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두 공작의 선택 (2)
슈돌츠 국왕은 심각한 눈으로 앞에 앉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들은 현 미테 왕국을 이끌어 나가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렇기에 국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슈돌츠 국왕은 그 점이 못내 아쉬웠고 마음에 안 들었다. 이 왕국은 자신의 것이다. 왕조차 마음대로 못 하는 귀족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다. 짜증이 났다. 가끔은 살의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두 가문이 제대로 도와주지 않으면 코앞에 닥친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좋겠소?"
"일단 최대한 말로 해결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왕국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슈돌츠 국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이럴 때 두 가문이 나서서 레늄 왕국을 박살 내 주면 얼마나 좋은가. 단숨에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난다. 그 뒤에 오는 풍족함과 부유함은 오죽 대단하겠는가.
"이번 기회에 레늄 왕국을 흡수하는 건 어떤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하지만 우리의 피해가 너무 커집니다. 병합하는 것도 좋지만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저 체스터 공국이 벨룸 왕국을 무너뜨린 다음 그 발톱을 우리에게 돌릴 게 뻔한 상황 아닙니까."
"체스터 공국도 전쟁을 하지 않소. 벨룸 왕국이 그리 만만한 곳도 아니고……."
"전하, 체스터 공국의 저력을 간과하시면 안 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힘을 꽁꽁 숨겨 뒀습니다. 그걸 갑자기 펼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최대한 조심해야 합니다."
슈돌츠 국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서야 둘이 말을 맞춰 자신을 공격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알았소. 오늘은 이만합시다. 돌아들 가시오."
벨루스 공작과 말레피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하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니,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최대한 애썼다. 하지만 속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슈돌츠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이래서야 누가 국왕인지……."
엄연히 자신은 국왕이었다. 그러니 두 공작이 자신의 말을 따르는 게 옳았다. 한데 저 무례한 태도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거 아무래도 뭔가 수를 내긴 내야겠어."
나직이 중얼거리는 슈돌츠 국왕의 눈빛이 음험한 빛을 뿌려 댔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힘들 것 같소."
벨루스 공작과 말레피 공작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방금 슈돌츠 국왕과 대면한 다음 미테 왕국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돌츠 국왕은 왕이 되기 전과 후가 너무 달랐다. 왕이 된 이후부터 권력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했다. 그 여파가 두 가문에도 미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좋지 않소."
"동의하오. 우리 가문과 말레피 가문을 축출할 수도 있을 것 같소."
"하지만 그게 쉽게 되겠소?"
벨루스 가문와 말레피 가문은 미테 왕국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두 가문을 쳐내면 미테 왕국도 존속이 어려워진다. 슈돌츠 국왕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 리 없었다.
"가문만 축출시키고 가문이 가진 힘을 고스란히 빼앗을 수 있다면 시도하지 않겠소?"
"가문만 축출? 그게 가능하오?"
"가능한 방법을 알고 있지 않소이까."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가능한 방법이 분명히 있었다. 암살이다. 양 가문의 주요 인물을 암살하고, 허수아비 가주를 세우면 된다.
그리고 그 가주를 뒤에서 슈돌츠 국왕이 조종하면 그의 뜻대로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어느 누가 두 가문의 수장과 주요 인물을 암살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으니……."
"후우, 이거 왠지 회의가 들지 않소?"
두 사람의 얼굴에 자조가 떠올랐다.
"그래도 어쩌겠소? 이게 우리가 선택한 길인 것을."
"선택? 우리가 과연 선택을 했소? 떠밀린 게 아니라?"
말레피 공작의 말에 벨루스 공작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선택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들은 선택하지 않았다. 상황에 떠밀렸을 뿐이었다.
"아직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소."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가 없다면 과감한 선택을 하는 것도 가문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었다. 물론 쉬운 선택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 ☆
제론은 오랜만에 에어스트 왕국의 왕궁에 도착했다. 유적을 통해 언제든 이동이 가능했지만 크란 제국에 들어간 이후로는 그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제법 많은 유적을 연결시켜서 비교적 자유롭게 왕복이 가능했다.
