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7/217)

Chapter 9 레벨리오 (2)

결사대라는 말에 사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 하수도에서 만났을 때도 저 말 때문에 도망치려고 했었다. 한데 여기서 또 그 말을 들으니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런 건 없습니다."

사내의 표정은 완강했다. 어떤 협박이나 회유에도 응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당연했다. 사내의 조직을 결사대라고 부르는 자들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내의 조직이 존재한다.

"날 못 믿는 건가?"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일방적이었다. 얘기를 들어 볼 생각도 않고 저렇게 불신 가득한 건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좋아. 그럼 믿게 해 줘야지. 일단 하나씩 차근차근 하자고."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구슬 하나를 꺼냈다. 제론이 만든 마나폭탄이었다.

"이거 보여?"

사내는 제론이 들고 있는 마나폭탄을 보고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마, 마나폭탄?"

"잘 아는군."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사내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아마 사내라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 것이다. 관심이 있어서 오늘 광장에 갔을 테니까.

역시 제론의 예상대로 사내의 눈이 이내 커다래졌다.

"서, 설마!"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설마가 정답이야."

사내가 경악했다.

"설마 당신이 분수대를 부쉈단 말이오? 대체 어떻게?"

사내는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혼자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분명히 마나폭탄이었고, 또 분수대가 부서져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혹시 비밀 조직에서 벌이는 공작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은 깊고 거대하다. 분수대 한두 개 희생시키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희와 같은 방법으로."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신들에 대해 대체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또한 뭘 원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건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언제 혼자 했다고 한 적 있었나?"

"그럼……!"

제론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혼자 했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누군가와 함께 했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굳이 진실을 꼬치꼬치 밝혀 줄 필요는 없었다. 상대가 알아서 생각하게 만들면 된다. 그 편이 훨씬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일단 내가 먼저 제안을 하지."

제론의 말에 사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바라봤다. 긴장감이 한가득 느껴졌다.

"이 마나폭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마나폭탄을 휙 던졌다. 사내는 기겁을 하며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나폭탄을 살폈다.

마나폭탄은 상당히 불안정했다. 그래서 자칫 원치 않는 상황에서 폭발할 위험이 있었다.

"그건 터질 염려 없으니 걱정할 거 없다."

제론의 말에 사내가 깜짝 놀라 마나폭탄과 제론을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럼 이 마나폭탄은 뭔가가 다르기라도 하다는 뜻 아닌가.

"그 마나폭탄이 너희 것과 같아 보이나?"

"그럼 다릅니까?"

사내가 다시 한 번 유심히 마나폭탄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겉모양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양은 완벽하게 같았다.

사내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다른 점을 모르겠군요."

제론은 품에서 다른 마나폭탄을 우르르 쏟아 냈다. 수백 개나 되는 마나폭탄이 나타나자 사내가 기겁을 했다.

"이, 이게 다 뭡니까?"

제론은 그중 하나를 집어서 위로 던졌다 받으며 사내를 슬쩍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만일 여기서 마나폭탄이 터지면 이 수백 개의 폭탄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이 일대가 싹 날아가 버릴 것이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마나폭탄을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멀리 던졌다.

쌔애애액!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마나폭탄은 순식간에 수백 미터나 날아갔다. 그리고 폭발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수백 미터나 떨어져 있음에도 폭발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 열기가 확 밀려왔다.

사내는 휘몰아치는 불꽃의 폭풍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삐걱거리는 목을 억지로 움직여 제론을 바라봤다.

"대, 대체 이게 뭡니까?"

"뭐긴, 마나폭탄이지. 제법 괜찮지?"

제법 괜찮냐니, 이건 고작 그 정도로 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만일 이 마나폭탄이 있다면 훨씬 더 편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또한 굳이 분수대만 작살내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파악한 좀 더 큰 장소를 공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사내의 표정은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이 마나폭탄이 정말로 탐나지만, 자신은 이걸 구입할 여력이 없었다. 또한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조직의 돈줄은 이제 말라비틀어진 지 오래였다.

그걸 미리 파악하고 이 마나폭탄을 내민 거라면 다른 조건을 걸 것이다. 하지만 그 조건이 결코 가벼울 리 없었다. 이래저래 사내에게는 그걸 마음대로 결정하기에는 권한이 많이 모자랐다.

게다가 고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적 조직의 감시가 훨씬 치밀해졌다. 연이어 피해를 입으니 독이 오를 대로 오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나폭탄의 위력만 믿고 작전을 펼치다간 다들 골로 가는 수가 있었다.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 없어. 그 마나폭탄은 공짜로 주는 거니까."

"예? 그, 그게 정말입니까? 하지만……."

사내는 거기에 무슨 조건이 달릴지 두려워 제론을 바라봤다. 하지만 제론은 아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그리고 조건 따위는 아무것도 없어. 그저 더 열심히 활동을 하라는 것 외에는 말이야."

"정말로 그것뿐입니까? 하지만……."

제론이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내 목표는 그 얼토당토않은 조직을 무너뜨리는 거야. 거기에 일조를 하고 있는 조직이니 당연히 도와야 하지 않겠어?"

