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혼란의 시작 (2)
"너무 순조로운데?"
"순조로우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점령지는 잘 관리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때를 대비해 엄청난 수의 관리를 쓰지도 않으면서 키우고 영입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모자랄 텐데?"
"그거야 나중 일 아닙니까. 아직도 꾸준히 관리를 양성하고 있으니 전쟁을 진행하면서 차근차근 투입하면 됩니다."
제론은 엔트의 말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쪽으로는 능력이 뛰어났다. 추진력도 제법 있었고 말이다.
"헥서 왕국 쪽도 슬슬 움직이려는 모양입니다. 기간트 부대를 미테 왕국과의 국경에 배치했습니다."
"급하긴 급했나 보군."
엔트의 보고에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바인으로부터 들은 보고였다.
에어스트 왕국의 행보는 주변 모든 왕국을 당황시켰다. 완전히 의표를 찌른 것이다.
체스터 공국은 다급히 전쟁을 시작했다. 어찌나 급했는지 선전포고까지 잊었다는 후문이 돌 정도였다.
사실 현재 에어스트 왕국이 벌인 전쟁은 헥서 왕국이 먼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한데 에어스트 왕국이 움직이는 바람에 모든 것이 틀어진 것이다.
그들도 설마 에어스트 왕국이 이렇게 전격적으로 움직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에어스트 왕국은 슈린 왕국과 전쟁을 벌려 그 영토를 흡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아직도 내정에 힘써야 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다들 에어스트 왕국이 최소한 몇 년 동안은 내치에 전력을 쏟아야 전쟁 준비라도 시작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마 뒤에서 이 모든 일을 계획한 조직인 엠페리움은 다시 계획을 짜 맞추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걸 생각한 제론은 빙긋 웃었다. 왠지 속이 조금 후련했다.
"극도로 혼란스러워지겠군. 이 기회를 잘 노리면 큰 피해 없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겠어."
제론의 중얼거림에 엔트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 보면 왠지 무서우시다니까.'
엔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엔트가 몸을 떨고 있을 때, 제론의 무심한 말이 그의 뒤통수에 떨어졌다.
"헥서 왕국에 연락을 해. 미테 왕국 건드리지 말라고."
"예?"
엔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 제론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찢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 명분도 있잖아."
"며, 명분 말입니까?"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다. 미테 왕국은 한때 벨루스 가문과 말레피 가문이 있던 왕국이다. 그들이 영지민까지 몽땅 끌고 오긴 했지만 그 관계가 칼처럼 잘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니, 칼처럼 잘라 냈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면 미테 왕국이 무릎을 꿇고라도 관계를 다시 이으려 할 것이다.
그것 말고도 얼마든지 명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문제는 명분이 아니었다.
"그, 그러다가 헥서 왕국의 칼끝이 우리 왕국으로 향할 수도 있습니다."
제론이 씨익 웃었다. 왠지 그 웃음이 섬뜩해 엔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면 더 좋지. 훨씬 쉬워지니까. 하지만 그놈들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야."
"하, 하면……."
"그냥 무시하겠지."
"하면 그들이 미테 왕국을 공격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엔트는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물었다. 왠지 확인하고 싶었다. 또 엿보고 싶었다. 제론의 생각을 말이다.
"당연히."
엔트는 이어질 제론의 말을 기다렸다. 헥서 왕국이 우리의 말을 무시한다면 그 대가를 치르게 해야만 한다. 엔트는 설마설마하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헥서 왕국이 미테 왕국을 공격하는 순간, 우리도 헥서 왕국을 친다."
엔트는 제론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헥서 왕국은 내가 직접 친다."
국왕이 직접 전쟁에 나선다고 하면 말려야 정상이다. 하지만 엔트는 오히려 걱정되기보다는 안심이 되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거기 아는 사람도 좀 있고."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 제론의 모습에 엔트는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몸이 또 떨려 왔다.
파죽지세.
에어스트 왕국의 진군은 그 한마디로 표현이 가능했다.
무려 1천 기의 아모르가 동원되었다. 출력이 무려 3.2에 달하며 초고대문명의 기술이 다수 들어간 기간트였기에 사소한 움직임부터가 달랐다.
레늄 왕국은 계속된 전쟁으로 사실 여력이 거의 남지 않았다. 각 영지의 기간트마저도 몽땅 징발해서 쓰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에어스트 왕국의 병력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사령관님, 진군이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카이트는 자신의 호위로 따라붙은 베샤이덴과 슈빅의 말에 피식 웃었다.
"아직도 느리다. 폐하께서는 더 빨리 진군하라 명하셨다."
"이보다 더 빨리 말입니까?"
베샤이덴과 슈빅은 지금도 지나치게 빠르다고 여겼다. 하루에 거의 100킬로미터 가까이 진군을 하고 있으니, 이대로 가면 며칠 안에 레늄 왕국의 수도를 함락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처음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가 가장 컸다. 물론 그 전투도 거의 일방적이었다. 아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완파된 기간트는 아예 없었고, 수리가 필요한 것들이 수십 기 있었는데, 그나마도 하루 만에 싹 고쳐 버렸다.
그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소소하게 게릴라의 습격이 몇 번 있긴 했지만 아군에 생채기도 내지 못하고 스러져 갔다.