크란 제국은 유적을 에너지원으로 쓰고 있기에 그 효용이 다했다고 여겨지는 순간 버려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론은 페쿠니아 상단을 크란 제국에 진출시켜 그렇게 버려진 장소를 상단 지부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구입했다.
그렇게 구입한 곳을 이용해서 자유롭게 유적을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왕궁에 돌아온 제론은 즉시 바이스와 세나부터 만났다. 이곳에 온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으니 서둘러 처리하고 나머지 유적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크란 제국의 유적을 다 찾은 다음에도 일이 끝나지 않는다. 아직 찾지 못한 다른 왕국의 유적도 찾아야 하고, 또 가 보지 않은 곳, 비스테 왕국과 슈네 왕국에도 가 봐야 했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것, 바로 중앙 유적을 완전히 클리어하는 일도 남아 있었다.
그걸 다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제론은 서둘러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바이스와 세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론이 왕궁에 오기 전에 미리 연락을 취한 것이다.
세나와 바이스는 제론을 보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날 필요 없어. 앉아. 시간 없으니 본론만 빨리 말하고 끝내자고."
제론의 재촉에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가문에 연락은 해 봤어?"
제론의 물음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제론이 눈을 빛냈다.
"어떻게 됐어?"
"아직 답을 못 받았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위기는 어때? 못마땅해하지는 않고?"
제론의 물음에 두 사람의 눈이 살짝 커졌다. 왠지 제론이 너무 다급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급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내 시간이 모자라서 그러는 거니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돼."
"아, 그렇군요. 아무튼 긍정적인 반응이었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다행이군."
정말로 다행이었다. 사실 제론이 한 제안은 두 가문 입장에서 보면 어이가 없을 수도 있었다.
"한데 가문을 우리 왕국으로 옮기면 왕국 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까요?"
"잘 조절해야지."
제론은 아주 간단히 대답했지만 실제로 상황이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었다. 아마 대단히 복잡한 문제도 함께 가져올 것이다.
벨루스 가문이나 말레피 가문은 각자 누리던 기득권이 있었다. 그 권리를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또한 에어스트 왕국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공을 세워서, 혹은 능력을 인정받아서 그 자리에 올랐다.
그 둘이 서로 충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앞으로 그걸 어떻게 최소화하느냐에 관한 문제는 어쩌면 바이스와 세나에게 달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왜 두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하는지 알지?"
바이스와 세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뼈저리게 알기에 어깨가 무거웠다. 또한 제론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두 가문을 유치하려고 하는 이유가 자신들 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고맙기도 했다.
"좋아. 그럼 나머지는 맡기지."
제론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뭐가 저리 바쁘실까요?"
세나가 멍하니 제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아쉬움과 서운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러게. 요즘 대체 뭘 하고 다니시는 건지……."
하지만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제론이 뭘 하는지 모르지만 제론으로 인해서 현재 에어스트 왕국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론이 아니었다면 아모르를 대량생산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제론이 막대한 양의 강철과 테페룸을 제공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제론이 만든 상단은 또 어떠한가. 페쿠니아 상단은 이제 에어스트 왕국의 여유 식량을 혼자서 유통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페쿠니아 상단은 신생 상단이었다. 신생 상단이 이제는 크란 제국까지 진출을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제론 덕분이었다.
두 사람은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신했다. 제론이 없다면 에어스트 왕국도 성립할 수 없다고 말이다.
☆ ☆ ☆
벨루스 공작과 말레피 공작이 은밀히 만났다. 수도의 비처에서 만났는데, 제론이 제공한 장소였다. 물론 그 장소를 마련한 것은 바인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군."
"나도 그렇소. 보안 하나는 확실하겠군."
두 사람이 있는 장소는 어느 저택의 지하실이었는데, 어찌나 깊이 아래로 파 내려갔는지, 깊이를 추측할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중간에 몇 번이나 길이 바뀌고 어찌나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온다면 절대로 밀실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결정은 내리셨소?"
