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엠페리움 (2)
"잘한 건지 모르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슈틀러와 브릭을 구해 주고 드로센 자작을 넘겨준 것은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간신히 만든 레벨리오와의 끈을 그렇게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 상황에서 테오스를 등장시킨 일은 과연 잘한 일인지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 괜한 걱정이긴 했다. 테오스를 본 사람은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이 전부였다. 그들은 아무래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니 테오스의 존재에 대해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까지 싹 지울 수는 없었다. 어쨌든 테오스를 등장시켰고,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었으니까.
"뭐, 적당히 힘을 조절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려나?"
테오스의 힘은 그보다 훨씬 대단했다. 솔직히 말하면 테오스가 아니라 이스히스나 타히티만 꺼내 놨어도 그들을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제론이 마음 단단히 먹고 움직였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겠는가.
하지만 제론은 뒤에서 지켜보는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을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힘을 상당 부분 줄였다.
지금이야 어떨지 몰라도 나중에는 적으로 돌아설지도 모를 관계 아닌가.
어쨌든 레벨리오에 대한 일은 그쯤에서 마무리하는 걸로 결정했다. 앞으로는 가끔 만나서 아티팩트만 전해 주면 된다.
"그럼 저기 보이는 저 도시만 접수하고 슬슬 에어스트로 돌아가야겠군."
제론은 멀리 보이는 도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접수한 도시에 비해 상당히 규모가 큰 곳이었다. 수도와 비교하면 절반에도 크게 못 미치지만 그래도 처음 접수한 국경 도시에 비하면 몇 배나 큰 곳이었다.
일단 저 도시의 유적을 접수한 다음, 에어스트 왕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아직 전쟁이 터진 건 아니었지만 그에 준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이번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이번 기회에 예전 레늄 왕국의 영토를 몽땅 집어삼킬 수도 있었다.
더불어 레늄 왕국과 항상 영토 분쟁을 해 온 벨룸 왕국이나, 그들과 전쟁을 시작하려 하는 체스터 공국까지 아우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무려 3개 왕국이 병합되는 셈이었다. 아마 가신들이 칭제를 하라고 난리 칠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렇게 크게 모두를 아우르고, 그걸 안정시킬 수 있다면 주변이 훨씬 안전해질 거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때부터는 초고대 문명의 기술과 지식을 조금씩 전파할 생각이었다. 물론 급격해선 안 된다. 아주 조금씩 맛만 보여 주는 식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그래야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차근차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또한 그렇게 천천히 발전해야 통제와 조절이 가능하다. 그게 불가능해서 제론의 손을 떠나 버리면 그건 위협이 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물론 그따위 위협쯤이야 제론에게 있어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론에게는 그 정도 힘이 있었다.
하다못해 제론이 테페룸 광산과 연결된 유적만 싹 장악해도 전 대륙의 테페룸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제론은 대륙을 뒤흔드는 게 가능했다.
그러니 제론이 고작 어설픈 위협에 겁을 먹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은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이야 그 어떤 상황이 오건 겁날 게 없지만, 주변을 보호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힘을 키워야만 했다. 그리고 그 힘을 주변에 조금씩 흘려야만 했다.
바이스에게 초고대의 마법을 일부 가르치고, 세나에게 초고대의 기술을 가르친 이유도 다 그런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부디 저 도시에는 좀 더 쓸 만한 게 있었으면 좋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빠르게 도시로 다가갔다. 유적에 별다른 특징이 없으면 최소한 도시에서 뽑을 수 있는 정보를 통해 더 큰 걸 얻을 수 있어도 좋았다.
그렇게 나름대로 기대를 안고 도시에 도착한 제론은 경비의 눈을 피해 성벽을 훌쩍 타고 넘어갔다.
이젠 경험이 쌓이고, 실력도 늘어서 이렇게 훤한 대낮에도 도시에 몰래 숨어 들어가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제론의 감각은 크란 제국에 오기 전보다 최소 두 배는 성장했고, 마법 실력도 엄청나게 늘었다. 특히 마나를 정교하게 컨트롤하는 능력은 이미 9개의 마나링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에 이르렀다.
