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4/217)

Chapter 5 로스의 비밀 (2)

'근본적으로 몸의 그릇을 다시 만들지 못했기에 이대로라면 더 이상 몸이 버틸 수 없겠어.'

다른 실험체가 있는지 모르지만 아마 각자의 체질과 운에 따라 벌써 마나 폭주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

'길어야 몇 달인가?'

로스도 이대로 가면 각 장기가 외부 마나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할 것이다.

거기까지 모두 파악한 제론은 손목을 놓으며 눈을 떴다. 그러자 제론을 빤히 바라보던 로스의 반짝이는 눈이 정면으로 보였다.

"끄, 끝나셨어요?"

로스가 당황하며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얼굴을 붉히면서도 제론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대충."

"어, 어떤가요?"

로스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제론이 대체 무엇을 한 건지 궁금했다. 자신의 손목을 잡고 뭔가를 했고, 또 몸을 살펴보겠다고 했으니 자신에 관한 일 아니겠는가.

"폭발 일보 직전이야."

로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데 그 말을 또 들으니 왠지 선고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침울해졌다.

"그리고 계속 마나가 장기에 무리를 줘서 장기의 상태도 한계에 달했어."

"예?"

로스가 깜짝 놀라 제론을 바라봤다. 그건 지금 처음 듣는 얘기였다. 장기가 상했다니, 대체 그럼 자신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이 상태라면 길어야 석 달이다."

"석, 석 달이요? 그럼 전……."

"장기가 뭉개져 죽겠지."

로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사실 그녀가 항상 옆에 끼고 다니던 단어였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확정적인 얘기를 들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저, 정말인가요? 거짓말이죠? 그렇다고 말해 줘요."

"내가 거짓을 말해 뭘 하겠나?"

로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대체 이제 뭘 어쩐단 말인가. 매일 분수대에 가도 석 달 후에는 죽는다니. 왜 자신만 이런 불공평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불안과 공포에 깊이 잠식당한 로스의 귓가에 제론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살고 싶나?"

로스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증상을 한눈에 알아본 제론이라면 살아날 방법도 알지 않을까? 살고 싶으냐는 말 한마디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 당연하죠. 저…… 살 수 있나요?"

제론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가능성이야 있지만 실패하면 바로 죽음이었다.

"가능성은 있지만 성공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거다."

로스가 그 말에 한참이나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은 결심을 굳혔다.

"그거 해 주세요."

제론은 로스를 빤히 쳐다봤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절박한 거야 이해하지만, 뭐가 이리 당당하단 말인가. 전혀 부탁을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제론이 그 일을 해 줘야 하는 것처럼 말하다니.

"그럼 넌 뭘 해 줄 거지?"

"예?"

로스가 크게 당황했다. 뭘 해 줄 거냐니, 사람 목숨을 구하는 일이다. 거기에 왜 대가를 요구한단 말인가.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건 당연히 누구나 해야 하는 일 아닌가.

하지만 상황이 절박하니 그런 마음을 그대로 내보일 수가 없었다. 로스의 입에서는 속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갔다.

"뭐, 뭘 원하시는데요?"

솔직히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저택도 로스의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실험을 한 자들의 것이었다. 또한 저택에서 일하는 일꾼들도 로스가 고용하지 않았다.

재산도 아예 없었다. 말 그대로 빈털터리인 것이다. 그러니 대체 뭘 줄 수 있겠는가.

'줄 수 있는 거라고는…….'

뭘 줄 수 있는지 떠올리다가 자신의 몸을 한 번 내려다본 로스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전 드릴 수 있는 게 제 몸밖에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자신의 몸을 걸고 뭔가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거슬렸다. 하지만 상대가 제론이라면 허락해 줘도 될 것 같았다.

로스는 제론을 빤히 쳐다봤다. 설마 자신의 몸을 내주겠다는데 거절할 리가 없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쓸모없군. 그럼 이 거래는 없던 걸로 하지."

