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유적 순회 (3)
조금 걸어가니 커다란 광장이 있었다. 그 광장 안에 사람이 꽉 차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다들 얼굴이 흥분으로 상기된 채 발을 구르며 환호성을 내질러댔다.
제론은 그들의 가장 뒤에서 주변을 살폈다. 광장을 둘러싼 모든 건물에서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광장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일을 구경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굉장한 열기였다. 고작 대결에 이렇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니 살짝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이들 특유의 문화일 테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일단 어떤 사람들이 대결을 하는지 한번 볼까?"
제론은 광장 한가운데를 확인하기 위해 발 디딜 곳을 찾아봤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바닥을 잘 다지지 못해서 튀어나온 약간 높은 돌 하나가 보였다.
"저거면 되겠군."
그 돌 위에 올라간 제론은 시야가 살짝 높아졌고, 그것만으로도 광장 한가운데를 볼 수 있었다. 워낙 시력이 뛰어났기에 대결을 위해 대치한 두 사내의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다 확인이 가능했다.
두 사람의 대치는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하고서는 계속 기다렸다.
제론은 그 점이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저마다 손에 종이 쪼가리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오자마자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는데, 누구도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짜증 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환한 표정을 지으며 반겼다.
"도박인가?"
제론이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의 가슴에는 7개의 창이 방패에 얽힌 황금빛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란체 왕실 소속이라는 뜻이었다.
"왕실이 직접 나서서 도박판을 벌이는 건가?"
제론에게도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왔다. 제론은 도박에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모두 하는데 혼자 안 하면 이상하게 보일 테니 어쩔 수 없이 돈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통 얼마의 돈을 거는지 확인했기에 딱 적당한 수준의 돈을 걸 수 있었다. 물론 승패는 전혀 상관없었으니 아무 데나 걸었다.
검은 옷의 사내가 멀어지자, 제론은 다시 광장 한가운데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무슨 일인지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그냥 느닷없이 결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내면의 이유까지 다 알아야 결투에 흥미가 생기지 않겠는가.
두 사내는 허리춤의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쪽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느라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고, 다른 한쪽은 빙글빙글 웃음이 감도는 표정이었다.
"감히…… 감히 내 아내를 욕보여? 네놈이 그러고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욕보이긴 누가 욕보였다는 거지? 우린 서로 즐긴 거라고. 라비네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더 얘기해 줘야 돼?"
"닥쳐라!"
얼굴이 일그러진 사내가 검을 꽉 쥐었다. 이제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왕국법 때문에 신호가 떨어지기 전까지 참아야만 했다.
"두 분, 준비는 되셨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검은 옷의 사내가 다가와 물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죠. 동의에 의한 결투이기 때문에 반드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두 사람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인상을 쓰거나 미소를 짓고 있던 표정이 대번에 가라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시작!"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외침이 떨어짐과 동시에 두 사람이 몸을 날리며 검을 뽑았다.
쩡!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두 개의 검이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였다.
채채채채채채챙!
화려한 검술이 펼쳐졌다. 마치 쇼를 보는 듯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론은 나직이 감탄했다.
"호오."
검술 자체가 달랐다. 역시 란체 왕국이었다. 기사와 검을 숭상하는 나라다웠다.
마나를 쓰는 법은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지만, 검술 자체가 워낙 뛰어나서 웬만한 사람은 아무리 경지에 차이가 있어도 상대가 어려울 듯했다.
물론 소드 마스터가 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마나로 인해 신체 능력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고, 마나를 쓰는 능력도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기서 소드 마스터는 현재 기준의 소드 마스터, 즉, 제론 기준의 익스퍼트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 단계라면 웬만해서는 저 둘을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와아아아아!"
사방에서 열광적인 함성이 울렸다. 둘의 싸움이 격렬해질수록 함성은 더 커졌다. 사람들이 흥분했다. 여기서 피를 보면 아마 더 흥분할 것이다.
제론은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이길지 대충 감이 왔다. 빙글빙글 웃던 사내가 한 수 위였다. 게다가 인상을 쓴 사내는 흥분해서 계속 미묘하게 타이밍이 어긋나고 있었다.
아마 당장 본인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이런 경우 파탄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왠지 처음 인상을 쓰던 사내가 마음에 걸렸다. 딱 드러난 대화를 통한 정황만으로는 빙글빙글 웃던 사내가 남의 아내를 탐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그 이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뭔가 더 복잡한 사정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제론은 당장이라도 개입해서 승패를 뒤집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었다.
'더구나 남의 일이잖아. 내가 나서서 상황을 바꿀 자격이 있을까?'
제론이 망설이는 사이 인상을 쓴 사내 쪽이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둘 다 익스퍼트였기에 온몸이 마나로 꽉 차 있었다. 그 마나가 자연스럽게 흘러 검에 맺힌 상태였는데, 그로 인해 푸른 섬광이 연신 번득였다.
잠시 고민하던 제론은 이내 피식 웃었다. 자신이 언제부터 남을 그렇게 생각했단 말인가. 지금까지 마음 내키는 대로 해 오지 않았던가.
지금도 그랬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설사 그 때문에 저 재수 없게 웃던 사내가 목숨을 잃더라도 말이다.
'아, 그 때문이었나?'
제론은 문득 자신이 저 웃는 얼굴의 사내에게 불쾌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웃음이 너무 재수가 없었다.
