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6/217)

Chapter 9 레벨리오 (1)

제론은 유적에서 나갔다. 밤이 되면서 공사가 중지되어 광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번 테러를 당했던 곳이라 그런지 찾아오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

공사가 아니라면 일꾼들도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제론에게는 오히려 더 편했다. 신경 쓰지 않고 유적을 들락거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다른 유적도 다 이런 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제론은 미리 마티를 통해 확인한 결사대원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어차피 밤이었기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으니 괜히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경비병은 피해 다녀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도시는 경비가 그리 삼엄하지 않았다. 제론은 거침없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사실 제론은 비밀 조직에 대해 상당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얼마 전까지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숨어 있으니 까다롭긴 해도 제대로 정체만 파악하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얼마 전 그 조직의 사람으로 보이는 소드 마스터를 만났다. 비록 실력은 제론보다 한참 아래였지만 그래도 소드 마스터였다.

만일 그 비밀 조직에 소드 마스터가 여럿 존재한다면, 또 제론이 타는 기간트인 테오스에 맞먹는 기간트가 있다면 상대하기가 정말로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그 역사가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그러니 그동안 쌓인 저력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걸 모두 감안하면 결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조직이 아니었다. 그들을 제대로 상대하려면 훨씬 더 큰 힘이 필요했다.

또한 제론을 도와줄 조력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지금 제론이 찾아가는 결사대원은 그런 조력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들로 인해 비밀 조직이 수면 위로 드러날지도 모르고 말이다.

제론은 나름대로 큰 기대를 안고 결사대원을 찾아갔다.

"여기로군."

제론은 빈민가 골목 깊숙한 곳에 도착했다. 막다른 골목이었는데, 그곳에는 문도 창문도 없었다. 그저 삼면이 벽으로 막힌 장소였다.

그 장소의 끝에 커다란 뚜껑이 있었다. 하수구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뚜껑을 열었다.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아네모스."

제론은 정령을 불러 주변 공기를 정화시켰다. 굳이 애써서 악취를 맡을 이유가 없었다.

하수구 구멍 안으로 거침없이 몸을 날린 제론의 주위로 바람이 씽씽 불었다.

아네모스의 능력은 상당히 뛰어났다. 아니, 아네모스를 다루는 제론의 힘이 대단했다. 아네모스는 열린 하수구 구멍을 통해 끊임없이 신선한 공기를 유입해 제론에게 공급했다.

덕분에 제론은 상당히 쾌적한 공기를 맡으며 하수구 안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수도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사실 이 하수도라는 것이 아예 없는 왕국도 있었다. 물론 제론이 다스리는 에어스트 왕국에는 제대로 정비된 깔끔한 하수도가 존재했다.

제론은 초고대문명의 지식을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위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도시를 설계하면서 하수도를 먼저 만들었다.

반면 크란 제국의 하수도는 처음 만들어진 다음부터 계속 확장에 확장을 거듭한 케이스였다. 당연히 내부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안에서 길을 찾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칫 길을 잃으면 하수구 구멍을 찾지 못해 끝없이 헤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티를 통해 미리 하수도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는 제론이 길을 못 찾을 리 없었다. 제론은 단번에 목적지까지 내달렸다.

사실 하수도에서 오래 버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아네모스를 이용해 몸 주위를 쾌적하게 유지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한참을 가니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그곳이 바로 목적지였다.

제론은 불빛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어느 순간부터 불빛 옆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당연히 그 사람은 제론을 발견하지 못했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거니와, 제론은 지금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움직였다. 또한 아네모스가 소리까지 차단하고 있었으니 제론이 다가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였다. 제론이 제법 가까이 다가가자, 사내도 제론을 발견했다. 그는 빠르게 다가오는 제론을 보고는 크게 당황했다.

"허억!"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하수도 안에서도 비교적 깨끗한 곳에 자리를 잡긴 했지만 그래도 이동하며 오물이 묻을 수밖에 없어 사내의 몰골은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제론은 지저분한 상태로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이대로 도망치게 둘 생각도 마찬가지로 없었다.

"네로."

촤아아아악!

물의 정령, 네로가 나타났다. 비록 지저분한 오물투성이었지만 하수도도 엄연히 물이 흐르는 곳이었다. 당연히 네로가 활동하기 좋은 영역이었다.