말레피 공작의 물음에 벨루스 공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렸소."
"가기로 결정하셨소?"
"그렇소. 하면 말레피 가문은 가지 않기로 하셨소?"
말레피 공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라고 힘이 있겠소? 어제 암살 시도가 있었소."
"나도 마찬가지요."
"역시. 설마 처음이었소?"
"그럴 리가. 다섯 번째였소."
두 사람은 최근 빈번한 암살 시도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아마 제론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당해도 벌써 당했을 것이다.
두 사람뿐 아니라 가문의 주요 인물이 끊임없이 암살에 시달렸다. 그들 역시 제론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전에 모든 정보를 읽고 차단하는데 거기에 당한다면 공작이라는 작위를 내다 버려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에어스트 왕국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느꼈소이다."
"나 역시 그렇소. 대체 어떻게 암살 시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 수 있는 건지……."
"아마 그 친구를 잘 몰랐다면 에어스트 왕국에서 벌인 자작극이라고 생각했을 거요."
"오늘도 암살 시도가 있을 거라고 하니 이젠 지겨울 따름이오."
둘은 잠시 그렇게 한탄하다가 이내 눈을 빛내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을 했다. 단독으로 일을 벌여선 실패 확률이 높았다.
둘이 힘을 모아야 더욱 성공할 확률도 높고 피해도 줄일 수 있었다.
"일단 재산의 경우는 일정 부분 포기를 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야 그렇지요. 영지 같은 경우 짊어지고 갈 수도 없으니……."
그렇다고 영지를 팔아 치울 수도 없었다. 벨루스 영지나 말레피 영지의 경우 너무 컸다. 또한 벨루스 공작 같은 경우 영지민에 대한 애착이 커서 그들을 남겨 놓고 가는 상황도 마음에 걸렸다.
"마음 같아선 영지민까지 싹 데려가고 싶지만 여건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지 않겠소?"
"재산이라도 적당히 챙겨 갈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사람은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 봐야 보석류나 금으로 준비해야 하는데 그조차 갑자기 준비하려니 쉽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으면 좋으련만……."
"아예 뒤집어엎는 건 어떻소? 우리가 손잡으면 가능하지 않겠소?"
"그다음에 레늄 왕국의 침공은 어떻게 막겠소?"
"끄응, 알고 있소. 하도 답답해서 그냥 해 본 소리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것을 깬 건 벨루스 공작이었다.
"혹시…… 에어스트 왕국에 도움을 청하면 얼마나 도와줄 것 같소?"
"글쎄올시다. 제안을 그쪽에서 한 모양새이니 최대한 도와주지 않겠소?"
"하면 그쪽에 방법을 마련해 보라고 하면 어떻겠소?"
"방법? 재산을 빼돌릴 방법 말이오?"
"그것도 그렇고 영지민까지 데려가면 좋지 않겠소? 그쪽은 여전히 인구가 모자라는 모양이던데."
에어스트 왕국이 슈린 왕국을 집어삼키며 제법 인구가 늘어났지만 그래도 턱없이 부족했다. 아마 두 영지의 영지민을 싹 데려가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영지민까지 다 데려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레늄 왕국을 관통해서 지나가야 하는데, 그걸 누가 가만히 내버려 두겠는가.
"어쨌든 밑져야 본전이니 당장 연락해 보겠소."
두 공작은 그렇게 결정했다. 어려울 거라고 말은 해도 내심 상당히 기대했다. 그동안 제론이 보여 준 행보를 떠올리면 불가능이 없어 보였다.
아마 이번에도 반드시 뭔가 수를 내줄 거라고 믿었다.
밀실에서 나가는 두 공작의 표정은 결과와 달리 제법 밝았다. 당연히 두 공작을 수행하는 기사와 종자들의 표정도 밝을 수밖에 없었다.
두 공작의 표정에 깃든 밝음은 분명히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