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크란 제국으로 (2)
'남은 건 크란 제국뿐이로군.'
다른 왕국은 이제 대부분 다 돌았다. 아직 돌지 않은 왕국이 몇 군데 있었지만 그곳은 오지나 다름없었기에 천천히 가도 충분했다.
게다가 그중 하나는 사막이었다. 사막은 아무리 소드 마스터인 제론이라 하더라도 가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게다가 사막에서는 일반적인 기간트로 뭔가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막에는 사막에 특화된 기간트가 필요했다. 그래서 사막에 있는 비스테 왕국은 거의 침공을 받지 않아 왔다.
아무튼 사막에 있는 비스테 왕국과 북쪽 끝에 있어서 1년 내내 눈보라가 몰아치는 슈네 왕국을 제외하면 모든 왕국을 돌며 유적을 방문한 셈이었다.
그동안 정말로 많은 유적을 방문했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유적의 수만 해도 수백 개에 달했다. 한데 제론은 알려지지 않은 유적까지 수시로 발견해서 등록했다.
그중에는 고대유적과 연결된 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고대유적 중에는 많은 보물이 있는 곳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이 유적만 달랑 있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튼 공통적으로 그런 유적 아래에는 초고대유적이 있었고, 대부분 고대유적의 규모가 크면 초고대유적의 규모도 컸다.
고대유적을 만든 자들은 초고대유적의 존재를 알고 그것을 이용했음이 분명했다. 초고대유적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파악해 그걸 자신들의 건물에 써먹은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유적의 링크를 늘려 갈수록 다룰 수 있는 마티의 수도 늘어 갔다. 그리고 그것은 문두스의 정보력을 월등히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늘어난 정보력을 통해 발견되지 않은 유적을 찾아내기도 했고, 또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장소의 정보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 모든 정보는 고스란히 제론에게로 향했다.
그로 인해 제론이 다시 방문해야 할 지역이 더 늘어났다. 물론 지금 당장 갈 생각은 없었다. 일단 크란 제국부터 정리를 한 다음에 나머지 유적을 차근차근 돌아볼 계획이었다.
그동안 수백 개의 유적을 열면서 제론이 얻은 것은 비단 마티나 폴타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기능을 가진 거대 아티팩트도 몇 가지 얻었다.
그중 얻었을 때 가장 기뻤던 것은 단연 테페룸 제조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테페룸 가공 아티팩트였다.
크란 제국에 인접한 작은 공국에 있는 유적에서 얻었는데, 테페룸을 이용해서 포로스를 가공해 내는 곳이었다.
앞으로 더 이상 포로스 문제로 골치 썩일 일이 없어졌다. 필요한 만큼 그곳에 가서 가져오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어쨌든 그 모든 것을 다 아우른 제론은 이제 크란 제국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저기가 국경이로군."
크란 제국은 다른 왕국과 달리 국경 관리가 엄청나게 철저했다. 아무나 들어갈 수도, 또 나갈 수도 없는 나라가 바로 크란 제국이었다.
물론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자격만 얻으면 된다. 하지만 그 자격을 얻는 것이 어려웠다.
당연히 제론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크란 제국의 국경을 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넘어간 다음이었다. 제론은 일단 크란 제국의 정보를 차분하게 모아 보기로 했다.
그렇게 제론은 크란 제국 국경 근방에 있는 교역 도시에 한동안 머물렀다.
☆ ☆ ☆
깁스 남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에는 좌우 벽에 빛을 내는 마법진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마나스톤을 쓰지 않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이었다.
복도 중간 중간에 화려하게 장식된 문이 있었다. 어떤 문에서는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고, 어떤 문은 어두컴컴한 그늘이 져 있었다.
빛이 흘러나오는 문은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는 뜻이었다.
깁스 남작은 몇 번이나 와 보는 곳이었기에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고 끝까지 걸어갔다.
복도의 끝 정면에 커다란 문이 있었다. 다른 문과 달리 아무 장식도 없이 밋밋했다. 하지만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깁스 남작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거대한 회의실이었다.
한가운데에 놓인 거대한 원탁 주위로 의자가 쭉 둘러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의자에 한 명씩 앉아 있었는데, 다들 한가운데에 마법진이 새겨진 복면을 쓴 채였다.
깁스 남작은 탁자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모두의 시선이 깁스 남작에게로 향했다. 깁스 남작은 그 시선에 살짝 긴장하며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쫙 펼쳤다.
"정기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깁스 남작은 그렇게 말을 꺼낸 뒤 두루마리에 있는 내용을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늄 왕국 분열 작전은 절반의 실패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슈린 왕국이 너무 허무하게 무너지는 바람에 레늄 왕국이 제대로 버티기 어려울 듯합니다. 더 이상의 지원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손을 뗐습니다."
다들 묵묵히 그 보고를 들었다. 몇몇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헥서 왕국에서 동일하게 진행된 분열 작전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성공 가능성이 낮아졌습니다. 목표로 삼았던 아베티스 가문이 회생하면서 나베 공작가가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도 더 이상의 지원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손을 뗐습니다."
이번에는 복면을 쓴 사내 중 하나가 손을 슬쩍 들었다. 그러자 깁스 남작이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너무 어이없이 실패한 것 아닌가? 상당한 지원이 간 걸로 아는데? 유적에 대한 정보까지 하면 예전 레늄 왕국의 슈린 공작가에 해 준 지원보다 더 많은 걸 해 줬는데 실패했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군."
"모종의 세력이 개입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모종의 세력? 보고해 보게."
"문두스라는 이름을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문두스?"
