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두 번째 도시 (2)
"여기는 생각보다 경계가 심하지 않은데?"
두 번째 도시는 첫 번째 도시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그런데도 경계는 첫 번째 도시의 절반에도 크게 못 미쳤다.
첫 번째 도시의 경우 들어가려는 사람이 모든 문에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이곳은 별다른 검문검색 없이 성문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었다.
마티의 범위가 아슬아슬하게 이 도시에 미치지 못하기에 도시에 대해 알아보려면 직접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우르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묻어서 슬쩍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와 기사가 있었지만 다들 번득이는 눈으로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기간트 라이더로군.'
성문을 지키는 기사는 라이더였고, 기간트 장비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은 첫 번째 도시와 같았다.
아마도 이것이 최소한의 경계인 듯했다. 다른 어떤 도시에 가든 이 정도 경계는 하는 모양이었다.
'유적의 유무가 경계의 강도를 결정하겠군.'
그렇다면 이 도시에는 유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니, 있을 수도 있었다. 고대유적과 연결되지 않은 거점 형식의 초고대유적이라면 저들도 이용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니지. 그건 확신할 수 없지.'
아무리 거점 형식의 초고대유적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다수의 마티를 보유했다. 또한 유적에서 지속적으로 에너지가 흘러나갔다. 물론 에너지의 양이 다른 유적에 비해 적었지만 말이다.
만일 비밀 조직에서 그 에너지를 찾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자리를 놓칠 리 없었다. 아무리 다른 유적에 비해 에너지의 양이 적다 하더라도 그걸 이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했으니까.
제론은 도시를 거닐었다. 저번 도시와는 달리 도시에서의 통행증을 따로 발급하지도 않았고, 그걸 확인하려는 경비병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활기가 넘쳤다. 정말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론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분위기가 조금 들뜨긴 했지만 그래도 그 안에 흐르는 삼엄함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전혀 느끼지 못했겠지만 제론은 소드 마스터이자 대마법사였다.
고작 두 개의 도시를 봤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크란 제국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에 설치된 마법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번 도시보다는 못했지만 이 도시에도 각종 마법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제론은 일단 숙박부터 알아봤다. 저번 도시에서 초반에 워낙 고생을 했기에 여기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잠자리만이라도 편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나마 다행이군.'
이곳에서도 함부로 숙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시 규모가 워낙 크니 그런 것이 가능한 여관이 있었다.
빈민가 근처에 있는 허름한 여관이었는데, 여관 주변이 심각한 우범 지대였다.
크란 제국의 치안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병사의 수도 많았고, 질도 높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범죄를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특히 빈민가 근처의 범죄율은 상당했다. 그리고 제론이 발견한 여관은 그런 범죄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신분 노출을 꺼리는 자들이 묵는 곳이기에 통행증이나 신분증이 필요 없었다.
다만 여관에서 자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었다. 또한 그렇게 당하고도 어디 가서 하소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차피 신분 확인이 불가능한 놈들에게 당한 것일 테니 말이다.
제론 입장에서는 아주 훌륭한 여관이었다. 비록 낡고 허름했지만 말이다.
제론은 적당한 방을 잡고 안을 정리했다. 일단 침대는 낡고 지저분해서 누울 기분도 생기지 않았다. 그 침대 대신 제론은 아공간에 있는 깨끗하고 푹신한 침대를 꺼냈다.
그리고 벽과 바닥에 마법진을 새겨 공기를 쾌적하게 유지했다.
그 정도만 해도 상당히 훌륭한 잠자리가 되었다.
제론은 일단 하룻밤을 잔 다음 여관에서 나갔다. 물론 그때는 침대와 마법진을 깨끗이 정리한 뒤였다.
별것 없는 도시였지만, 그래도 충분히 살펴보고 싶었다. 사실 크란 제국 내에 있는 유적을 찾아다니는 건 상당히 막막한 일이었다.
첫 번째 도시의 경우야 어찌 되었건 정보가 돌아다니니 위치를 알 수 있었지만, 나머지 유적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다.
크란 제국 내에서 알려진 유적은 세 군데뿐이었는데, 그중 하나를 찾았으니 이제 남은 건 둘이었다. 한데 그 둘은 첫 번째 유적에서 지나치게 먼 곳에 위치했다.
현 상황상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수 없기에 도시를 찾아 날아가야 하는데, 크란 제국의 경우 제대로 된 지도조차 구할 수가 없어서 도시를 찾아가는 것도 어려웠다.
아무튼 이래저래 어려움이 많아, 지금으로서는 차근차근 도시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고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도시에 유적이 있다면 경계가 심할 테니 그걸 토대로 유적의 유무를 알아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제론은 그저 무작정 도시를 걸었다. 굉장히 넓은 도시였기에 길도 많았다. 제론은 되도록 넓은 길로만 다녔다. 골목골목 다 다니기에는 너무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냥 걷기만 한 건 아니었다. 제론은 이동하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대화와 상황을 눈에 담았다. 제론이 몸에 지닌 아티팩트를 통해 그 모든 것이 태블릿에 차곡차곡 쌓였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그걸 확인하면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문득 도시의 중앙에 도착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광장이 조성되어 있었고, 그 광장 한가운데에는 아름다운 분수가 있었다.
제론은 그 광장에 들어선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법진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 광장 자체가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제론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바닥을 확인했다.
평평한 돌이 촘촘히 깔려 있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제론은 감탄했다. 그렇게 깔린 돌 중에 특별한 재질을 가진 것들이 섞여 있었다.
