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2/217)

Chapter 4 파죽지세 (2)

"이번 전투가 마지막인가?"

카이트는 담담한 눈으로 멀리 진을 치고 있는 기간트 부대를 쳐다봤다.

거침없이 레늄 왕국을 내달려 여기까지 왔다. 수도를 함락시키자마자 출발했다면 레늄 왕국의 국왕을 중간에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가서 쓸어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베샤이덴의 물음에 카이트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힘을 쓸 필요가 없지. 아마 저들도 살기 위해 발악을 할 거야. 우리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돼."

"그냥 기다립니까? 이렇게 숨어서?"

"그래.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어. 사실 우리도 그동안 너무 강행군했잖아. 좀 쉬어야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전 아직 더 싸울 수 있습니다."

"그거야 우리 생각이고. 다른 사람은 안 그럴걸?"

카이트의 말에 베새이덴과 슈빅이 고개를 돌려 다른 라이더들을 바라봤다. 다들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도열해 있었다. 언제든 싸울 태세가 갖춰졌기에 정말로 믿음직스러웠다.

"다들 멀쩡한데요?"

"눈빛만 볼 건가? 명색이 익스퍼트가 왜 이래?"

에어스트 왕국에서는 익스퍼트라는 말이 다른 왕국과 많이 달랐다. 에어스트 왕국에서의 익스퍼트는 다른 왕국에서 부르는 소드 마스터와 동급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위에 있었다.

카이트는 물론이고 베샤이덴과 슈빅도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였다. 그들은 누구보다 마나에 민감했다.

카이트가 한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감각을 활짝 열어 라이더들이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마나의 흐름을 살폈다. 이내 두 사람의 표정이 축 늘어졌다.

"제 생각이 좀 짧았군요.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예. 적어도 사흘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아. 이번 기회에 한 닷새 푹 쉬자고."

"예? 그렇게 오래요? 그러다가 저놈들 다 도망가면 큰일 아닙니까?"

"도망가라지. 그리고 그냥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베샤이덴과 슈빅은 눈에 마나를 집중해 적진의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적은 이쪽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저들은 미테 왕국과 한창 전쟁 중이었다. 그리고 국왕이 합류하면서 전력이 상당 부분 강화되었다.

"아무래도 저쪽을 뚫고 나갈 가능성이 높겠군요. 우리와 대적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주면 줄수록 준비를 철저히 해서 공격하겠지."

베샤이덴과 슈빅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게 되면 미테 왕국의 전력까지 깎아 낼 수 있었다.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길 자신이 있지만, 더 쉬운 길을 두고 굳이 어렵게 갈 필요는 없었다. 피해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그럼 다들 쉬게 하겠습니다."

베샤이덴이 먼저 나서서 도열한 라이더들에게 달려갔다. 잠시 후, 곳곳에 천막이 쳐졌다. 그리고 여기저기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에어스트 왕국군은 실로 오랜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레늄 왕국군은 카이트의 예상대로 행동했다. 전열을 정비한 다음 그대로 밀고 들어간 것이다.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50기의 기간트는 모두가 임베르였다. 엠페리움에서 제공한 기간트를 국왕이 자신의 호위에게 지급한 것이다.

임베르 50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안 그래도 국왕의 호위 기사이니 라이더로서의 실력도 엄청났는데, 그들이 임베르를 움직이니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꽈과과과광!

굉음이 울려 퍼졌다. 가장 앞에서 돌격하던 임베르들이 미테 왕국의 기간트들을 박살 내는 소리였다.

그렇게 임베르가 안으로 파고든 자리를 레늄 왕국의 나머지 기간트들이 채워 갔다. 마치 상처를 내고 그걸 강제로 벌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미테 왕국의 기간트 부대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길을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투가 끝난 건 아니었다. 미테 왕국 측 기간트 부대도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막아! 뚫리면 끝장이다!"

만일 이 전선이 뚫리면 레늄 왕국군이 미테 왕국 내부로 들어오게 된다. 모든 영토가 유린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다들 필사적으로 막기 위해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가족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전투는 점점 치열해졌다. 하지만 승기는 레늄 왕국에 있었다. 그들의 힘이 더 컸고, 그들도 마찬가지로 필사적이었다.

여기서 막히면 그저 죽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국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사방에 부서진 기간트가 나뒹굴었다. 그리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흙먼지가 만들어 낸 안개 속으로 강철과 강철이 부딪쳐 생겨난 불꽃이 튀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진행되는 전투를 멀리서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이러다가 뚫리겠는데요?"

"걱정할 거 없다."

"뚫리면 저놈들 그냥 도망만 가지는 않을 겁니다. 막지 않으면 나중에 힘들어지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어차피 다 우리 왕국이 될 거 아닙니까?"

"괜찮아. 나도 다 생각이 있다."

카이트가 너무 여유를 부리니 베샤이덴과 슈빅은 점점 애가 탔다.

이대로 레늄 왕국군이 전선을 뚫고 지나가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당하는 건 백성들이었다. 수백 기의 기간트가 짓밟고 지나간 영토는 폐허가 되기 마련이었다. 다들 희망을 잃고 주저앉을 게 뻔한데, 그걸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베샤이덴과 슈빅은 카이트를 바라보다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카이트와 제법 오랫동안 함께해 왔다. 카이트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카이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한데 카이트의 얼굴이 너무나 평안했다. 그들이 아는 카이트는 백성의 피눈물을 그냥 두고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과를 안다면 결코 이대로 방치할 리 없었다.