달리면서 주변 마나를 장악해 성벽에 깔린 마법진을 강제로 열고, 그러면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정도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성벽을 넘어간 제론은 일단 도시 중심부를 향해 달렸다. 유적이 어디 있는지만 확인하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거의 기계적으로 해치울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이제 슬슬 엠페리움에서도 대응책을 마련할 때가 되었다. 어떤 대응책이건 제론에게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레벨리오의 습격에 대한 대비책만 세웠을 테니까.
일단 이 정도 규모의 도시에는 분수대가 있을 리 없었다. 도시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안에 있는 유적의 규모도 크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모습을 감춘 채로 빠르게 도시 중심부로 향했다. 그렇게 한창 달리던 제론은 앞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에 달리는 걸 멈추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소드 마스터?'
이 느낌은 일전에 만났던 소드 마스터와 상당히 흡사했다. 같은 방식으로 소드 마스터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즉, 마나호흡법이나 검술이 똑같다는 의미였다.
'저들에게 훌륭한 마나호흡법과 검술이 있다는 뜻이로군.'
아무리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고 기척을 지웠다곤 하지만 소드 마스터에겐 무용지물이었다. 소드 마스터는 마나 그 자체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소드 마스터의 감각을 속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론은 골목을 달리다가 벽을 밟고 위로 솟아올랐다.
탁탁탁!
제론의 몸이 순식간에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차라리 위에서 다니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옥상으로 이동하니 사야가 확 열렸다. 골목을 돌아다니는 병사와 기사들이 한눈에 보였다.
제론은 일단 거대한 기운을 가진 사람, 소드 마스터부터 찾았다.
'저기 있군.'
과연 소드 마스터였다. 다른 병사나 기사는 전혀 없이 혼자서 움직이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순찰을 도는 게 아니라 어딘가로 단순히 이동하는 듯했다.
'하긴, 소드 마스터가 순찰을 돈다는 게 웃기는 일이긴 하지.'
제론은 소드 마스터를 유심히 살폈다. 현재 이 도시에서 유적을 찾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저 소드 마스터였다.
소드 마스터는 유흥가가 밀집한 거리로 가더니 그중 가장 화려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일단 당분간은 걱정할 거 없겠군."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지만 술집에서 여자와 난잡하게 논다면 감각이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라도 같은 소드 마스터가 아니다. 소드 마스터가 만나는 벽을 몇 차례 허문 상태였다. 그 경지는 보통 소드 마스터와는 하늘과 땅 차이었다.
익스퍼트가 아무리 높은 경지에 이르러도 소드 마스터와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처럼 말이다.
제론은 빠르게 도시 중심부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그야말로 거대한 탑이 하나 서 있었다.
높이는 그리 높지 않은데, 넓이가 어마어마했다. 또한 탑 전체에 특이한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는데, 때때로 은빛 물결이 치듯 번득였다.
제론은 단번에 은빛 문양이 특별한 종류의 마법진임을 알아차렸다. 문양 가득히 느껴지는 마나가 그것을 증명했다.
'전부 방어에 관계된 마법이로군.'
탑 표면에 새겨진 마법은 방어나 탐색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마법이 워낙 방대하고 치밀해서 몰래 숨어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마법진이 내부 정보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내부 사정을 알아보려면 마나의 흐름을 감각으로 잡아내야 하는데, 그 자체가 원천봉쇄되어 있었다.
정령도 막아 놨을 것이 분명했지만 혹시나 해서 제론은 일단 스키아를 보냈다.
스키아는 탑의 벽을 아예 뚫지 못하고 맴돌기만 했다. 문이 열린 틈을 타고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엠페리움이라……."
참으로 의미심장한 이름이었다. 그들의 목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 이름을 알아냄과 동시에 크란 제국 수도에 있던 레벨리오 본부가 날아갔다고 하니, 이들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멀리서 마법을 통해 감시한 덕분에 이름이라도 알게 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저 본거지 하나만 날리고 말았을 것이다.
