는 곳을 짓밟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임무를 맡았다.
물론 그 임무에도 위험이 따른다. 에어스트 왕국군의 전력이 곳곳에 흩어져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무지막지한 전력을 한껏 무리해서 모았다. 그 결과가 1400기의 기간트였다.
그리고 그들은 국경을 넘기 직전, 에어스트 왕국군을 볼 수 있었다.
"대체…… 저 많은 기간트가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군."
벨룸 왕국군의 총사령관은 지끈거리는 골치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무려 200기의 아모르가 보였다.
아모르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1400기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한 숫자이긴 하지만, 아모르라면 충분히 조심해야만 했다.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200기의 아모르 뒤로 거의 1천 기는 될 것 같은 기간트가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즉, 적의 전력은 1200기가 되는 셈이었다. 그것도 200기의 아모르를 앞세운 1200기였다.
이런 상대와 정면으로 싸우면 필패였다. 저걸 어떻게 이간단 말인가.
"에어스트 왕국의 저력이…… 이렇게 대단했나?"
총사령관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현재 체스터 공국과 대치 중인 에어스트 왕국군에는 2천 기의 아모르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데 여기에 또 1200기의 기간트가 더 나타났으니 기겁하는 게 당연했다.
결국 벨룸 왕국군은 국경에 진을 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들의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벨룸 왕국은 또 다른 왕국에 도움을 청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가장 먼저 헥서 왕국에 도움을 청했고, 그 외의 다른 나라에도 도움을 청했다.
어쩌면 향후 그들에 의해 왕국이 피폐해질 수도 있지만, 전쟁에 져서 영토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벨룸 왕국군은 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