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1/217)

Chapter 1 테페룸 광산 2 (2)

제론의 그림자에서 스키아가 불쑥 튀어나왔다.

스키아는 제론과 시야와 청각을 공유한다. 그것만 보면 마티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지만, 스키아는 마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일단 스키아를 통해 약하지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각과 청각 외에 다른 감각도 약하지만 공유가 가능했다.

스키아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거침없이 질주했다. 제론은 스키아와 공유된 감각에 집중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럴 때 자신의 감각은 되도록 죽여 두는 편이 스키아에게 더 힘을 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완전히 감각을 닫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다가오거나 사고라도 생기면 곤란했으니까.

극히 일부의 감각만 열어 두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웬만한 상황은 바로 대처할 수 있었다. 제론과 같은 경지의 소드 마스터가 다가오지 않는 한 말이다.

스키아는 석판이 있는 막사 안에서 다시 불쑥 튀어나왔다. 스키아가 나온 자리는 막사의 구석진 곳이었다. 막사 한가운데에는 휴대용 마법등이 매달려 있었다. 페쿠니아 상단에서 판매하는 마법등이었다.

'여기까지 마법등이 퍼진 걸 보니 돈도 제법 벌었겠군.'

마법등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원래 제론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바이스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자동으로 마법등을 제작하는 공장을 짓는 중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폭발적으로 마법등의 수요가 늘어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적어도 제론이 마법등을 제작하던 시기에는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바이스에게 제작이 넘어갈 즈음,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결국 바이스는 자신의 마법 연구 자체가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제론을 찾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마법등 제조 공장이었다. 그 공장은 현재 에어스트 왕국의 수도 바깥쪽에 세워지는 중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수도는 상당히 거대했지만, 수도 안에는 되도록 그런 시설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서 심지어는 기간트 공장도 수도 밖에 만들었다. 수도를 중심으로 수많은 공장들이 빙 둘러싼 구조였다.

어떻게 보면 방어에 취약할 수도 있지만 그건 보통의 왕국에 해당하는 얘기였다. 에어스트 왕국에는 다른 어떤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 심오한 마법 기술이 있었다.

아무튼 마법등이 만들어 낸 빛 때문에 막사 안에는 그림자가 많지 않았다. 물론 스키아에게는 그런 제약에 거의 의미가 없었다.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지 않는 한 말이다.

제론은 스키아의 시선을 통해 마법진을 쳐다봤다. 그리고 마법진 주위에 흐르는 마나를 파악해 나갔다.

마나의 흐름을 통해 확인하니, 다른 마법진은 석판 내부가 아니라 바닥에 있었다. 석판 내부는 꽉 채워져 있었다.

하긴, 석판 속을 파내고 마법진을 새기려면 엄청나게 힘들고 실패 확률이 높았다. 고작 신호만 보내는 마법진을 그렇게 어렵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제론은 스키아를 통해 마법진을 완벽하게 분석했다.

이 마법진은 몇 가지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신호를 소리와 빛으로 표현하는 아주 단순한 마법진이었다.

이걸 훨씬 복잡하게 만들면 통신 마법이 된다. 하지만 이런 거점에 굳이 통신 마법이 담긴 아티팩트를 비치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엄청나게 비싼 아티팩트였다.

아무리 테페룸 광산에서 돈이 많이 나온다고 해도 굳이 쓸데없이 그런 돈을 왜 쓰겠는가. 신호만 보내도 충분한데 말이다.

마법진을 분석하면서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다. 이 마법진에 대응하는 다른 마법진의 위치도 몽땅 알아냈다. 물론 마티를 이용해도 찾아낼 수 있겠지만, 이렇게 단번에 확인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거점이 50개나 되는군. 많이도 모아 뒀다.'

그만큼 이곳 테페룸 광산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마법 신호를 주고받는 곳은 광산 근처의 거점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주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도 그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마법진에서 주고받는 모든 신호를 어딘가로 보내고 있었다.

제론은 눈을 떴다. 그리고 태블릿을 꺼냈다. 그 지점을 확인하려면 마티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거리가 멀어서 스키아로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스키아를 그곳으로 이동시킬 생각도 없었다.

스키아는 지금 이곳에서 할 일이 있었다. 마법진을 조작해서 신호를 보내야만 했다. 테페룸 광산에 침입자가 발생했다는 신호를 말이다.