물론 겉으로 보면 다른 돌과 똑같았다. 아마 웬만큼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가 오더라도 돌의 차이점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제론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돌은 달랐다.
제론은 성질이 다른 돌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광장의 마법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돌들이었다.
특별한 성질을 가진 돌을 이용해 광장에 거대한 마법진을 구성한 것이다.
'상당한 실력이군.'
마법진 자체도 뛰어났다. 예전에 창에 에너지를 주입하기 위해 만든 마법진만큼이나 대단했다. 이 역시 고대문명에서 유래된 마법인 것이다.
마법진을 완벽히 분석하려면 전체적인 마법진의 모양을 알아야 하는데, 광장이 워낙 넓었기에 그걸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제론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론은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분수로 다가갔다.
분수에 최대한 가까이 가서 멍하니 분수를 쳐다봤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넋을 잃고 구경하는 것 같겠지만 사실 제론은 자신의 감각을 넓게 펼쳐 마법진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제론의 감각은 상당해서 광장 전체를 장악했다.
일단 특수한 돌로 이루어진 마법진을 확인한 다음, 주변 마나의 흐름을 파악했다.
마법진은 3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가장 위에 특수한 돌로 마법진을 그렸고, 그 아래에 위와 연계된 마법진을 마나스톤을 섞어서 만들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 거대한 금속판을 두고 마법진을 구성했다.
그 세 개의 마법진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활발히 주변 마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제론의 머릿속에 퍼즐이 맞물려 맞춰지듯 마법진이 착착 꿰맞춰졌다.
마법진 자체는 맞출 수 있었지만, 그걸 분석해서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 알아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이곳에 쓰인 마법진이 생각보다 복잡해서 완전히 분석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듯했다.
제론은 완전히 맞춰진 마법진을 머릿속에 담은 채 천천히 분석을 시도했다. 굳이 이 자리에서 할 필요는 없었기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다.
한데 그 순간 누군가 말을 걸었다.
"분수가 정말로 마음에 드시나 봐요."
제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법진을 분석하고 꿰맞추는 데 너무 집중했다. 누가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이자 대마법사였다. 게다가 주변 마나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리 딴 데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다가오는 걸 놓칠 리가 없었다.
제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사람을 쳐다봤다. 엄청나게 아름다운 여인 한 명이 생글생글 웃으며 제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당한 기품이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또한 옷차림도 예사롭지 않았다. 장인이 정성을 다해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옷을 입은 여인이 보통 사람일 리 없었다.
"제게 하신 말씀입니까?"
제론의 물음에 여인이 더욱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짜고짜 손을 불쑥 내밀었다.
"반가워요. 전 로스라고 해요."
손을 내민 로스의 눈이 이슬처럼 반짝였다.
제론은 잠시 로스의 손을 쳐다보다가 마주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파바박!
순간적으로 마나가 충돌해 스파크가 일어났다. 물론 눈에 보이는 스파크가 아니었다. 마나와 마나가 부서지며 팍팍 튀었다.
제론은 눈앞에 선 여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방금 전의 악수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여인은 굉장한 실력자였다. 현시대에는 절대 없을 거라고 믿던 존재이기도 했다.
'소드 마스터!'
진짜 소드 마스터였다. 초고대의 기준으로 봐도 분명한 소드 마스터였다. 조금 전 악수로 그녀의 실력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놀랍군요.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로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로스였다.
"잠시 시간 좀 내 주시겠어요?"
로스는 너무나 궁금했다. 대체 눈앞에 선 사내가 누구인지. 또 어떻게 저런 거대한 힘을 손에 넣었는지 말이다.
그것은 제론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요."
로스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향했다. 제론은 분수를 쳐다보며 머릿속에 새겨진 마법진을 재빨리 한 번 점검하고는 로스의 뒤를 따랐다.
'나중에 틈을 봐서 태블릿에 저장해 둬야겠군.'
제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로스의 걸음은 생각보다 빨라서 잠깐이라도 딴생각을 하면 놓칠 것 같았다.
로스가 제론은 데려간 곳은 상당히 커다란 저택이었다. 제론은 저택 앞에 도착해서 눈에 이채를 띠었다. 저택의 규모에 비해 안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기척이 너무 적었다.
'고작 4명?'
참으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보아하니 저택을 관리하고 살림을 도맡아 하는 모양이었다.
"들어와요."
로스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가 놓지도 않았다. 들어올 테면 들어와 보라는 듯했다. 하지만 누구도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정말로 특이하군.'
저택에 흐르는 기운이 굉장히 특별했다. 사람들이 접근하기 꺼려지게 만드는 기운이었다.
물론 제론에게는 전혀 소용없었지만 말이다.
로스가 저택에 들어가자, 저택의 기운이 흔들리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그러자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이 후다닥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제론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관찰했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치 코앞에서 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그들의 움직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저택 한구석으로 향해 모였다. 그곳에 있는 방에 함께 들어가 쥐죽은 듯 있었다.
'꼭 도망치는 것 같군.'
제론이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빛내고 있을 때, 로스가 뒤돌아 제론을 바라봤다.
"이제 됐어요."
제론은 로스의 말에서 방금 전 기운을 흔든 것은 로스가 의도적으로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당신 정체가 뭐죠?"
제론은 로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제론의 날카로운 감각이 그녀의 온몸을 샅샅이 훑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에 정말로 세심히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