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1/217)

Chapter 4 파죽지세 (1)

레늄 왕국의 국왕은 침통한 표정으로 마차에 앉아 창밖을 내다봤다.

"후우, 꼴이 말이 아니군."

"폐하……."

마차에 함께 탄 호위 기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국왕을 바라봤다.

국왕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라. 더 비참해질 뿐이니."

"죄, 죄송합니다. 폐하."

"훗. 죄송할 게 뭐 있느냐. 다 내가 못난 탓인 것을."

국왕은 자조적인 표정으로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마차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현재 그들은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는 중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빨랐다. 아무리 수도에 남은 기간트가 있다고 하지만,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전선으로 도망치기로 말이다.

사실 전투에 참여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국왕이 선택할 마지막 길은 망명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대체 어디로 망명을 간단 말인가. 근처 왕국이 모두 전화에 휩싸였다. 어디를 가건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마차 주위에는 수백 명의 기사가 호위하듯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들 중 50명이 기간트를 보유한 라이더였다.

또한 마법사와 엔지니어를 태운 마차도 몇 대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통신과 기간트 정비를 담당했다.

그리고 그 뒤에 왕족을 태운 마차가 줄줄이 이어졌다. 마법사나 엔지니어를 태운 마차보다 그게 훨씬 더 많았다.

"과연 이들을 데리고 내가 뭘 할 수 있겠느냐?"

국왕의 어조는 공허했다. 호위 기사는 고개를 들어 국왕을 바라봤다. 고개는 창밖으로 돌린 채였지만, 보지 않아도 눈빛이 보이는 듯했다. 텅 빈 눈빛 말이다.

잠시 감돌던 침묵을 깨뜨린 것은 마차 뒤에서 다급히 달려온 말발굽 소리였다.

"폐하! 수도에서 보내온 소식이옵니다!"

통신을 담당하는 마법사가 전해 준 보고서였다. 국왕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사실 보지 않아도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그래도 확인해야만 했다.

보고서를 펼친 국왕의 고개가 뚝 떨어졌다.

"수도가…… 벌써 함락되다니……."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지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때는 아직 적이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이었다.

한데 벌써 함락되었다니, 믿기가 어려웠다.

"폐하, 속도를 더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호위 기사의 말에 국왕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속도를 올리지 않으면 붙잡히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왕국을 갖다 바치는 꼴이 된다.

"최소한 발악은 해 봐야겠지."

국왕은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명령을 내렸다.

"속도를 높여라."

행렬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 ☆ ☆

헥서 왕국군 사령관인 슈피겔은 부관의 보고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건방진 놈들이 정말로 그따위로 말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꽈앙!

탁자가 산산조각 났다. 슈피겔의 온몸에서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마나가 마구 뿜어져 나왔다.

"고작 영지 몇 개 얻어먹은 소국 주제에 감히, 뭐? 미테 왕국을 건드리지 말라고? 감히!"

슈피겔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후욱! 후욱! 후욱!"

슈피겔은 상당한 다혈질이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기 전에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아 언제나 냉정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셨지?"

슈피겔의 눈빛이 차가워진 것을 확인한 부관이 대답했다.

"사령관 각하의 판단에 맡기셨습니다."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그렇습니다."

슈피겔은 씨익 웃었다. 전권을 자신에게 준다면 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정보가 필요했다.

"에어스트 왕국의 군대가 지금 어쩌고 있는지 아나?"

"레늄 왕국의 수도를 어제 무너뜨렸습니다."

"벌써?"

미테 왕국을 공격할 작전을 짜느라 잠깐 신경을 안 쓴 사이 벌써 수도를 점령했다니, 슈피겔은 에어스트 왕국군의 빠른 진격에 혀를 내둘렀다.

"굉장하군. 병력 상황은 어떻게 되나?"

"1천 기의 기간트를 동원했습니다."

"1천 기라……."

"참고로 에어스트 왕국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는 총 2천 기입니다."

"어마어마하군. 하지만 미테 왕국까지 정벌하려면 그리 넉넉하지는 않겠어."

슈피겔이 그렇게 말하며 부관을 쳐다보자, 부관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현재도 지속적으로 추가 병력을 투입하고 있다고 합니다."

"추가 병력?"

"레늄 왕국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그 여세를 몰아 미테 왕국까지 한꺼번에 집어삼키려는 작전으로 보입니다."

슈피겔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에어스트 왕국이 단단히 벼르고 있었나 보군."

사실 슈피겔이나 그의 부관은 에어스트 왕국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여겼다. 고작 레늄 왕국 끝자락에 있는 백작령에 불과했는데, 어느새 왕국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것도 고작 몇 년 만에 말이다.

이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슈피겔은 에어스트 왕국의 국왕이자, 붉은 학살자로 이름 높은 제론 폰 에어스트가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잘하면 그 붉은 학살자와 싸워 볼 수 있겠군."

"사령관 각하께서 이기실 겁니다."