어쨌든 적의 실체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막연히 존재할 거라는 확신만 가졌다. 하지만 이젠 이름까지 얻었다.
엠페리움은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조직이었다. 바인이 그들의 정보를 얻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고 있지만 아직까지 딱히 특별한 소득을 얻지는 못했다.
대신 엠페리움에 대항하는 레벨리오의 정보는 꾸준히 얻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레벨리오는 엠페리움에 비해 보안이 약했다. 그렇다고 해서 곳곳에 정보가 흘러 다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엠페리움의 정보 차단 능력이 레벨리오에 비해 훨씬 대단했다. 그들이 가진 기술이나 힘은 현재 존재하는 그 어떤 조직이나 왕국보다 뛰어났다.
반면 레벨리오는 엠페리움에 비해서는 많이 뒤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레벨리오 역시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대단한 엠페리움을 상대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능력을 입증한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엠페리움이 아직까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당장 엠페리움이 작정하고 나서니 본거지가 박살 나지 않았던가. 그 일 하나만으로 두 조직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일단 여기까지 한 다음 레벨리오 지원 방안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군."
제론은 레벨리오가 좀 더 제대로 엠페리움을 상대하도록 만들 계획이었다. 그래야 큰 그림이 그려진다.
레벨리오는 아직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지원하느냐에 따라 엠페리움을 견제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일단은 저 유적부터 처리하자."
제론은 눈앞의 탑에 집중했다. 안으로 들어갈 틈이 없으니 강제로 틈을 만들어야만 했다. 또한 저 탑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도록 박살을 내면 더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 벌인 일이 레벨리오의 소행처럼 포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제론은 당분간 정체를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제론이 정체를 드러내는 건 이번 전쟁을 완벽하게 마무리한 다음의 일이었다.
그때부터는 제대로 크란 제국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엠페리움을 무너뜨릴 공작을 펼치고 말이다.
제론은 자신만만했다.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확신에 가득 찬 제론의 시선이 마법진으로 도배된 탑을 샅샅이 훑었다.
꽈과과과과광!
엄청난 폭발이 탑 곳곳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탑의 내부는 물론이고 주변도 난리가 났다. 워낙 방어가 철저해서 탑이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당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탑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결사대 놈들이 나타났다!"
"모습을 감췄어! 찾아내!"
레벨리오의 습격은 항상 모습을 감추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에 그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엠페리움의 병사와 기사들은 일단 모습을 감춘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을 찾아내려 애썼다.
방법은 많았다.
엠페리움의 병사들이 새하얀 가루를 들고 다니면서 사방에 뿌렸다. 그 가루는 사람의 몸에 닿으면 희미한 빛을 내는데, 아무리 모습을 마법으로 감췄다 하더라도 그렇게 빛이 나면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만일 평소대로 레벨리오의 습격이었다면 분명히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레벨리오는 제대로 습격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당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레벨리오의 습격이 아니라 제론의 습격이었다. 당연히 그런 방법은 아예 효과가 없었다.
제론은 벌써 탑 꼭대기에 서서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탑의 옥상은 평평했다. 그리고 다른 벽과 마찬가지로 마법진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제론은 탑의 벽에 촘촘히 붙여서 동시에 터트린 마나폭탄의 힘을 이용해 시간을 벌었다. 이렇게 탑 꼭대기에서 마법진을 분석할 시간을 말이다.
솔직히 시간이 많지 않았다. 탑 내부에도 분명히 소드 마스터가 하나 있을 것이다. 또한 조만간 술집에서 질펀하게 즐기던 소드 마스터도 달려올 것이다.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하지 못할 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세함으로 인해 탑을 부수는 일에는 큰 차질이 빚어지게 된다.
소드 마스터 특유의 감각을 이용해 제론의 위치를 특정하면 다른 병사나 기사들도 얼마든지 제론을 공격할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병사나 기사의 실력이야 제론이 신경 쓸 정도로 대단치 않지만, 그들이 가진 아티팩트는 조심하는 게 좋았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기능의 아티팩트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테오스를 꺼내면 모를까, 지금 상태로 혼자서 그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