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Chapter 1 1 VS 50 (1)
드로센 자작은 부관들의 보고를 받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쉽게 처리될 거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설마 이 정도로 완벽하게 당할 줄은 몰랐다.
"다 도망갔다고? 한 놈도 못 잡았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놈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도시에서 벗어나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럼 가서 잡으면 되겠군."
"켈룸 50기를 보냈습니다."
드로센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견 과한 감이 있긴 했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려면 그 정도는 보내는 게 좋았다.
현재 적이 보유한 기간트가 없다는 정보를 얻긴 했지만 그 정보라는 것이 아주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대충 추격대를 보냈다가 혹시 그놈들에게 기간트가 몇 기만 있어도 아주 골치 아파진다.
"그럼 이제 짓이겨진 놈들의 시체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드로센 자작은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조금 마음이 풀렸다. 도시에서 도망가기 전에 처리하지 못한 것이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놓친 게 아니니 상관없었다.
어떻게 되든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 일 아닌가.
"하여튼 최근에 너무 나대긴 했지. 그놈들에게 무너진 공장이 벌써 몇 개야?"
최근 조직에 피해가 제법 많았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결사대 소탕에 나섰다.
사실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분수대나 부수고 다니는 게 전부였다. 분수대는 다시 만들면 그만이고, 그나마 그 일도 제대로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워낙 비밀스러운 조직이라서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정보를 모으는 노력 자체가 낭비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항상 신경은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데 이번에 결사대의 항전이 상당히 격렬해졌다. 또한 굉장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조직의 사기에도 큰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또한 조직의 피해도 엄청났다. 재정적인 피해는 물론이고 인명 손실도 급격히 늘어났다.
결국 조직은 본격적으로 그들의 소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훨씬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또 그 정보를 토대로 치밀한 작전을 세웠다. 아무리 작은 적의 동태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고, 또 기회를 봐서 결사대 안에 첩자를 심었다.
물론 첩자를 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정보를 확보하다 보면 포섭이 가능한 자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식으로 충분한 정보를 모았다. 그걸 토대로 오늘의 일을 계획한 것이다.
"가 보시겠습니까?"
부관의 말에 드로센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물었다.
"굳이 갈 필요가 있나? 어차피 지금쯤이면 다 끝났을 터인데."
"그래도 그동안 골치 썩이던 놈들의 최후는 지켜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관의 말에 드로센 자작이 눈을 빛냈다.
"뭔가 조치를 취해 놓은 모양이군."
부관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자작님께서 도착하기 전에는 죽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드로센 자작이 빙긋 웃었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마차를 준비해라."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부관이 정중히 드로센 자작을 모셨다.
드로센 자작은 살짝 거만한 표정과 태도로 부관을 따라가 마차에 올랐다.
여덟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거침없이 도시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 ☆ ☆
꽈아아아아아앙!
테오스가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켈룸의 가슴을 어깨로 받아 버렸다.
갑자기 앞에서 자세를 낮추며 어깨를 들이밀었기 때문에 켈룸은 손쓸 틈도 없이 가슴을 허용하고 말았다.
꽈과과광!
양측이 달려오던 속도가 워낙 엄청났는지라 어깨에 받힌 충격도 어마어마했다.
켈룸은 뒤이어 따라오던 동료들과 뒤엉켜 나뒹굴었다.
테오스는 어깨로 켈룸을 들이박자마자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빠르게 다가오는 다른 켈룸의 손목을 낚아챘다.
켈룸 2기가 각각 테오스의 손에 잡혀 빙글 휘돌았다.
꽈과광!
테오스가 근처에서 달리던 다른 기간트를 향해 켈룸을 휘둘렀다. 서로 부딪쳐 기간트들이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한 바퀴 돌린 다음 여전히 달리는 걸 멈추지 않은 켈룸들을 향해 그것을 던져 버렸다.
후우웅!
꽈과과과광!
그걸로 달리던 모든 켈룸을 멈출 수 있었다. 그들이 지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테오스는 혼자였다. 50기의 켈룸과 싸우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그들이 싸우지 않고 레벨리오의 조직원을 학살하면 곤란했다.
그리고 지금 그걸 막았다.
테오스는 모든 켈룸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켈룸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새 테오스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철컹!
너무나 깔끔하게 켈룸 한 기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 일격에 두 동강이 난 것이다.
테오스는 그걸로 멈추지 않았다. 근처에서 당황한 채 서 있던 다른 켈룸들을 향해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쩡! 쩡! 쩡! 쩡!
대부분 테오스의 검을 못 막았다. 워낙 빨랐고, 빈틈을 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기는 막았는데,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테오스의 힘이 워낙 강해서 형편없이 밀려났다.
그리고 그렇게 균형을 잃고 밀려난 기간트를 제론이 가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테오스가 그 빈틈을 꿰뚫고 검을 찔러 넣었다.
콰직! 콰직!
순식간에 10여 기의 켈룸이 잘라지고 부서져 바닥에 누웠다.
하지만 아직도 40기에 가까운 켈룸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테오스와의 싸움에 대비했다.
다들 검을 뽑았고, 테오스와 거리를 벌리려 애쓰며 견제를 시작했다.
상당한 훈련을 거친 자들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전열을 가다듬는다 싶더니 어느새 테오스를 빙 둘러 포위해 버렸다.