슈피겔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비록 일대일로 싸워서 이길 자신은 없지만, 전술의 승리도 승리는 승리니까."

슈피겔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뛰어난 기간트 라이더였다. 하지만 붉은 학살자의 전설에 도전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붉은 학살자는 솔직히 헥서 왕국 내에서는 국왕만큼이나 이름이 높았다.

그런 붉은 학살자를 자신이 이길 수 있다면 슈피겔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높아지겠는가.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슈피겔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제부터는 작전을 짜야 한다. 치밀한 계획으로 붉은 학살자를 잡아내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붉은 학살자를 잡으면 전쟁은 끝이다. 그가 바로 에어스트 왕국의 국왕이니까.

그렇게 헥서 왕국도 서서히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

체스터 공국의 총사령관인 브루노 후작은 이를 갈았다. 그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안광이 폭사되었다.

그 모든 기세를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부관은 그저 죽었다 생각하고 납작 엎드렸다.

"또 패배했다고?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부관은 덜덜 떠느라 대답도 못 했다. 부르노 후작은 평소에는 순하고 사람 좋지만, 일단 한 번 돌아 버리면 지휘고하를 따지지 않고 목을 날려 버리는 걸로 유명했다.

"똑바로 보고해라. 대체 왜 그 많은 기간트가 몰려갔는데도 꼬랑지를 말고 도망갔는지!"

부관은 즉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이럴 때 뜸을 들였다가는 그냥 죽은 목숨이었다.

"적의 함정에 빠졌다고 합니다!"

"함정? 무슨 함정?"

"피해를 줄이기 위해 기습을 시도했는데, 그게 들통 나는 바람에 초반에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고작 기습 실패로 피해를 입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벨룸 놈들이 역으로 기습을 했습니다."

"역으로 기습을 해?"

부르노 후작의 표정이 묘해졌다. 대체 이게 뭔가? 우리 쪽 기습은 들키고 적 기습만 성공했다니. 아무리 머저리 지휘관이라 해도 그렇게 어이없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 생각을 말해 봐라."

"예?"

부관이 깜짝 놀라 부르노 후작을 바라봤다. 부르노 후작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우리 쪽 운이 지지리도 없어서 그렇게 되었을까? 병력 차를 생각해 봐라. 아무리 기습이라도 그렇게 큰 피해를 입었다면 생각지도 못한 허를 찔렸다는 뜻이다."

"사실 좀 이상하긴 합니다. 아군의 이동은 극비리에 이루어졌습니다. 적이 그렇게 적절한 순간 기습을 한 것이 좀 이상하긴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나?"

부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부르노 후작이 그런 부관은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배신자를 찾아라. 우리 측 정보를 흘리는 놈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부관이 급히 예를 취하고 후다닥 나갔다.

부르노 후작은 그 모습을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짜증이 났다. 아니, 초조했다.

사실 이번 전쟁은 이기는 게 당연했다. 전력 차이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얼마나 빨리 벨룸 왕국을 무너뜨리느냐가 관건인 전쟁이었다.

한데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속 상황이 꼬이기만 했다.

물론 모든 전투에서 진 것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밀어붙여 승리한 전투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결정적일 때마다 교묘하게 적의 함정에 빠져 큰 패배를 겪어야만 했다.

그로 인해 전쟁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이래서는 정말로 곤란했다.

"이거야 원. 원래 지금쯤 벨룸을 완전히 밀어 버렸어야 하는데……."

벨룸을 순식간에 밀어 버리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미테와 레늄, 그리고 헥서 왕국까지 싹 병합한 다음, 느긋하게 에어스트 왕국을 도모하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한데 지금 상황이 참으로 요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가만히 있을 줄 알았던 에어스트 왕국이 난데없이 튀어나와 전장을 휩쓸고 있었다.

벌써 레늄 왕국은 거의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수도가 함락되었고, 국왕은 피난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나저나 헥서 왕국이 에어스트 왕국을 공격한다고 했지?"

부르노 후작에게는 그런 은밀한 정보를 알려 주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체스터 공국의 배후이기도 했고, 또 체스터 공국의 수뇌부를 장악한 자들이기도 했다.

헥서 왕국은 처음 레늄 왕국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이 레늄 왕국을 밀어 버리고 미테 왕국과 싸우며 힘을 소진하는 동안 체스터 공국이 벨룸 왕국을 무너뜨렸어야만 했다.

한데 헥서 왕국이 할 일을 에어스트 왕국이 하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 빨리 정리해 버리는 바람에 미테 왕국의 힘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

"후우, 내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벨룸 이 씹어 먹을 것들을 대체 어떻게 족치지?"

이대로 정보가 계속 새나 가면 전쟁이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예상보다 피해가 커지게 된다.

나머지 왕국을 정리하려고 해도 힘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대로라면 그저 벨룸 왕국을 집어삼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부르노 후작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절대로 안 되지. 방법을 강구해야 돼. 방법을……."

생각에 잠긴 부르노 후작의 눈빛이 점점 섬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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