처음 국경에서의 전투 이후, 1천 기의 기간트는 각각 100기씩 나눠서 한 군데씩 열 군데를 따로 점령했다. 그렇기에 점령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카이트도 100기의 기간트만 이끌고 진군했다. 한 번에 영지 하나씩 점령하면 되기에 사실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변변한 병력이 남은 영지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기간트라도 몇 기 있으면 다행이었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군. 이번에도 간단히 끝내 버리자고."
"맡겨 주십시오."
베샤이덴과 슈빅은 든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을 보는 카이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 ☆ ☆
"이게 무슨 짓이오!"
텔레포트 게이트를 담당하는 크란 제국 마탑의 마법사인 슈렉케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선 기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명입니다. 앞으로 이 영지의 텔레포트 게이트는 더 이상 운영할 수 없습니다."
"하면 게이트에 들어간 막대한 재료는 대체 어쩔 셈이오! 우리 마탑이 무슨 자선사업이라도 하는 줄 아는 거요!"
기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마법사를 슈렉케를 바라봤다.
"재료비는 애초에 마탑 설치비에 포함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 그건……!"
슈렉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기사의 말 대로였다. 재료비는 애초에 설치비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안 되오! 우리가 그냥 물러나면 텔레포트 게이트를 뜯어서 연구할 수도 있지 않소! 우리의 마법을 그런 식으로 공개할 수는 없소!"
"하면 게이트를 해체하십시오."
"해, 해체?"
"단, 재료는 모두 그대로 두셔야 합니다. 그것은 엄연히 우리 왕국의 재산입니다."
슈렉케는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아니, 솔직한 마음으로는 해체하기 싫었다. 게이트를 해체하면 다시 마탑까지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
보아하니 다른 영지의 게이트도 몽땅 이런 식으로 철수시키는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이보게. 잘 생각하게. 아니, 폐하께 잘 말씀드려 보게. 텔레포트 게이트가 없으면 앞으로 어쩔 셈인가! 왕국이 뒤로 후퇴할 수도 있네!"
슈렉케의 말에도 기사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건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슈렉케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러니 페하께 잘 말씀드려 달라는 거 아닌가!"
"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즉시 떠날 준비를 해 주십시오."
슈렉케는 경직된 기사의 태도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는 전적으로 영주의 권한이었다.
'젠장, 대체 이걸로 얼마나 돈을 벌 수 있는지 모른단 말이냐! 에어스트 왕국의 국왕은 바보 멍청이야!'
슈렉케는 암담한 눈으로 텔레포트 게이트를 돌아봤다. 대체 이걸 언제 다 해체한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앞으로는 어쩐단 말인가.
'이대로 마탑으로 돌아가 봐야…….'
크란 제국 마탑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마법사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수의 마법사가 파견 나간 상태였다. 파견 임무의 대부분이 텔레포트 게이트의 관리였다.
이대로 돌아가면 그야말로 찬밥 신세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사의 표정과 태도를 보아하니 절대 번복되지 않을 것이다.
슈렉케는 일단 굳은 표정으로 게이트의 마법진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핵심이 되는 부분만 해체하면 된다. 나머지까지 다 해체하는 건 노동력 낭비였다.
해체를 마친 슈렉케는 서둘러 게이트의 물건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탑의 지원병을 이끌고 서둘러 영지를 떠났다.
어쩌면 아직 해체가 끝나지 않은 게이트가 있을지 몰랐다. 늦기 전에 도착하면 텔레포트를 이용해 에어스트 왕국을 떠날 수도 있었다.
걸어서 왕국을 벗어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 ☆ ☆
깁스 남작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표정은 끝까지 감췄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네의 능력이야 우리도 잘 알고 있지만 요즘은 성과가 너무 미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깁스 남작은 할 말이 없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추진하는 일이 연달아 실패하고 있으니 말이다.
"에어스트 왕국, 정말 거슬리는군. 처리할 방도가 있나?"
"당장은 어렵습니다."
"당장은 어렵다라……."
거대한 원탁에 빙 둘러 앉은 사내들이 눈을 빛냈다. 마법진이 새겨진 복면을 쓰고 있어 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근방의 다른 왕국을 충동질해 에어스트 왕국을 일제히 공격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상당한 무리수를 던져야 합니다."
"흐음."
원탁의 사내들이 심각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다. 엠페리움은 아직까지 굳건했다. 굳이 무리수를 던지면서까지 일을 진행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어 쌓이면 조직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굳건하지만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레벨리오는 요즘 어쩌고 있나?"
사내 중 하나가 분위기를 전환하는 의미로 질문을 던졌다.
"본거지가 무너진 이후로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하지만 그들의 습격을 받은 시설의 에너지원이 사라지는 점은 충분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깁스 남작은 잠시 뜸을 들이며 분위기를 살폈다. 그러다가 사내들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자, 말을 이었다.
"에너지 감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분위기가 더욱 심각해졌다.
"그걸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과 돈이 들어가는지 모르는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앞으로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깁스 남작의 말에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들도 그 점을 알고 있기에 강력하게 반대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안건은 기각하겠네."
"하지만……!"
깁스 남작이 발끈했지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복면을 쓴 사내가 손을 들어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게. 무슨 말을 해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워낙 단호했는지라 깁스 남작도 그냥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깁스 남작은 바보가 아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돈이나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뭔가 다른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걸 굳이 캐내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그게 신상에 이로웠다.
"체스터 공국 쪽에 집중하게. 그 일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돼."
"알겠습니다."
깁스 남작은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