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4화 (165/217)

Chapter 5 헥서 왕국의 공격 (2)

제론은 태블릿을 손가락으로 슥슥 그었다. 예전에 한 번 써먹은 방법이라 더 간단했다.

태블릿을 통해 적 상황을 보면서 날씨 조절 아티팩트를 이용했다. 아마 저들은 하이쓰 산맥을 넘느라 모든 기력을 다 소모해야 할 것이다.

"기습을 할 필요는 없겠지? 아니, 할까?"

제론은 잠시 고민했다. 테오스를 타고 타히티를 불러 기습하면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도 기회로 활용해야지. 우리 견습 라이더에게 좀 더 안전한 상황에서 실전을 겪게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결정을 내린 제론은 다시 바닥에 누웠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며 제론의 눈동자 속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젠장! 또 비야? 이놈의 산맥, 정말 치가 떨리는군."

슈피겔은 짜증을 넘어 분통이 터졌다. 하필이면 이럴 때 날씨가 이 모양이란 말인가.

하이쓰 산맥이 위험한 곳은 맞지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종종 산맥을 넘은 사람도 있고, 또 거대한 원정을 준비해 산맥을 넘어 상행을 다닌 상단도 드물지만 존재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하이쓰 산맥에 이렇게 비가 많이 온다는 정보를 주지 않았다.

"사령관 각하. 아무래도 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뭐가 말인가?"

"꼭 비구름이 우리를 쫓아오는 것 같습니다."

슈피겔이 피식 웃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비구름이 우리를 쫓아와? 왜? 갑자기 등장한 대마법사가 날씨 조절 마법이라도 썼나?"

현재 마법은 기간트를 만들기 위한 부분을 제외하면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다. 마법사도 전투에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한데 날씨 조절 마법이라니. 그건 아무리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도 구현이 불가능한 마법이었다. 아예 존재하지가 않으니까.

만일 누군가 그런 마법을 만들어 냈다면 크게 이름을 떨쳤을 것이다.

그런 마법사가 갑자기 등장해서 하이쓰 산맥에 비를 내리게 한다? 그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비구름을 보면 그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부관의 말에 슈피겔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시커먼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한데 부관의 말대로 먹구름이 좀 작긴 했다. 일단 의심을 가지고 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흐음."

슈피겔은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번 의심을 시작하니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설마……."

"어떻게 할까요?"

"일단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아직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 진군 속도를 조금 늦춘다. 체력 비축을 우선으로 하고, 조심해서 이동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산사태의 조짐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말고."

"사방으로 정찰병을 파견하겠습니다."

슈피겔은 부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수상한 먹구름이 하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호오. 이놈들 조심성이 대단한데?"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려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확실히 헥서 왕국군 사령관은 능력이 뛰어난 자였다.

그런 자가 이끄는 군대가 약할 리 없었다. 또한 훈련 상태가 어설플 리도 없었다.

아마 정면에서 맞붙으면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제론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습이라……."

결국 이대로는 적의 힘을 소진시키겠다는 계획이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남은 건 기습뿐이었다.

물론 기습을 주로 할 수는 없었다. 기습을 하면 적도 쉬지 못하지만 기습을 하는 당사자도 쉬지 못한다.

'나 혼자서 기습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제론은 그것도 자신 있었다. 제론에게는 테오스도 있고, 타히티도 있었다.

타히티를 이용한 기습전을 펼치면 적도 동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정을 내린 제론은 견습 라이더들을 대기시키고는 하이쓰 산맥으로 들어갔다.

지금 이 순간, 헥서 왕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론은 빠르게 산을 내달렸다. 여전히 날씨 조절 아티팩트는 헥서 왕국군 근방에 비를 쏟아 내고 있었다.

당연히 시야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그것을 적절히 이용했다. 지반이 물러진 상태에서 강한 충격을 주면 산사태가 일어난다. 문제는 엄청난 수의 정찰병이었다.

