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8/217)

Chapter 8 유적 순회 (2)

제론은 완전히 작정을 하고 움직였다. 일단 주변국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전 대륙의 유적을 등록할 계획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드러나지 않은 유적을 발견하게 되면 더 좋았다.

사실 상당히 많은 유적이 발견되긴 했지만 모든 유적이 다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에도 고대유적과 연결되지 않은 초고대문명의 유적뿐만 아니라, 새로운 고대유적까지 발견하지 않았던가.

제론은 태블릿을 꺼냈다. 그리고 유적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띄웠다.

손가락을 슥슥 놀려 제론이 소유한 유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유적을 먼저 찾았다. 그다음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가장 빠를지 동선을 그려 봤다.

어차피 이동은 날아서 갈 것이다. 푸르투나를 부르고 마법까지 쓰면 빠르게 날아가는 건 아주 간단했다.

날아다니는 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달려가면 된다. 제론은 그 어떤 말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동선을 짜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저 직선으로 쭉쭉 긋기만 하면 끝이었다. 다만 겹치지 않게 가장 짧은 거리를 만드는 것이 조금 복잡할 뿐이었다.

바인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토대로 지도에 표시한 유적의 수는 모두 324개나 되었다. 엄청나게 많은 수였다. 하지만 대륙에 있는 왕국의 수를 생각하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다.

다른 왕국도 레늄 왕국만큼이나 많은 유적을 개발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가 유적을 관광지로 만들었다.

관광지가 된 유적의 경우는 방문이 간단했다. 다만 사람이 없는 틈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그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밤에 방문하면 되니까. 모든 유적이 레늄 왕국의 수도에 있던 유적처럼 밤의 경비가 촘촘하진 않을 것 아닌가.

"그나저나 크란 제국 쪽은 거의 없군."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크란 제국은 다른 왕국 10개를 합한 넓이였다.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한데 그 넓은 영토에 공개된 유적이 딱 세 군데뿐이었다. 그나마도 관광지가 아니었다.

어쩌면 방문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도 초창기에 발견된 유적들이네. 즉, 처음이라서 정보 차단이 안 되었다는 뜻인가?"

크란 제국이 유적 발굴을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아마 그 어느 왕국보다 더 많은 유적을 찾아냈을 것이다. 한데도 그것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는 건 유적에 대한 모든 정보를 차단했다는 뜻이었다.

"대체 왜?"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유적이라는 건 보통 유물을 발굴하고 나면 끝이었다. 남은 건 관광지로 개발해서 유동 인구를 늘리고 돈을 버는 정도였다.

한데 크란 제국은 그런 것조차 하지 않았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확실히 알아봐야겠군."

제론은 왠지 크란 제국이 계속 껄끄러웠다. 이유를 딱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크란 제국만 떠올리면 뭔가 가슴에 턱 걸려 내려가지 않는 것 같았다.

이번에 유적 순회를 하면서 크란 제국에 있는 테페룸 광산도 알아봐야 했으니 어차피 크란 제국에 가 보긴 할 것이다.

물론 그건 나머지 왕국의 유적을 싹 훑어서 모든 마티를 장악한 다음의 일이었다.

제론은 태블릿을 슥슥 만지며 동선 그리기를 마무리했다. 첫 번째 장소를 정한 제론은 곧장 날아갔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이 일은 최대한 빨리 끝낼수록 유리했다.

사실 지금까지는 다른 왕국의 유적을 몽땅 개발할 필요나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랐다.

'앞으로는 전 대륙의 동향을 잘 살펴야 돼.'

제론의 가슴에 자리한 웅심이 점차 크게 자라났다. 지금까지는 복수를 생각하면서 달려왔지만 이제부터는 새로운 목표를 세워야 할 때가 되었다.

물론 아직 복수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슈린 가문의 뒤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에어스트 가문을 무너뜨린 배후를 찾아 응징해야 진짜 복수가 끝난다.

하지만 그건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할 일이었다. 그걸 위해서는 더 힘을 크게 키워야만 했다. 제론은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를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아니면 대륙을 완전히 통일해 버리거나.

☆ ☆ ☆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겠군."