"예?"

로스가 크게 당황했다. 설마 이렇게 단호히 거절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농담이나 장난인 줄 알았다. 한데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는 제론을 보니 절대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로스는 다급해졌다. 어느새 제론이 문을 열고 저택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자,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제론은 기다리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급해진 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날렸다.

쉬아악!

바람이 갈라지며 로스의 몸이 제론 앞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제론은 충분히 피해서 지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걸음을 멈췄다.

"기다려 주세요!"

로스가 그렇게 외치며 양팔을 벌리고 제론을 막아섰다. 제론은 그런 로스를 가만히 쳐다봤다.

"잘못했어요! 그런데 정말로 전 드릴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살고 싶단 말이에요!"

제론은 그런 로스를 보다가 피식 웃고는 돌아서서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제론의 뒤를 따랐다.

로스는 최대한 제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썼다.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제론의 표정을 힐끗힐끗 살피며 제론이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뭘 보고 날 그렇게 믿는 거지? 내 말이 틀렸을 수도 있잖아?"

제론의 말에 로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쩌면 그저 분위기에 휩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믿을 수 있었다. 제론이 아니면 아무도 자신을 살려 주지 못한다는 감이 확 왔다.

'지금까지 제 감은 거의 틀린 적이 없답니다.'

물론 그 말은 꺼낼 수 없었다. 감에 목숨을 맡겼다고 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어떤 실험에 어떻게 참여했는지 말해 달라는 거지."

"예? 시, 실험이요?"

로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실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자신이 그걸 말해 주면 제론도 같은 실험을 통해 뭔가를 얻으려 할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대충은 짐작하니 기억나는 대로만 얘기하면 돼."

제론은 이미 로스의 몸을 샅샅이 살펴봤다. 어떤 식으로 마나를 주입해야 몸이 이렇게 되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이제 그걸 확신하고 좀 더 세부적으로 알아내기 위해 로스의 증언이 필요할 뿐이었다.

로스는 머뭇머뭇하다가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실험은 분수대에서 벌어졌어요.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이 광장을 통제하고 절 그리로 데려갔어요."

제론은 눈에 이채를 띠고 로스의 설명을 차분히 들었다. 로스의 몸에 에너지를 주입한 장치는 바로 분수대였다. 거기에 특별한 아티팩트를 꽂아 바늘을 통해 로스의 몸에 마나를 넣은 것이다.

당시 로스는 마나를 몸으로 받아들이며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고통이었다.

그때 수천 번이나 죽고 싶었지만 몸을 마음껏 통제할 수 없어서 그게 불가능했다. 그저 고통을 겪고 기절하고 깨어나서 또 겪고 기절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결과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소드 마스터였지만 말이다.

로스의 설명을 모두 들은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이 어디지?"

"예? 치, 침실이요?"

로스는 또 불안해졌다. 하지만 이제 더 떨어지거나 포기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제론을 침실로 안내했다.

제론은 손가락을 들어 침대를 가리켰다. 로스는 군소리 없이 침대에 누웠다.

제론은 로스 앞에 서서 양손을 들어 올리고 집중했다.

"절대 움직이지 마라. 죽기 싫으면."

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어 본 경험이 있었다. 비록 강제이긴 했지만 그걸 견뎌 냈다. 그러니 치료 중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참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로스의 표정이 결연해지자, 제론이 손을 움직였다. 오른손은 로스의 아랫배에 그리고 왼손은 로스의 가슴 한가운데에 갖다 댔다.

가슴에 손이 닿는 순간 로스가 흠칫 놀랐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제론에게 다른 의도가 없다는 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제론의 양손에 마나가 모여들었다. 제론의 몸에서 나온 마나가 아니라 로스의 몸에서 끌어들인 마나였다.