정찰을 통해 지반이 물러지거나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으면 빠르게 보고를 해서 진군 방향을 조절했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지반을 다져 무너지지 않게 바닥을 보강했다.

그러니 날씨를 이용해서 피해를 강요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제론은 일단 정찰병을 정리하기로 했다. 정찰병만 없어져도 작전을 펼치기에 상당히 유리했다.

하이쓰 산맥은 워낙 컸기에 정찰병의 수도 많았고, 또 정찰할 지역도 많았다.

'일단 하나 발견.'

제론은 자신이 미리 만들어 놓은 지반을 향해 이동하는 정찰병 무리를 발견하고는 씨익 웃었다.

고작 7명이었다. 익스퍼트에 이르지도 못한 병사 7명은 제론이 손만 슬쩍 휘둘러도 처리가 가능했다.

제론은 빠르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신호를 보낼 틈도 줘선 안 된다. 그럴 때는 은밀함이 생명이었다.

바람보다 빠르게 이동해 정찰병들의 뒤를 잡은 제론은 그대로 검을 뽑음과 동시에 휘둘렀다.

스아악!

7명의 목에 동시에 가느다란 실선이 생겨났다.

투두둑.

7명의 정찰병은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는 사이 목이 떨어져 죽었다.

소드 마스터만이 보일 수 있는 일격이었다.

제론은 태블릿을 꺼내 아티팩트를 통해 산맥을 위에서 살폈다. 미리 준비한 지점 근방을 지나는 정찰병을 찾기 위함이었다.

"여기 또 있군."

준비 지점을 향하는 정찰병은 아니었지만 근방을 통과하기에 지반 상태를 확인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었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내 비 때문에 질척질척한 지역에 들어섰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곳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것만으로 힘겹겠지만, 제론에게는 평지를 달리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번에도 정찰병의 뒤를 잡았다. 인원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7명이었다.

아티팩트를 통해 정찰병의 위치와 상황을 훤히 꿰고 있었기에 그들을 기습하는 건 정말 간단했다.

스아악!

제론의 검이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투두둑.

7개의 목이 떨어졌다. 이로써 준비 지점으로 향하는 정찰병을 모두 처리했다. 이제는 헥서 왕국군이 목표 지점을 통과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제론은 근처에 앉아 태블릿을 꺼냈다. 이제는 타이밍을 맞춰야 하기에 적의 동태를 더욱 세심히 관찰해야만 했다.

"음? 이놈들 봐라?"

한동안 적의 모습을 확인하던 제론이 눈을 빛냈다. 헥서 왕국군이 기간트를 소환하고 있었다. 은밀히 이동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기간트를 꺼내면 적지 않은 부담이 될 터였다.

한데도 기간트를 꺼냈다는 건, 분명히 적 사령관이 뭔가를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대단한데?"

제론은 적 사령관의 결단에 감탄했다. 만일 기간트를 소환하지 않고 산사태를 맞이한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기간트를 몽땅 소환했으니 아무리 산사태가 일어나도 최소한의 피해만으로 막아 내는 것이 가능했다.

각 기간트에게 커다란 방패를 지급해 무너지는 토사물을 막기만 해도 상당한 수의 병사를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래도 준비한 걸 썩힐 수는 없지."

제론은 적당한 타이밍을 잰 다음 테오스를 소환했다. 아무리 지반이 물러져 있다 해도 산사태를 일으킬 정도의 충격을 주려면 기간트의 힘이 필요했다.

테오스의 주먹이 희미하게 빛났다. 마나코어가 맹렬히 돌며 온몸에 마나를 공급했다. 더불어 제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거대한 회전을 시작했다.

우우우웅!

주먹에 모인 마나가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테오스가 주먹을 높이 들었다가 바닥을 찍었다.

꾸웅!

거대한 울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우르르르.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테오스의 주먹이 떨어진 자리를 중심으로 금이 쩍쩍 갔다.

꽈르르릉!

약해진 지반이 그대로 무너졌다.

