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8/217)

Chapter 3 크란 제국 (2)

제론은 저택의 담벼락에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겼다. 경비병의 기척이 느껴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에 서 있다가 경비병과 마주치면 틀림없이 통행증을 요구할 것이다.

제론은 가장 가까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이었기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게 움직이는 제론의 뇌리 한구석에 스키아가 보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택은 상당히 넓었다. 정문이나 담에서 건물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만 해도 엄청났다. 그리고 그 중간에 수많은 병사와 기사가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건물은 저택의 중앙에 3개가 모여 있었는데, 일반적인 저택과는 많이 다른 형태였다. 마치 상자를 세워 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3개의 건물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건물 주변에는 놀랍게도 기간트가 서서 지키고 있었다.

도시 내에 기간트 소환을 방해하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으니 기간트 장비를 가지고 경비를 서지 못하고, 아예 미리 소환해서 비치한 것이다.

'중요한 곳이로군.'

저택으로 위장했지만 저택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담이나 정문이 다른 저택과 비슷했기에 다들 저택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저택이 아닌 다른 시설이었다.

스키아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건물로 스며들었다. 그림자를 통해 이동하는 스키아를 발견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첫 번째 건물은 각종 마법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9층 건물이었는데, 각 층마다 벽과 천장 바닥에 마법진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제론은 그 마법진을 보고 살짝 놀랐다. 웬만한 수준의 마법진이라면 그저 보는 것만으로 단숨에 원리와 마나의 흐름을 파악해 어떤 마법진인지 알아냈을 것이다.

한데 이 마법진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현재의 마법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 마법진이었다.

'이 정도면 고대문명 수준인데?'

제론이 보기에는 그랬다. 차분히 시간을 들이면 어떤 마법진인지 알아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제론은 각각의 층을 모두 확인한 후, 스키아를 다음 건물로 이동시켰다.

두 번째 건물이 진짜였다.

건물에는 수많은 창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창날이 위로 향해 있었는데, 창이 꽂힌 자리에 마법진 하나가 빛을 내고 있었다.

에너지를 끌어내는 마법진이었는데, 그렇게 끌어낸 에너지를 창으로 끊임없이 보내고 있었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창날이 모두 테페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창대에도 테페룸이 잔뜩 섞여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창대에 섞인 다른 성분은 테페룸을 가공해서 만든 물질이라는 점이었다.

'포로스!'

하마터면 스키아와의 링크가 끊어질 뻔했다. 그 정도로 놀랐다. 창대 내부에 마나로드가 존재했다. 포로스로 만들어진 마나로드였다.

그리고 창대 곳곳에 그 마나로드와 이어지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창에 새겨진 마법진도, 또 창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마법진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법 시간을 들여야 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고 복잡했다.

마나의 흐름도 잔뜩 꼬여 있어서 그걸 하나하나 풀어 가려면 웬만한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일단 들어가야겠어.'

제론은 확신했다. 이곳에 초고대유적이 있었다. 그건 틀림없었다. 또한 고대유적도 있었다. 아니, 있었을 것이다. 그 유적을 통째로 없애고 저 건물을 세웠음이 분명했다.

스키아만으로 확인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창 하나를 훔쳐서라도 알아보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어차피 초고대유적을 발견하면 마티를 통해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제론은 스키아를 움직여 마지막 남은 건물을 확인했다. 그 건물 역시 수많은 마법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다른 곳과는 다르게 수많은 사람이 상주하고 있었고, 그들을 위한 숙박 시설과 편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물론 마법진은 편의 시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특별한 기능을 가진 것이었다. 아직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은 외부를 경계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인원이기도 했고, 또 경비를 더 철저히 하기 위한 교대 병력이기도 했다.

제론은 일단 스키아로 근방의 경계 상황이나 건물의 내부 구조 등을 세심히 살폈다. 모든 것이 제론이 몰래 숨어 들어갔을 때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에 확인한 건물 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일단 마법진이 도배된 곳에는 사람이 다가가지 않았다. 누구든 제론이 보기에도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독이라도 묻어 있는 듯한 반응이었다. 제론은 그 마법진에 뭔가가 있다고 판단했다. 나중에 몰래 숨어 들어갈 때 조심해야만 했다.