가장 마나를 모으기 쉬운 위치가 가슴과 아랫배였다. 제론은 그쪽으로 로스의 마나를 계속 끌어들였다. 로스의 몸 곳곳에 뭉친 마나가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사실 완벽하게 하려면 로스의 몸이 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진짜 소드 마스터가 된다. 하지만 그건 그저 이렇게 마나만 모아준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려면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현재 로스는 정신도 육체도 없는 상태에서 마나만 받아들였다.

이런 경우 가장 간단하고 좋은 해결법은 마나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제론은 신중하게 마나를 모아 그것을 서서히 끌어들였다. 막대한 양의 마나가 제론의 몸으로 빨려 들어왔다.

"하으응!"

로스는 마나가 급격해 배출되자 묘한 신음을 흘렸다. 몸의 정이 빠져나가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면서 그것이 신경계를 건드린 것이다.

로스는 마나가 빠져나가는 내내 몸을 떨었다. 부끄러움 때문에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지만, 몸이 반응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론은 자신의 몸으로 빨아들인 로스의 마나를 일단 심장으로 보냈다. 제론의 몸에서 마나를 가장 빨리, 그리고 순수하게 정화시킬 수 있는 곳은 바로 심장의 마나링이었다.

마나링은 항상 회전하고 있었다. 회전과 동시에 끊임없이 불순물을 태워 버리고 파장을 동조하기 때문에 어떤 마나를 받아들이든 가장 순수한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로스의 장기에 있는 모든 마나를 빨아들여선 안 된다. 원래 로스가 가지고 있던 마나는 그대로 둬야만 했다. 그 선을 딱 잘라 내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자칫 너무 많은 마나를 가져와 버리면 장기가 힘을 잃어버리고, 그건 곧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반면 외부 마나를 남기면 다른 특성의 마나가 충돌해 장기가 무너질 것이다. 그것 역시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 선을 정확히 파악해서 마나를 빨아들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제론은 조금 다른 방법을 이용했다.

"후욱!"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했다. 제론은 심장의 마나링을 가속했다. 심장에 모은 마나가 마나링 위에서 함께 회전했다. 물론 그것에 마나링에 흡수되지는 않았다.

제론의 마나링은 지금 포화 상태였다. 심장에 마나를 받아들이려면 마나링을 새로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아직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렇게 회전시켜 깨끗이 만든 뒤 온몸으로 흩어 버릴 계획이었다.

그렇게 심장의 마나링을 가속하면서 손바닥을 통해 마나를 실처럼 뽑아 로스의 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로스의 몸에는 각 장기에 머문 마나와 분수대에서 흡수한 마나가 공존하고 있었다. 다만 양이 줄어서 이젠 약간의 충돌만 감수하면 될 정도가 되었다.

문제는 로스의 장기가 약해져서 그 정도 충격으로도 충분히 상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제론은 자신의 마나를 이용해 로스의 몸에 있는 두 가지 마나를 동조시켰다.

우우우우웅!

두 마나가 진동하며 서서히 특성이 비슷해졌다. 각 마나가 가진 고유의 파장이 있는데, 그 파장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솔직히 제론은 이 방법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론적으로는 초고대문명의 지식을 공부하며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걸 실제로 써 본 적이 없었다.

'진짜 되는군.'

내심 안도했다. 만일 이 방법이 안 된다면 자신의 마나로 어떻게든 로스의 장기를 보호하려고 했다. 물론 그렇게 해도 타격을 입기에 로스의 수명이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동조를 했으니 로스가 가진 마나량이 늘어난 셈이 되었다.

소드 마스터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현시대 기준의 익스퍼트 정도의 실력은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다만 마나로드가 개척되지 않아 제대로 그 힘을 모두 쓸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물론 제론은 그것까지 해결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건 제론의 심력과 마나를 너무 많이 소모한다. 또한 로스에게 그걸 버틸 여력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마나로드를 만드는 것도 상당한 충격을 준다. 그걸 버티지 못하면 현재 로스의 상태로는 죽을 확률이 너무 높았다.

제론의 얼굴을 비롯해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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