테오스는 허공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떠오른 테오스의 발밑으로 흙더미가 쏟아져 내려갔다.

산사태가 일어났다.

우르르르르르르릉!

굉음을 토해 내며 쏟아지는 토사물이 산자락을 훑으며 내려갔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헥서 왕국군을 향해 나아갔다.

무너진 지반 위에 서서 쏟아지는 토사물을 보던 테오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이 아니면 기습의 기회가 없었다. 어쨌든 전력을 제법 많이 깎아 내야만 했다.

테오스의 신형이 순식간에 산 아래로 사라졌다. 그런 테오스의 뒤로 타히티가 눈부신 빛과 함께 나타나 따라갔다.

"방패 박아!"

슈피겔의 명령이 떨어지자, 나란히 선 기간트들이 거대한 방패를 땅에 푹 꽂았다. 그리고 어깨로 그것을 단단히 받쳤다.

그 방패가 쏟아지는 토사물을 막아 낼 것이다.

꽈르르르릉!

무지막지한 양의 토사물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헥서 왕국군을 덮쳤다.

"버텨! 무너지면 뒤에 있는 병사가 죽는다! 어떻게든 버텨! 뒤에 선 기간트들 뭐 하나! 밀리지 않게 등을 받쳐!"

방패를 든 기간트의 뒤에 서 있던 동료 기간트가 어깨로 등을 단단히 받쳤다. 쏟아지는 토사물의 힘은 기간트 혼자 버티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꽈과과광!

토사물이 연이어 방패를 때렸다. 그러면서 계속 흘러갔다.

헥서 왕국군은 기간트가 든 방패를 이용해 비스듬하게 산 아래로 길을 만들었다. 토사물을 정면으로 막는 건 힘들었기에 비스듬하게 흘려 버렸다.

모든 것은 슈피겔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방패와 방패의 틈으로 토사물이 좀 쏟아져 들어오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기간트 뒤에 숨은 병사들은 안전하게 보호되었다.

이대로라면 무사히 산사태를 막아 낼 수 있을 듯했다.

슈피겔은 그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대처하길 잘했군."

정찰병과의 연락이 끊기자마자 기간트를 소환시켰고, 이런 대처를 만들었다.

예상보다 산사태가 조금 늦게 온 덕분에 충분히 대처를 할 수 있었다. 슈피겔은 정찰병과 연락이 끊긴 이유가 산사태에 파묻혔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급하게 준비를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한 덕분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꽈앙! 꽈앙!

토사물에 밀려온 나무나 바위가 방패를 두들길 때마다 기간트들이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산사태는 한순간에 몰아친다. 이제 거의 끝났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슈피겔이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때, 눈부신 빛이 중간에 선 기간트의 등을 꿰뚫었다.

꽈아앙!

꽈르르릉!

방패를 받치던 기간트가 힘없이 무너졌다. 그 기간트를 받치던 기간트는 쏟아지는 토사물에 동료 기간트의 무게까지 더해지자, 그걸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꽈르르르릉!

빈틈을 통해 참사가 벌어졌다. 기간트 뒤에 숨어 있던 병사들을 토사물이 덮친 것이다. 빈틈은 일단 생기면 더 크게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대로 양옆의 기간트까지 토사물에 쓸려 넘어지고 말았다. 빈틈이 더 커졌다. 그리고 빈틈이 커진 만큼 피해도 늘어났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연이어 빛줄기가 날아왔다. 그것은 타히티가 쏘는 빛의 화살이었다.

꽈앙! 꽈앙! 꽈앙!

기간트들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아직 산사태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렇게 산사태가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쓰러진 수십 기의 기간트로 인해 산사태의 마지막 포효를 막아 내지 못했다.

토사물이 병사들을 그대로 덮쳤다. 그리고 산 아래로 쓸려 내려가 버렸다.

꽈르르르릉!

거대한 울림을 동반한 산사태가 산 아래로 쏟아져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적막이 찾아왔다.

산사태가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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