원탁에 앉은 복면인들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최근 등장한 정보 조직입니다. 모종의 세력이 문두스를 휘하에 두고 우리 일을 방해한 걸로 보입니다."
"하면 일단 문두스부터 정리를 하면 되겠군."
"당장은 어렵습니다."
"어렵다?"
"너무 비밀이 많은 조직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정말로 정보 조직인지조차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것인가?"
복면인의 날카로운 질문에 깁스 남작은 빙긋 웃었다. 상당한 여유가 엿보였다.
"문두스가 대단한 조직이라고 해야겠지요. 원하신다면 언제든 이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의향이 있습니다."
깁스 남작의 자신만만한 말에 복면인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더 자극해 봐야 소용없었다. 현재 깁스 남작보다 더 이 조직의 실무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문두스의 드러난 부분에 감시를 붙였습니다. 일단 차근차근 뒤를 캐서 수뇌부를 잡은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깁스 남작의 말에 수긍했다. 그들이 들어도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들에게는 다른 세력을 정리하는 것 외에도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 뒤로 각 왕국의 상황이 계속 보고되었다. 대부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는 음모는 대부분 이들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다. 깁스 남작은 그 실무를 담당하며 대륙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녔다.
그의 이동은 텔레포트 게이트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이미 텔레포트 게이트도 이들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정보도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보내질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란체 왕국 테페룸 광산에 관한 보고입니다."
다들 눈을 빛냈다. 이것이 이번 보고 중 가장 중요했다. 최근 그쪽에서 좋지 않은 일이 계속 벌어진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일단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실패입니다."
"뭣이!"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만큼 이번 일의 실패는 파장이 컸다.
"하면 우리의 연구와 조사가 틀렸다는 뜻인가?"
"처음에는 예측한 대로 진행되는 듯했습니다.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예상과 다르다고? 우리가 제공한 아티팩트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뜻인가?"
"그것이 좀 이상합니다. 아티팩트는 분명히 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그때마다 훌륭한 결과를 보여 줬습니다."
"한데 뭐가 문제인가?"
"아티팩트를 통해 확인한 장소에서 테페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테페룸이 사라져? 하면 그곳에 있던 광맥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기존의 광맥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다만 새로운 광맥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무래도 그 계획은 이쯤에서 폐기해야 할 듯합니다."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다들 복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확인할 순 없지만, 분명히 심상치 않은 얼굴로 인상을 잔뜩 쓰고 있을 것이다.
"그 계획을 폐기하자고? 거기 들어간 돈과 시간이 얼마인데!"
조직의 요원들을 블랙스피어 기사단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몸에 아티팩트를 이식하는 데에만도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다.
한데 그걸 이제 와서 폐기하자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3왕자도 폐기하는 건가?"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제일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니까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을 계속 진행시킨다면 모를까, 폐기한다면 3왕자도 함께 없애는 게 최선이었다.
"아쉽군. 우리가 실질적으로 대륙의 모든 테페룸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결국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테페룸 소모량을 공급이 따라가기 어렵지 않겠나?"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연스럽게 가격이 올라가겠지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테페룸을 무조건 수입할 수밖에 없는 왕국에서야 난리가 날 일이었지만,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써 줄 정도로 이들의 마음은 넓지 않았다.
"그럼 이제 대충 보고가 끝난 셈인가?"
"그렇습니다."
깁스 남작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원탁의 복면인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수는 총 18명이었다. 그리고 각각 엄청난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보고를 보면 에어스트 왕국이라는 곳이 심상치 않아 보이던데,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나?"
"방안을 말씀해 주시면 경청하겠습니다."
"당장은 너무 멀어서 뭔가를 하기 어려우니, 그들의 경제를 무너뜨릴 방안을 찾아보게."
"알겠습니다."
너무 쉽게 말하고 대답했지만 에어스트 왕국은 이제 슈린 왕국을 집어삼켜 제대로 된 규모를 갖췄다. 그런 왕국의 경제를 무너뜨리는 게 결코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말을 하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깁스 남작이나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그들에게는 충분히 그럴 역량이 있었으니까.
"대충 끝난 것 같군. 이제 돌아가도 좋네."
깁스 남작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간 뒤에도 방 안에서는 한동안 회의가 계속되었다. 깁스 남작이 비록 실무를 모두 담당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계획이나 지원에 대한 건 이들의 허가나 힘이 개입되지 않으면 실행이 불가능했다.
회의는 끝없이 이어졌다. 서로의 이익이 첨예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누구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 ☆ ☆
란체 왕국이 발칵 뒤집혔다. 3왕자가 테라스에서 티타임을 즐기다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떨어져서 즉사한 것이다.
3왕자의 방은 궁에서도 제법 높은 곳에 위치했기에 다들 그 죽음에 대해 수긍했다.
최근 영향력을 엄청난 기세로 늘려 차기 왕권에 가장 가까운 세 사람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리니 3왕자에게 줄을 댔던 귀족들이 갑자기 붕 떠 버렸다.
그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서둘러 새로운 줄을 찾아 분주히 움직였다. 치열한 눈치작전이 펼쳐졌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높은 쪽에 붙어야 향후 살아남을 확률도 올라가고, 또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에도 지장이 없다.
차기 국왕으로 유력시되는 사람은 1왕자와 왕의 동생인 쉘터 대공이 있었다.
3왕자에게서 떨어져 나온 귀족들은 1왕자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1왕자에게는 란체 왕국의 소드 마스터인 샤프트 폰 슈베르트가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존재는 상당히 크다. 소드 마스터가 가진 힘도 문제였지만, 그 상징성이 훨씬 대단했다. 그걸 보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기사들이 부지기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