확인할 만한 것을 모두 살펴본 제론은 일단 스키아를 돌려보냈다. 이제는 실행만이 남았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무래도 그게 움직이기 편할 것이다. 하지만 건물 안에 도배된 마법진을 생각하면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만일 마법진이 특별한 상황에서 빛을 내게 만드는 것이라면 숨어 들어가는 것이 상당히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제론은 스키아를 움직이면서도 주위를 세심히 살폈다. 혹시라도 경비병이 골목으로 들어온다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일단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릴 곳이 필요하군.'

이곳은 잠깐 몸을 숨기긴 좋아도 오랫동안 머물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제론은 조심스럽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몸을 숨기더라도 이곳에서 가까운 곳이 좋았다.

제론은 적당한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생각보다 많았다. 각 건물마다 시야가 차단된 장소가 있었다. 제론은 이동 편의성을 생각해 자리를 잡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제론이 숨은 곳으로 다가오면 다른 건물의 사각으로 이동할 빈틈이 있어야 활동하기가 편했다.

그 모든 사항을 고려해 장소를 고른 제론은 기척을 죽인 채 태블릿을 꺼냈다.

해가 지려면 아직 1시간 정도는 있어야 한다. 게다가 해가 진 직후가 아니라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활동하기가 용이했다. 즉, 최소한 2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시간 동안 뭘 하겠는가. 제론은 오늘 확인한 건물의 마법진을 분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에 있는 수많은 마법진 중 가장 궁금한 것은 바로 창과 창을 꽂은 자리의 마법진이었다.

바닥의 마법진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대충 감이 왔기에 일단 창의 마법진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스키아."

제론은 다시 스키아를 불러 저택의 건물에 보냈다. 스키아와 공유된 감각에 창의 모습과 바닥의 마법진이 확 들어왔다.

이런 방식의 마법진은 겉만 보고는 알 수 없었다. 세심한 마나의 흐름을 통해 감춰진 부분을 확인해야 정확한 효능을 알아낼 수 있었다.

스키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지만 아직 시간이 넉넉했다. 제론은 차분하게 마법진을 하나하나 해체하며 분석해 나갔다.

제론은 스키아와 공유된 시각을 통해 마법진을 확인하고 그것을 태블릿에 옮겨 그렸다. 또한 스키아로 파악할 수 있는 마나의 흐름을 최대한 집중해서 캐치해 그것도 태블릿에 옮겼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태블릿에 창에 새겨진 마법진과 마나의 흐름, 그리고 창의 내부 구조가 조금씩 그려졌다.

그렇게 창의 마법진을 옮긴 제론은 바로 이어서 바닥의 마법진도 태블릿에 기록했다. 바닥의 마법진은 12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드러난 부분보다 감춰진 부분이 훨씬 많았기에 그걸 모두 옮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충 흐름을 파악하는 건 가능했다.

제론은 할 수 있는 걸 다 한 다음 스키아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태블릿을 통해 마법진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완전히 옮기지 못했기에 분석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태블릿의 기능과 제론의 능력이 합해지니 어찌어찌 분석이 가능했다.

물론 완벽한 분석은 아니었다. 정말로 완벽하게 분석하려면 실제로 제론이 저 창 앞으로 가서 오랫동안 마나의 흐름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러니 지금은 정확한 분석보다는 마법진의 효능을 중점적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근차근 마법진을 분석하던 제론의 눈이 점점 커졌다.

"엄청나군."

창에 담긴 마법진은 테페룸과 포로스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었다.

바닥의 마법진은 예상대로 에너지를 끌어내 전달하는 마법진이었다. 땅에 퍼진 지력을 모아 마법진 중앙에 꽂힌 창에 끊임없이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보통의 땅에 이런 마법진을 하나 만들어 놓는다면 지력이 완전히 바닥나 땅이 황폐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특별했다.