하지만 테오스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래로 늘어뜨린 검이 흔들거렸다.
적이 레벨리오의 조직원을 노리고 달려가지 않는 한, 테오스가 당황할 일은 없었다. 테오스는 아래에서 흔들던 검을 마치 채찍처럼 휘둘렀다.
쩌정!
가까이에 있던 켈룸 한 기의 목에 쩌적 금이 갔다.
그 광경에 다들 경악했다. 분명히 거리가 모자랐다. 그런데도 당한 것이다.
모두가 놀라는 사이 테오스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콰우우우!
테오스의 검 주위로 거센 돌개바람이 일어났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뻗어 가는 검의 궤적에 켈룸 3기가 걸려들었다.
문제는 거리였다. 테오스의 검이 그들을 베려면 적어도 3미터는 더 길어야만 했다.
콰득! 콰득!
다들 눈을 의심했다. 테오스의 검이 마치 순간적으로 채찍으로 변한 듯했다. 길게 늘어나 낭창낭창 휘어지더니 2기의 켈룸을 동시에 베어 냈다.
쿠궁!
가슴이 비스듬하게 잘린 켈룸의 상체가 땅에 떨어지며 묵직한 소리를 울렸다.
그 소리는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가슴도 무겁게 만들었다.
다들 굳어 버렸다. 그 상태에서 여유를 가지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테오스뿐이었다.
콰우우우!
콰득! 콰득! 콰득!
테오스는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검을 휘둘렀다. 검의 궤적에 정확히 걸려든 켈룸은 말할 것도 없고, 검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켈룸도 연이어 잘려 나갔다.
사방에 잘린 켈룸의 잔해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 어떤 켈룸도 테오스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했다. 한꺼번에 10여 대가 동시에 달려들기도 해 봤지만 테오스는 그들의 빈틈을 유유히 뚫고 나가 거침없이 검을 휘둘러 그들의 몸통을 잘라 냈다.
싸움을 지켜보던 브릭이 슈틀러에게 물었다.
"저게…… 저게 가능한 겁니까?"
슈틀러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치…… 소드 마스터가 직접 움직이는 것 같군."
하지만 그 어떤 소드 마스터라도 기간트를 타고 저런 식으로 움직이지는 못한다.
슈틀러가 말하는 소드 마스터는 당연히 현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레벨리오에도 특별한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
예전에 우연히 그가 싸우는 모습을 봤는데, 그것이 눈앞에서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슬슬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브릭의 물음에 슈틀러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다. 괜히 움직여서 저들의 이목을 끌 필요가 없다."
현재 켈룸들은 모두 테오스에게 홀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하지만 괜히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이 움직여 그들의 관심을 끌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우회해 달려올지 모른다.
켈룸 2기만 따로 빠져도 이곳에 있는 200명의 조직원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적에게는 아직 그 정도 여력이 있었다.
"음? 도시 쪽에서 뭔가가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브릭의 말에 슈틀러가 시선을 돌렸다.
과연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여덟 마리의 말이 끄는 화려한 마차였다. 또한 마차를 호위하듯 열두 마리의 말이 각각 기사를 태운 채 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나오는 것 같군."
슈틀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 박살을 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
"다들 전투 준비를 해라."
보아하니 마차 주위를 호위하는 기사들은 전부 라이더였다. 기간트도 보유한 듯했다. 마차 안에도 호위가 있을 것이고, 그 역시 라이더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테오스와 싸우는 켈룸의 수는 급격히 줄어 이제는 고작 10여 기만 남아 있었다.
저 10여 기가 모두 박살 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렇게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이 나름대로 전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드로센 자작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 저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마차 앞에 난 구멍을 통해 전면이 훤히 보였는데, 그의 눈에 비친 광경은 힘없이 쓰러지는 켈룸의 모습과 무수히 쌓인 켈룸의 잔해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고고히 서 있는 새까만 기간트가 눈에 확 들어왔다.
"다들 뭘 하고 있느냐! 가서 저놈을 당장 막지 않고!"
드로센 자작은 최악의 선택을 했다. 사실 이 다급한 상황에서 주위가 보일 리 없었다. 만일 그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 준비를 하고 있는 레벨리오의 조직원들을 발견했다면 그런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드로센 자작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다급히 기간트를 소환했다.
재력이 풍부한 유력 귀족의 호위 기사답게 모두 발굴형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12기의 아우틈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 거의 동시에 아우틈에 탑승했고, 아우틈이 가동하면서 곧장 전장에 뛰어들었다.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순식간에 싸움에 개입할 수 있었다.
테오스는 남은 10여 기의 켈룸을 차근차근 잘라 나갔다. 그러다가 12기의 아우틈이 달려오는 걸 보며 그들의 실력을 가늠해 봤다.
기간트 라이더의 실력을 파악하는 건 사람의 실력을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제론처럼 경험이 많고 감각이 예민하며 실력까지 뛰어난 라이더에게는 그랬다.
적어도 조금 전에 싸운 켈룸보다는 뛰어났다. 하지만 제론의 기준에서 보면 그게 그거였다.
어차피 개미가 아무리 커진다고 해서 고양이로 변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테오스가 근처에 있던 켈룸들을 내버려 두고 득달같이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