왜 그런지는 명확했다. 저 웃음은 예전 제론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직전 파인트가 보여 준 웃음과 똑같았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고, 상대적으로 인상을 쓴 사내에게 더 마음이 갔던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확고히 정해진 걸 깨달은 제론은 가차 없이 손을 썼다. 마음에 앙금이 남으면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는 데 방해가 된다.
신중하되, 마음이 자유롭게 해 줘야 한다. 움직이려는 마음을 억지로 잡아선 안 된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어려웠다.
제론의 손에서 마나 덩어리가 나왔다.
슉!
어린아이 주먹만 한 마나 덩어리였는데,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마나를 수련한 사람이라도 그걸 느끼지는 못했다. 제론이 그렇게 만들었다.
소드 마스터인 제론에게 그 정도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마나 덩어리가 너울너울 날아서 결투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재수 없는 미소를 지은 사내의 발밑에 자리를 잡았다.
"헉!"
웃는 얼굴의 사내가 헛숨을 들이켰다. 순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깨끗이 사라졌다. 대신 당황함이 그 자리에 들어찼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모든 것이 한순간의 일이었다.
인상을 쓴 사내의 얼굴이 더욱 크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의 검이 그대로 앞으로 뻗어 나갔다.
푸욱!
검이 오른쪽 가슴을 그대로 꿰뚫었다.
푸슉!
다시 검이 뽑혀 나왔다. 인상을 쓴 사내가 뒤로 툭툭 스텝을 밟으며 물러났다.
재수 없는 미소의 사내에게 더 이상의 웃음은 없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한 손으로는 가슴에 뚫린 구멍을 막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억지로 검을 들어 겨눴다.
하지만 그의 검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떨리고 있었다. 검을 든 손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그제야 인상을 쓴 사내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가 시선을 돌려 한쪽에 서 있는 검은 옷의 사내를 바라봤다.
검은 옷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피를 볼 거면 확실히 봐야만 한다. 그것이 이런 대결을 왕국 차원에서 진행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인상을 쓴 사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승패가 났다. 상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이거면 충분했다. 상대는 천벌을 받았다.
"더 움직이지 않으면 무승부로 처리됩니다."
"상관없소."
무승부든 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갑자기 이런 대결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큭큭큭큭, 운 좋은 놈.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고작 너 따위의 실력으로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웃기지 마!"
피투성이가 된 사내가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검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신에 새까만 문양이 나타났다.
그 문양을 본 제론의 안색이 변했다.
"저 미친놈!"
제론은 그 즉시 몸을 날렸다. 더 볼 것도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마법을 펼쳤다.
샤아아아아.
제론을 중심으로 짙은 안개가 퍼져 나갔다. 안개는 주로 제론 근처에 몰려 있어서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지 않으면 식별이 잘 되지 않았다.
제론이 대결을 위해 만들어진 공터에 뛰어 들었을 때, 붉은 검에 그려진 문양이 핏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이었다. 만일 그 폭발에 기간트가 휘말리면 제법 대단한 타격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거대한 불꽃의 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구경꾼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멀쩡히 대결을 구경하며 도박을 하다가 불꽃을 뒤집어쓴 것이다.
그와 대결을 하던 사내, 포어트는 갑자기 자신을 덮치는 불꽃의 파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허망하고 삶의 의욕이 사라졌었는데, 저 불꽃을 보니 살고 싶은 생존의 욕구가 온몸을 지배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걸 어떻게 피한단 말인가. 포어트의 눈에 불꽃에 휩싸이는 검은 옷의 사내들이 보였다.
그렇게 불꽃에 뒤덮이는 순간, 포어트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어?"
포어트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나타난 사내가 검을 한 번 옆으로 쭉 긋는 순간 불꽃의 파도가 둘로 갈라져 버린 것이다.
대체 어떻게 저런 검격이 가능하단 말인가. 만일 자신이 저런 검격을 날릴 수 있게 된다면 영혼이라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포어트는 더 길게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불꽃을 가른 사내, 제론이 순식간에 그에게 다가와 허리를 낚아채며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불꽃의 권역에서 벗어났다.
포어트는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발 아래로 지나가는 거대한 불꽃의 해일을 바라봤다.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근처 건물의 옥상에 가볍게 내려섰다.
"대,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포어트는 눈앞의 사내에게 결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작 2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뭔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만드는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제론은 포어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재수 없게 웃는 사내가 싫어서 상대적으로 포어트에게 마음이 쓰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보니 그게 아니었다.
포어트에게서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이 풍기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유적!'
포어트에게서 풍기는 느낌은 아주 약하긴 하지만 초고대유적에서 흘러나오는 것과 동일한 느낌이었다. 저 느낌을 감지해서 초고대유적을 찾은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인간에게서 저런 느낌이 나는 거지?'
제론은 조금 더 유심히 포어트를 살폈다. 그리고 그가 풍기는 느낌이 어디에서 오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았다.
'그냥 온몸으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 같은데?'
몸속에 에너지의 원천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대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포어트는 그저 온몸이 에너지의 표출구일 뿐이었다. 몸에 에너지가 배어 있었다. 그렇게밖에 설명이 불가능했다.
"누구십니까?"
포어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제론이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으니 너무나 답답했다. 대체 자신을 왜 구했는지, 또 그 어마어마한 검격은 어떻게 하는 건지, 전부 궁금했다.
"일단은 널 구해 준 사람이라고 해야겠지."
제론의 말에 포어트의 표정이 굳었다.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았다. 어찌 되었건 제론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 엄청난 불꽃의 폭풍 속에서 말이다.
"감사합니다."
포어트는 일단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번득이는 눈으로 다시 제론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