초고대유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고대유적에서는 끊임없이 에너지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초고대유적이 만들어 내는 에너지였다. 유적 자체가 만들어 쓰고 남은 에너지를 외부로 방출하는데, 그 에너지를 마법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창에 새겨진 마법진은 그렇게 받아들인 에너지를 저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특별한 조건을 만들면 한꺼번에 모든 에너지를 불꽃으로 바꿔 폭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테페룸과 포로스는 에너지를 저장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특별한 방법을 써야만 한다. 그걸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마법진과 창대 내부에 만들어진 구조였다.

창대 내부는 미로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모든 곳에 포로스가 꽉 채워져 있었다. 그 구조는 특별한 마법진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것이었다.

그것이 어우러져 에너지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저장하게 되어 있었다. 테페룸으로 이루어진 창날도 에너지 저장의 효과가 있었고, 나중에 그걸 터트릴 때의 역할도 컸다.

제론은 창 하나의 위력을 대충 가늠해 봤다. 아직 마법진을 완벽히 분석한 게 아니라 정확한 위력을 산출할 수는 없었기에 대충 어림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충 계산한 것만으로도 표정이 굳을 정도로 놀랐다. 창 하나를 제대로 터트리면 웬만한 성은 단번에 날려 버릴 수 있었다.

건물 안에는 이런 창이 수백 개나 꽂혀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에너지를 모아야 창을 꽉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곳에 있던 창들은 조만간 에너지가 포화 상태에 이르기 직전이었다.

'위험해.'

정말로 위험했다. 만일 저 창들이 모두 크란 제국의 것이라면, 또 저 창이 수백 개가 아니라 이미 훨씬 많은 수를 만들어 뒀다면 무서운 일이었다.

저 창 하나면 기간트 수십 기를 동시에 박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런 창이 인간용만 있으란 법은 없지.'

만일 기간트용 창이나 검을 저런 식으로 만들었다면 그것도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저런 창을 든 기간트를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창이 에너지를 방출하는 방식을 바꿔서 단번에 폭발하지 않고 끊임없이 에너지를 뿜어낸다면, 상대하는 기간트의 몸에 스치기만 해도 박살 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못 막겠군.'

물론 제론 정도 실력을 가진 라이더라면 상대가 어떤 무기를 들더라도 승리할 수 있었다. 상대의 무기를 역이용하는 방법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보통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마 저런 무기를 든 기간트가 10기만 나타난다 하더라도 수백 기의 기간트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책이 필요해.'

저런 무기를 상대할 대책이 필요했다. 앞으로 저 무기를 더 이상 못 만들게 할 대책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유적을 차지해 거기서 흘러 나가는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 된다.

지금까지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내버려 뒀지만 일단 유적의 주인이 되어 통제실을 장악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에너지만 막아도 더 이상 창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근처의 땅만 황폐해질 뿐 창에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를 쌓는 건 불가능해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창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디 있는지 알아내서 훔치기라도 해야 할지 모르겠군.'

마법진을 분석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날이 저물었다.

밤이 되자 제론이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저택 안에 있던 마법진들이 일제히 가동하며 주변에 촘촘한 마나의 그물을 깐 것이다.

저택에 다가간 제론은 그 마나의 그물에 담긴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건드리면 강한 빛이 터지는 마법의 일종이었다.

제론은 조용히 저택에 다가가 마나의 흐름을 몸으로 느꼈다. 감각을 최대한 마나에 집중하니 그 흐름이 눈에 보일 듯 파악되었다.

마나의 그물은 참으로 촘촘했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더구나 제론은 마나링을 9개나 만든 대마법사였다.

제론의 심장에서 회전하던 마나링이 맹렬히 가속했다. 제론의 몸에서 가느다란 마나의 실이 가닥가닥 나왔다. 그리고 촘촘하게 짜인 마나의 그물에 스며들어 갔다.

그렇게 마나를 간섭시킨 제론은 마나의 그물을 넓혔다. 촘촘했던 마나의 그물 한 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사람이 하나 지나가고도 남을 정도로 큰 구멍이었다.

하지만 그냥 구멍 하나 뚫은 걸로는 소용이 없었다. 마나의 그물은 저택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당연히 제론도 그걸 알고 있었다.

제론은 일단 뚫린 마나의 그물을 통해 저택의 담장을 훌쩍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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