마티를 조작해 마법진이 신호를 보내는 장소를 확인한 제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곳은 나헤 영지의 텔레포트 게이트였다. 테페룸 광산에서 가장 가까운 영지가 바로 나헤 영지였다.

'왜 텔레포트 게이트로 가는 거지?'

제론은 의문을 잠시 접고서 다시 한 번 마법진을 살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걸 란체 왕국에서 만들었다고? 불가능한데?'

석판에 새겨진 마법진은 아주 단순했다. 그저 몇 가지 신호만 미리 연결된 마법진과 주고받는 것이니 단순한 게 당연했다.

원래 저 정도 크기의 석판이라면 한 면을 다 쓸 필요도 없었다. 한데도 그에 비해 마법진이 복잡한 이유는 저 안에 마나스톤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석판은 특별한 마법진을 이용해 주변 마나를 흡수했다. 물론 일정량 이상을 보관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신호를 보내는 마법진을 발동시킬 정도는 충분했다.

'이건 고대에나 있었던 마법인데?'

물론 초고대에는 훨씬 월등한 마법 이론이 존재했다. 제론이 만든 마법등에 쓰인 마법이 바로 그러했다.

원래 일반적인 마법등에는 마나스톤이 들어간다. 그래서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론의 마법등은 마나를 충전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마나스톤 없이 마법진과 마법등의 구조만으로 마나를 저장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충전이 필요 없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법등을 만들 때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야 지속적인 수익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마나스톤이 없이 구동하는 마법 물품은 엄청나게 만들기 어렵다. 그뿐 아니라 고도의 마법 지식이 없으면 흉내도 내기 힘들었다.

한데 그런 대단한 지식이 깃든 마법 물품을 란체 왕국에서 만들었을 리 없었다. 란체 왕국은 검을 훨씬 숭상한다. 당연히 다른 왕국에 비해 마법이 조금 뒤떨어졌다.

기간트를 만드는 것보다는 그걸 사서 쓰는 쪽을 훨씬 선호하는 왕국이었다.

제론은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크란 제국 마탑에서 석판을 제공한 것이다. 아마 상당한 대가를 받았을 것이다. 물론 다른 마탑이나 상단이 제시한 가격보다야 훨씬 저렴했을 것이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야.'

크란 제국 마탑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서도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아마 바인의 문두스를 제외하면 전 대륙의 정보를 가장 많이 쥐고 있는 곳이 바로 크란 제국 마탑일 것이다.

제론은 스키아를 통해 마법진이 새겨진 석판에 특별한 조작을 가했다. 크란 제국 마탑이 뭘 하든 이제 진짜 일을 시작할 때였다.

50개의 석판이 모두 마법진을 통해 연결되어 있기에 그중 하나만 건드려서 다른 모든 석판을 조작하는 것도 가능했다. 스키아를 통해 마나를 흘려보내고 그 흐름을 비틀면 되는 일이라서 간단치는 않지만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석판의 마법진은 몇 가지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하나는 적의 습격에 대한 신호였다. 적이 광산을 습격하면 붉은빛을 내뿜고, 다른 거점을 습격하면 푸른빛을 내뿜는다.

두 번째는 그저 침입자가 있을 때였다. 침입자가 발견되었다는 신호는 하얀빛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해제되면 보라색 빛이 나온다.

당연히 모든 신호는 소리와 함께 나오게 되어 있었다. 제법 큰 소리였기 때문에 혹시라도 막사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충분히 모두 알 수 있었다.

일단 제론은 날이 다시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 유적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강한 빛이 나오는데, 그걸 조금이라도 가리려면 환한 대낮이 좋았다.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제론은 기다리는 동안 3왕자는 물론이고 이곳 마법진이 연결된 텔레포트 게이트의 상황을 유심히 살폈다.

특별한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듯했다.

이내 날이 밝았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하루 중 가장 밝은 시간이 된 것이다.

제론은 화끈하게 가기로 했다.

50개 석판이 일제히 붉은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날카로운 소리를 토해 냈다.

삐이이이이이익!

막사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이럴 때의 메뉴얼은 딱 정해져 있었다. 모든 블랙스피어 기사단이 모여 광산으로 달려갔다.

거점에 남은 건 혹시 다른 소식이 올지 몰라 기다리는 사람과 거점 자체를 방비할 최소한의 인원뿐이었다. 그게 모두 합해 4명이었다.