네로는 오물에서 튀어나왔음에도 한없이 깨끗하고 순수했다. 투명할 정도로 맑은 물이 휘몰아치자, 사내는 도망가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네로를 사내에게 날려 보냈다.

쏴아아아아!

촤아악!

물벼락이 사내를 덮쳤다. 사내는 깜짝 놀라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버둥거려도 물덩이를 벗어날 수 없었다.

"어푸푸푸! 어푸푸!"

사내가 괴로워할 틈도 없이 물이 사라져 버렸다. 제론이 네로를 돌려보낸 것이다.

사내가 언제 젖었냐는 듯 뽀송뽀송해진 몸과 제론을 번갈아 바라봤다. 사내의 시선은 그저 멍했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또 눈앞에 선 사람은 누구인지 정말로 궁금했다.

"누, 누구십니까?"

사내가 보기에 제론은 조금 어려 보였다. 하지만 결코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제론으로부터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결사대, 맞나?"

제론의 질문이 떨어진 순간, 사내가 인상을 구겼다.

"젠장!"

사내는 다급히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느새 그의 앞을 제론이 막고 있었다.

쉬익!

사내가 품에서 단검을 뽑아 찔렀다. 수천 번은 훈련했을 법한 깔끔한 찌르기였다. 물론 제론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챙강!

제론은 손가락으로 단검의 날을 잡아 그대로 부러뜨렸다. 워낙 간단히 처리했는지라 마치 과자로 만든 단검을 서로 짜 맞추듯 찌르고 부러뜨린 듯했다.

사내가 멍하니 부러진 단검과 제론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는 단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그대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턱!

제론은 사내가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예상했기에 지극히 간단히 그것을 막았다.

첨벙!

단검이 사내의 손에서 떨어졌다. 사내가 당황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암담해졌다.

"아무래도 잠깐 자고 있는 게 낫겠군."

제론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사내의 눈이 그대로 감겼다. 마법으로 재워 버린 것이다.

"네로."

촤아아악!

물줄기가 쫙 솟아 나와 쓰러지던 사내를 받쳤다. 물기둥이 사내를 칭칭 휘감자, 제론이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

그렇게 하수도를 벗어난 제론은 사내를 데리고 몸을 날려 도시를 벗어났다.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곳에 도착한 제론은 네로를 돌려보내고 사내를 넓적한 바위에 눕혔다.

마법으로 재웠으니 깨우는 것도 아주 간단했다. 제론은 손가락을 튀겼다.

딱!

사내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다짜고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제론이 또 손가락을 튀겼다.

딱!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히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았다. 사내의 눈이 공포에 잠겼다.

사내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두려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자신이 뭘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대였다. 그저 순응하는 편이 나았다. 사내는 그저 고통 없이 죽여 주기만을 기대하며 최대한 불쌍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사내가 체념한 걸 본 제론이 다시 손가락을 튀겼다.

딱!

제론을 중심으로 마나가 한바탕 휘몰아쳤다. 그 마나의 바람은 사내의 몸에 걸린 마법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자, 이제 대화를 나눠 볼까?"

제론의 말에 사내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봤다.

"아, 아아, 아아아."

사내는 신기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고작 손가락을 튀기는 것만으로 마법을 걸고 풀다니. 이런 건 솔직히 처음 봤다.

그들이 사용하는 마나폭탄을 만든 사람도 굉장한 마법사였지만 그조차 이런 식으로 마법을 쓰지는 못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는 걸 확인한 사내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대, 대체 누구십니까? 그리고 절 왜 이런 곳으로 데려오셨습니까?"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제야 주변을 자세히 살펴봤다. 아직 한밤중이라서 사방이 깜깜했다. 하지만 이곳이 넓은 공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니, 이곳은 광활한 들판이었다.

오늘은 달도 뜨지 않은 밤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쏟아질 듯 반짝였는데, 그것만으로는 시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 제론과 단둘이 있는 듯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어두운데 제론의 모습만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홀로 빛나듯이 말이다. 화들짝 놀라 자신의 몸을 살펴보니 자신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이건 빛이 아니었다. 만일 몸에서 빛이 나는 거라면 주변에 희미하게라도 빛이 퍼져 나가야 정상이었다. 한데 마치 검은 도화지 위에 화려한 색으로 그림을 그려 놓은 것처럼 딱 제론과 자신만 도드라졌다.

사내는 그제야 이것도 마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알아챈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돌 도돌 돋았다.

"결사대를 찾아왔을 뿐이다. 혹시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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