"우리가 레늄 왕국을 이렇게나 빨리 무너뜨릴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카이트의 난데없는 질문에 베샤이덴과 슈빅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별로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우리 왕국의 기간트인 아모르의 힘입니다."

"그리고 우리 라이더의 실력 때문입니다."

정설이었다. 그리고 카이트도 그 말에 이견을 달 생각은 없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굉장한 승리를 연달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이렇게 빨리 레늄 왕국을 에어스트 왕국의 품에 안은 데에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카이트는 두 사람을 차분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보다."

베샤이덴과 슈빅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보가 중요하다는 건 전쟁을 겪다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실질적인 무력보다 우위에 둔다고 생각하니 뭔가가 꺼림칙했다.

그들이 힘을 중시하는 기사이자 라이더이기 때문이었다.

카이트가 손가락을 들어 전장을 가리켰다.

"자, 자세한 것은 보면서 얘기하지. 아마 조만간 신나게 싸울 일이 있을 테니 긴장을 풀지는 말고."

베샤이덴과 슈빅의 시선이 전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마침 딱 레늄 왕국군이 미테 왕국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순간이었다.

"아!"

"결국!"

베샤이덴과 슈빅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미테 왕국은 기간트 군단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 것이다.

한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꽈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레늄 왕국군의 선봉이 갑자기 세차게 나자빠졌다. 아니, 구덩이에 빠져 나뒹굴었다. 그 뒤를 이어서 오던 기간트들도 거기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이때다! 쳐라!"

미테 왕국군 사령관의 목소리가 전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그 명령에 따라 수많은 기간트들이 구덩이에 빠진 레늄 왕국군을 공격했다.

또한 다시 굳건하게 방어망을 구성했다. 돌파가 실패한 것이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결과였다. 대체 미테 왕국은 저런 준비를 언제 해 뒀단 말인가.

"이제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좀 이해했나?"

베샤이덴과 슈빅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전황이 한순간에 뒤바뀌는 광경을 보고 있으니 소름이 오싹 돋았다.

만일 저 함정에 빠진 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대번에 표정이 굳었다. 만일 자신들이 낸 의견이 받아들여서 곧장 밀고 들어갔다면 분명히 저 함정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함정을 판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힘이다. 우리가 점령한 영지에서 왜 아무런 잡음이 안 들린다고 생각하나?"

"그것도…… 정보입니까?"

카이트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너희도 슬슬 거기까지 생각할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내 호위 명목으로 따라다니면서 싸움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카이트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할 것이 참으로 많았다.

짝짝!

카이트는 손뼉을 쳐서 두 사람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생각은 싸움이 끝나고 해도 된다. 우리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베샤이덴과 슈빅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장을 바라봤다.

치열했다. 하지만 조만간 결과가 나올 듯했다. 아무리 함정을 파고 분전했지만 승패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레늄 왕국군이 벨룸 왕국군의 방어망을 돌파할 것이 분명했다.

"자, 슬슬 우리 차례다. 준비해."

카이트가 일어나며 말하자, 베샤이덴과 슈빅이 나머지 라이더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까지 쉬고 있던 라이더들이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도열했다. 그동안 받은 훈련의 성과였다. 이대로 기간트를 소환해 타고 달려도 대열이 절대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소환!"

카이트의 명령에 따라 모든 라이더가 일제히 기간트를 소환했다.

키이이이이이잉!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수백 기의 아모르가 나타났다.

"돌격!"

카이트가 명령을 내렸다. 당연히 그와 동시에 가장 앞에서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다.

"돌격!"

"돌격!"

베샤이덴과 슈빅이 카이트의 명령을 받아 또 외쳤다. 그러자 수백 기의 아모르가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쿵쿵쿵쿵쿵쿵쿵!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도 대열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전장과는 제법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워낙 달리는 속도가 빨라서 그야말로 순식간에 난입할 수 있었다.

꽈아아아앙!

카이트를 선두로 수백 기의 아모르가 전장에 난입했다. 일단 어깨로 들이받은 다음, 검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아모르의 움직임은 기계적이었다. 검격 하나하나가 일사불란하고 절도 있었으며, 발걸음 하나조차 딱딱 맞춰 동시에 움직였다.

마치 거대한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꽈과광!

꽈득! 꽈득! 꽈득!

꽈과과광!

아모르들이 전장을 마구 휘저었다. 아모르가 지나간 자리에는 부서진 기간트의 잔해만 남았다.

안 그래도 피해가 극심한 상태였는데, 그 와중에 에어스트 왕국군이 들이닥치니 레늄 왕국군과 미테 왕국군은 거의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아모르 부대가 난입한 지 고작 1시간 만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단 한 기의 기간트도 전장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또한 레늄 왕국군이 그렇게 보호하려 애쓰던 국왕을 비롯한 왕족들도 모두 사로잡혔다.

에어스트 왕국군은 기간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당한 숫자의 기병과 보병도 함께 있었다. 게다가 일반 병사의 실력이 웬만한 기사를 웃돌 정도로 대단했다.

그러니 그들이 고작 왕족 몇 명 잡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국왕 근처에 실력이 뛰어난 호위 기사가 있긴 했지만 에어스트 왕국 병사들의 합공을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카이트는 전투가 끝난 전장을 둘러보며 명령을 내렸다.

"정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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