거점 규모가 제법 되기 때문에 4명은 제론 입장에서는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제론은 유유히 거점으로 다가갔다. 마법진이 있는 막사 안에 2명이 대기했고, 나머지 2명은 거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순찰을 했다.

그 두 사람의 눈을 피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제론은 두 사람이 막사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 순간 팔찌에 아네모스를 넣었다.

화아악!

강렬한 빛이 제론을 휘감았다. 시야도 가려진 마당에 환한 대낮이었기에 그런 빛이 나타났는지 경계하는 기사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제론은 아무도 모르게 유적으로 들어갔다. 일단 다른 곳은 몰라도 란체 왕국 내에서는 폴타를 이용하면 어디든 갈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나가서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행동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유적의 로비는 역시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이 유적은 총 20층이었다.

제론은 일단 최하층의 통제실로 향했다.

통제실에 도착한 제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상을 했지만 실제로 이곳에서 테페룸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환호성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이제 더 이상 테페룸 때문에 고민하고 고생할 이유가 없었다. 더불어 테페룸을 가공해서 만들어야 하는 포로스의 수급에 대한 문제도 깨끗이 해결되었다.

이 유적은 완전히 테페룸의 제조에 관한 유적이었다. 그래서 마티조차 없었다.

사실 마티가 필요 없기도 했다. 어차피 란체 왕국 수도에 있는 마티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거점 형식의 유적에 있는 마티까지 하면 란체 왕국에는 충분한 마티가 돌아다니는 셈이었다.

이 유적도 다른 유적과 마찬가지로 생활 시설과 수련실이 19층과 18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17층부터 6층까지가 오로지 테페룸의 제조에 관계된 시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이곳 유적 역시 각 층의 높이나 크기가 다른 유적보다 훨씬 컸다. 테페룸을 만들기 위한 것이니 이 정도 규모도 사실 작다고 할 수 있었다.

5층부터 1층까지가 완성된 테페룸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테페룸 광산은 바로 그 부분에 문제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유적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주인이 각인되어야 한다. 그렇게 등록된 다음에야 제대로 작동을 한다. 하지만 주인이 사라진 경우에도 유적이 계속 작동을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주인이 인위적으로 시스템을 멈추지 않는 한, 유적은 계속해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만 년 전, 지나치게 오랜 세월로 인해 시스템이 중지되는 바람에 멈춰 버렸다. 즉, 그 이전까지는 계속 유적이 작동했다는 뜻이었다.

고대문명의 마지막은 대략 천 년 전으로 추정된다. 당연히 초고대문명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었다.

그렇게 수만 년이 지났는데, 유적 시스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적에는 자가 복구 시스템이 있었다. 스스로 고장을 고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테페룸 광산은 그 자가 복구 시스템에 이상이 생겼다. 다른 유적과 달리 테페룸을 잔뜩 보관하고 있기에 벌어진 문제였다.

유적에 보관된 테페룸은 액체 형태였다. 그것이 다음 가공을 위해 편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보관했다. 문제는 유적을 통제하지 않아 테페룸을 끝없이 만들어 냈다는 점이었다.

테페룸에 들어가는 재료는 거의 없었다. 세상의 마나를 끌어모아서 만든 것이 바로 테페룸이었다. 물론 다른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긴 하지만 그건 극히 미미한 양이었다.

그리고 그 특별한 재료 자체도 주변의 암석이나 흙을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곳의 테페룸 제조 시스템이었다.

원래 보관소가 꽉 차면 제조를 중단해야 하는데, 보관소에 문제가 생겼다. 누출이 일어난 것이다.

액체가 누출되면서 보관 상태가 깨지니 고체로 굳어졌고, 그것이 퍼지면서 광맥이 만들어진 것이다.

누출이 되면서 보관소에 빈공간이 생겼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그렇게 엄청난 세월에 걸쳐 외부로 테페룸이 흘러나갔다.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시스템이 중지될 때까지 쌓인 테페룸이 광맥으로 만들어져 지상으로 뻗어 나갔고, 그중 하나가 란체 왕국의 테페룸 광산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3왕자와 연관되어 비밀 조직의 물망에 오른 또 다른 테페룸 광산의 후보지 4곳이 바로 나머지 보관함에서 비롯된 광맥이었다.

그 4곳의 매장량도 다른 곳과 비슷했다. 다만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아서 발견이 쉽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거길 찾아낸 걸 보면 비밀 조직의 능력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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