제론은 유적에 마련된 숙박 시설을 이용하기로 했다. 벌써 100개가 넘는 유적을 연결시켰다. 당연히 시간도 오래 걸렸고, 얻은 것도 많았다.

현재 제론은 란체 왕국에 있었다. 란체 왕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발굴된 유적의 수가 적은 편이었다. 땅은 제법 넓은데 유적의 수는 레늄 왕국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란체 왕국은 유적 발굴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병사나 기사의 훈련이나, 라이더의 훈련에 훨씬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란체 왕국의 라이더는 실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란체 왕국을 강국으로 이끌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유적 발굴 같은 일에 전력을 기울이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동안 발견된 유적들도 상당히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에 발견된 유적이 하나 있었는데, 그나마도 디아만트 상단이 나서서 발굴을 진행했다. 왕국에서는 아예 지원을 하지 않았다. 물론 발굴에 따른 세금은 부과했다.

그런 식이니 란체 왕국에서 유적을 발굴하려는 사람이 많을 리 없었다. 실제로 디아만트 상단의 경우 유적을 발굴해서 왕국에 세금을 내고, 또 유적이 위치한 영지에도 세금을 내야만 했다.

당연히 지원은 하나도 못 받았고 말이다. 웬만한 유적이었다면 아마 큰 손해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디아만트 상단이 발굴한 유적은 상당히 규모가 커서 제법 이득을 많이 봤다.

결과적으로는 이득을 보고, 유적의 소유권도 일정 부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 처음 시작할 때는 도박에 가까운 투자라고 상단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디아만트 상단이 그럴 정도인데, 다른 상단이나 투자자는 오죽하겠는가. 그러니 란체 왕국에 발굴된 유적이 많을 리 없었다.

"이제 란체 왕국에 남은 유적이 4개인가?"

제론은 태블릿을 꺼내 란체 왕국의 유적 부분을 다시 확인했다. 그동안 유적을 찾으면서도 바인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유적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새 유적을 등록할 때마다 마티의 수와 범위가 늘어나면서 바인이 확인하고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점점 많아졌기 때문에 훨씬 깊이 있는 보고가 가능해졌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유적에 대한 정보가 들어와 있는 경우도 있었다.

가끔 제론은 과연 바인이 잠은 제대로 자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었다. 바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보를 모으고 정리해 제론에게 보내 주었다.

이제 대륙 최고의 정보 조직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 물론 그 안에서 크란 제국은 빠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크란 제국의 유적을 등록시키지 않더라도 제국의 정보를 전혀 얻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른 왕국의 정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많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란체 왕국 유적에 대한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것도 그런 것 때문이었다. 다른 지역의 정보를 토대로 새로운 지역의 유적을 찾아낼 가능성이 높았다.

꼭 크고 유물이 많은 유적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이 유적만 달랑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규모도 아주 작고 말이다.

그런 경우 관광지로 활용하기에도 애매할 때가 많아서 버려지고 방치될 수도 있었다. 그런 유적에 대한 정보는 그 지역에 정통하지 않으면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바인은 주변 정보를 이용해 귀신같이 그런 유적을 찾아냈다. 그래서 처음 태블릿의 지도에 표시했던 유적의 수보다 지금이 훨씬 많았다.

오늘 란체 왕국에서 찾은 유적도 사실은 그런 유적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이 동굴에 기묘한 문양만 잔뜩 있는 유적이었는데, 그 문양이 고대에 쓰던 암호문의 일종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제론은 여러 가지 정보와 초고대문명의 지식을 토대로 그걸 알아낼 수 있었다. 이곳은 고대에 암살자들의 본거지 같은 장소였다.

그런 장소에 에너지가 많이 필요할 리 없었다. 그러니 이 유적에 연결된 초고대유적도 그리 크지 않았다. 마티의 수도 적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정보 수집 범위가 제법 넓은 편이었고, 근처에 영지들이 걸쳐 있어서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쓸모가 많은 유적을 찾은 셈이었다.

초고대유적의 숙박 시설은 상당히 훌륭했다. 잠자리도 편했고, 먹고 씻고 하는 것도 거의 자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별로 몸을 움직일 일이 없었다.

게다가 수련장도 붙어 있어서 몸을 풀기도 좋았다. 이래저래 웬만한 호텔보다 훨씬 좋았다.