제론의 말에 사내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러니 마나폭탄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만 하라고.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그 말이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외로운 투쟁을 해 왔던가. 누구의 호응도 얻지 못하고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저 피로 얼룩진 희생을 토대로 계속해서 싸우고 또 싸워 왔다. 하지만 이젠 슬슬 그것도 한계에 이른 상태였다.

그 와중에 이런 도움을 받으니 정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다."

너무나 정중한 사내의 인사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또 준비한 것을 꺼냈다.

"이것도 받도록."

"이게 뭡니까?"

제론이 사내에게 준 것은 얇은 종이였다. 수백 장이나 되어서 제법 무게가 나갔는데, 모든 종이에는 정교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사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론의 말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스크롤이라는 거야. 둘둘 말아서 가지고 다니다가 찢으면 거기 새겨진 마법이 발동하는 거지. 참고로 거기 그려진 마법진은 아무리 분석해 봐야 소용없으니 괜한 수고 하지 마."

"스, 스크롤 말입니까?"

사내도 스크롤이라는 말을 어렴풋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건 고대유적을 발굴할 때 간혹 나오는 귀중한 물건이었다.

일종의 아티팩트인데, 마법진을 종이에 그려 일회용으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재료의 특성상, 제대로 보존된 것이 없어서 웬만한 아티팩트보다 훨씬 귀하고 비쌌다.

한데 그런 스크롤을 이렇게 잔뜩 주다니. 마치 누군가 대량으로 그려 낸 것 같지 않은가.

'가만, 그러고 보니…….'

종이의 상태가 너무 깨끗했다. 정말로 방금 그린 듯한 스크롤이었다. 또한 유적에서 출토되는 스크롤과 달리 돌돌 말려 있지 않고 그냥 펼쳐져 있는 것도 이상했다.

"설마 이걸 다 만드신 겁니까?"

사내가 경악 어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론은 대답대신 씨익 웃었다.

"그건 모습을 감춰 주는 스크롤이야. 기척은 감춰지지 않고 모습만 사라지니까 그 점은 감안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건 아주 중요한 점이었다. 만일 적진에 소드 마스터가 있다면 통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또한 이 스크롤에 새겨진 마법은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가지는 감각의 한계를 이용해 몸을 감추는 것뿐이었다.

당연히 감각이 예민하거나 특별한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제론은 그 점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사내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론의 말을 듣기만 했다.

"대체…… 대체 왜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 것입니까?"

제론이 씨익 웃었다.

"말했잖아. 적의 적은 친구라고. 너희가 싸우는 조직은 내 적이기도 해. 아직 이름도 모르지만."

사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수없이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은 결심을 굳혔다. 사내의 얼굴이 갑자기 편안해졌다. 그리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적 조직의 이름은 아직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조직 수뇌부는 알 겁니다. 우리 조직에 대한 것도 솔직히 전 잘 몰라서 제대로 말씀을 해 드릴 수가 없군요."

사내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레벨리오."

제론이 사내를 똑바로 쳐다봤다.

사내는 제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레벨리오."

사내는 마치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그렇게 말하고는 제론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게 그쪽 조직의 이름인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결사대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결사대라고 부르는 자들은 그놈들이 유일합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제야 왜 사내가 처음에 자신을 그렇게 못 믿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적이 그들을 결사대라고 부르기에 정말로 이름이 그런 줄 알았다.

한데 그건 적의 호칭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내가 반감을 가질 만도 했다. 아마 제론을 비밀 조직의 일원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전 브릭이라고 합니다."

사내는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자신이 지금 가진 모든 감정을 담은 진심 어린 인사였다.

제론은 그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떠나 버렸다.

브릭이 고개를 들었을 때, 제론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브릭은 다시 한 번 제론이 있던 자리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서둘러 주위를 정리했다.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이 중요한 물건들을 조직에 전달해야만 했다.

아마 앞으로는 정말 볼 만할 것이다.

브릭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제론은 브릭에게 준비한 물품을 모두 넘긴 다음 곧장 다음 도시로 떠났다. 제론이 활발하게 움직여 주는 편이 레벨리오의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상승 작용을 일으키다 보면 비밀 조직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젠 그 조직에 대해서도 좀 알아내야 하는데…….'

그렇게 부딪치는데도 아직 알아낸 것이 거의 없었다. 그들의 목표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심지어는 그들의 명칭조차 모르니 말 다 한 것 아닌가.

비밀 조직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제론의 사고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대항하는 조직 레벨리오에게로 이어졌다.

레벨리오의 목적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어쨌든 제론의 적과 싸우고 있었다. 나중에야 관계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은 제론에게 힘이 될 것이다.

'차츰차츰 레벨리오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야겠어.'

물론 조사는 제론이 아니라 바인이 할 것이다. 제론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철저하게 말이다.

제론의 머릿속에는 레벨리오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올랐다. 과연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또 어떤 식으로 이용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일단 다음 목표부터."

다음 목표는 현재 브릭이 열심히 뛰어서 가고 있는 목적지였다. 제론은 그 도시의 유적부터 접수하기로 했다.

그것이 향후 레벨리오를 파악하기에 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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