다만 음식 자체가 영양만 생각하는 간단한 것이었기에 맛을 느끼거나 즐기는 부분은 많이 모자랐다. 술도 없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제론도 사람이 그리워지면 인근 도시로 가서 하루쯤 자곤 했다. 오늘은 유적에서 잤지만 내일이나 모레쯤은 란체 왕국의 수도에 가서 사람 구경이라도 좀 할 계획이었다.

더불어 수도 근처에 있는 유적도 방문하고 말이다.

제론은 간단하게 내일의 계획을 세운 뒤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는 수면을 돕고 피로회복을 돕는 마법이 새겨져 있었기에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란체 왕국의 수도는 다른 왕국에 비해 화려함이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건물의 모양이나 사람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상당히 강인했다.

제론은 수도에 들어서면서 뭔가 단단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 제론이 아니면 그런 느낌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제론은 도시 전체에 흐르는 기운을 읽을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유적 순회를 하면서 틈틈이 16층 공략도 병행했다. 솔직히 마크리아는 타히티를 얻을 때보다 조금 더 쉬웠다.

마크리아의 능력은 창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이었는데, 그 창에 깃든 능력이 좀 까다로워서 그렇지 아예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제론의 능력이 월등히 올라간 상태라서 그런지 이스히스나 타히티를 얻을 때보다 훨씬 빨리 승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제론은 유적 17층을 공략 중이었다.

"유적 순회를 빨리 끝내고 유적부터 싹 클리어하든가 해야지."

유적 17층을 떠올리니 암담했다. 17층은 16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당연했다. 17층은 조합이었으니까.

16층을 클리어하고 마크리아를 얻은 제론은 곧장 17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큰 절망을 맛봤다.

17층에는 이스히스와 타히티가 함께 등장했다. 그 두 조합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근접은 이스히스가 맡고, 타히티가 원거리에서 저격을 하니 아무리 제론이라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매번 싸우면서 조금씩 경험도 더 쌓았고, 힘도 키울 수 있었다. 지금 제론은 처음 소드 마스터가 되었을 때와 비교해도 몇 배나 더 강해졌다.

아무튼 당분간은 유적 17층을 클리어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물론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유적 순회를 하면서 틈나는 대로 17층 클리어를 위해 노력할 계획이었다.

란체 왕국의 수도를 천천히 걸어가며 제론은 주위를 충분히 살피고 분위기를 느꼈다. 그리고 감각의 날을 예리하게 세웠다.

이런 것 역시 모두 수련의 일환이었다. 눈과 감각의 수련은 평소에 생활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수도라서 그런지 사람은 정말로 많았다. 제론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기억하려 애쓰며 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한 시간쯤 걸어가자, 상당한 번화가에 들어설 수 있었다. 수도 중심가는 아니었고, 평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거리인 듯했다.

제법 큰 호텔도 보였고, 그 주위로 술집도 잔뜩 늘어서 있었다. 제론은 오랜만에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서 그중 하나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꽤 넓은 술집이었는데, 대부분의 테이블이 꽉 차 있었다. 제론은 들어가자마자 안을 슥 둘러보고 곧장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제론은 간단히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는 주변에서 사내들이 떠드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대부분이 음담패설이었고, 나머지는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겪었는지 자랑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제론은 이런 질펀한 분위기가 좋았다. 요즘 너무 사람이 없는 곳으로만 다녀서 그런지 이렇게 사람 냄새가 짙게 나야 뭔가 사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술집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콰앙!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집중되었다. 거기에는 얼굴이 상기된 채 숨을 헐떡이는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겨, 결투다!"

사내의 외침에 술집 안이 온통 환호성으로 가득 차 버렸다.

"우와아!"

"가자!"

제론은 놀란 눈으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술집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심지어는 술을 나르던 점원과 술집 주인까지 사라졌다.

"이게 뭐지?"

제론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피식 웃고는 손에 든 잔을 단번에 쭉 비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대체 왜들 이렇게 열광하는지 구경은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밖으로 나가니 굳이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어디서 대결이 벌어지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건 정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제론도 천천히 그쪽으로 향했다. 굳이 빨리 뛰어갈 필요는 없었다. 어디서건 대결을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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