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유적 순회 (1)
타히티를 얻은 제론은 잠시 로비로 돌아와 몸과 마음을 추스른 다음 곧장 16층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지금은 유적에서 나가 봐야 특별히 제론이 할 일도 없었다.
16층에 도착한 제론은 새로운 기간트가 나타날 거라 기대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잠시 후, 환한 빛과 함께 기간트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회색 기간트였다. 몸은 딱 이스히스와 타히티의 중간이었다. 그리고 긴 창을 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름이 뭐지?"
―마크리아.
"마크리아라…… 창을 쓰는 기간트인가? 조금 색다른데?"
제론은 긴장을 풀고 마크리아를 유심히 살폈다. 어차피 스타일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으니 처음에는 당할 확률이 높았다.
타히티보다 아래층에서 나왔으니 그보다 더 까다로울 확률이 높았다.
쿵! 쿵! 쿵!
마크리아가 천천히 제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창을 들었다.
큐우우웅!
창이 맹렬히 회전하며 제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창이 회전하며 주변 공기와 마나를 잔뜩 휘감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대로 창을 타고 제론에게 쏟아졌다.
제론은 당황했다. 갑자기 주변 마나가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몸속 마나가 비틀렸다. 지극히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콰우우우!
거대한 창이 제론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제론의 시야가 깜깜해졌다.
제론이 다시 눈을 뜬 것은 유적 로비에서였다. 몸은 모두 회복되어 있었다.
"무시무시하군."
불의의 일격에 당해 버렸다. 사실 조금만 더 긴장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창을 조금만 더 미리 피했으면 이렇게 한 방에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예상 외였다. 마크리아가 내지르는 창의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랐고, 또 거기에 담긴 위력도 대단했다. 무엇보다 창보다 먼저 쏟아진 마나의 유동이 가장 큰 문제였다.
순간적이나마 제론의 마나를 묶었으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로 인해 아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방심의 대가가 크군."
솔직히 방심했다. 어차피 당할 거라고 생각한 자체가 문제였다. 평소보다 반응이 찰나지간이지만 느렸다. 그래서 당했다.
물론 앞으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도전할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일단은 말이다.
☆ ☆ ☆
"예?"
엔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인가. 지금 이 시국에 유적 순회라니.
"왜? 내가 꼭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나?"
"그, 그건……."
엔트는 맹렬히 생각했다. 현재 남은 일과 국왕이 반드시 필요한 일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당분간은 왕국 안정에 최대한 힘쓰도록."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유적 순회는……."
"공식적으로 가는 순회가 아니야. 철저히 비공식적인 일이다. 외부로는 내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조차 알려져선 안 돼."
"그건 불가능합니다."
제론이 씨익 웃었다.
"왜?"
"외국의 사신들은 어찌합니까? 현재도 지속적으로 대륙 곳곳의 왕국으로부터 방문 예약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다 거절해. 핑계야 많잖아."
"일단은 그러고 있습니다만, 핑계가 통하지 않는 상대가 요청하면 곤란합니다. 또한 핑계로 미루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
제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유적 순회라고 해서 에어스트 왕국을 무한정 비울 필요가 없었다. 유적을 하나 찾을 때마다 이곳에 와서 얼굴을 비출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럼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하나씩 받아."
엔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건 또 뭐야?"
"하지만 그들은 폐하를 뵙고자 할 텐데……."
"만나면 되지. 혹시라도 내가 없으면 적당한 핑계를 대서 시간을 끌어. 닷새 정도 시간 끄는 건 일도 아니잖아."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정도 시간을 끌면 내가 알아서 올게. 나도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엔트는 정신이 붕괴될 것 같았다. 혼란에 휩싸여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공식적으로 유적 순회를 다닌다는 건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돌아다니겠다는 뜻이다. 그 말인즉슨,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한데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닷새 안에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언제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 슈린 왕국은 어쩌고 있지?"
"붕괴되기 일보직전입니다."
결국 슈린 왕국은 5천만 골드를 지급하지 못했다. 동분서주해서 모은 돈이 고작 3천만 골드였다.
사실 귀족들이 개인 재산을 탈탈 털었으면 어떻게든 5천만 골드는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슈린 왕국이 끝났다고 판단했다. 앞으로는 어디로 어떻게 선을 대고 살아남느냐가 관건인 시대였다. 그러니 최대한 돈을 잘 쟁여 놔야만 했다.
물론 제론과 에어스트 왕국의 수뇌부는 그들이 그렇게 움직일 거라고 모두 판단했다.
"유예 기간을 준 건 아니겠지?"
"달라고 하는 걸 칼같이 잘랐습니다."
"잘했어. 그럼 슬슬 움직여도 되겠군."
엔트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슈린 왕국을 접수해. 귀족들의 재산은 싹 몰수해 버리고. 반항하면 가차 없이 처단해. 일말의 여지도 주지 마. 제대로 밟아 놔야 나중에 안정시키기도 편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제론이 턱을 쓰다듬으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슈린 왕국 귀족들 재산을 싹 압수하면 제법 돈이 크겠군."
"물론입니다. 당분간 예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아, 한데 디아만트 후작가는 어떻게 할까요?"
디아만트 후작가는 중립이었지만 영지 자체가 슈린 왕국 내에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들이 가진 힘이 워낙 대단해서 슈린 왕국에서도 결코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배상금 정도는 디아만트 후작가에서 뜯어냈을 것이다.
"차별할 필요 없어. 알아서 먼저 피하거나 손을 내밀어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엔트는 제론의 말에 그렇게 대답하며 눈을 빛냈다. 디아만트 후작가가 과연 어떻게 나올지 참으로 궁금해졌다. 분명히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짝짝!
제론이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전환했다. 엔트가 긴장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자, 이제 다 끝났지? 혹시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바이스한테 도움 요청하고."
바이스는 엔트를 총관으로 임명한 순간부터 마탑에 들어가 마법 연구에 몸을 담갔다. 그 뒤로 마탑에서 한 번도 안 나왔으니 얼마나 지독하게 연구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문두스라면 이미 인수인계를 받았습니다."
"그래? 하긴 그걸 인수인계하지 않으면 마법 연구에 매진하기 힘들지."
제론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걸 보는 엔트의 시선이 살짝 묘해졌다.
"그런 중요한 일을 폐하께 상의도 드리지 않고 처리했는데 괜찮으십니까?"
"중요하니까 처리한 건데 뭐가 어때서? 문두스와 연결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는데 잘됐군. 앞으로는 문두스와 긴밀히 연계해서 일을 처리해. 겪어 보면 알겠지만 그쪽도 상당하거든."
"이미 겪어 봤습니다. 솔직히 제가 이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엔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스스로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자신만만했다.
에어스트 백작가의 총관 정도야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에어스트 왕국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에어스트 왕국은 규모가 크지 않으니 처리할 일도, 또 신경 쓸 일도 많지 않았다.
한데 이제는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슈린 왕국과의 전쟁에서 이겼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전력이 강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 일처리를 보며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두스와 연결되면서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문두스의 수장인 바인의 능력은 경악할 정도였다. 그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엄청난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그런 대단한 인물이 수장으로 있는 정보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현재 엔트는 그런 왕국의 총리였다. 왕국의 대소사를 모두 관장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자신감이 생길 리가 없었다. 바인을 떠올린 엔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제론은 그런 엔트를 보며 피식 웃었다. 확실히 누구라도 바인과 대화를 나눠보면 그런 느낌을 받기 마련이었다. 만일 자신이 초고대유적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마찬가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질투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제론은 바인이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보통 그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면 딴맘을 품기 마련이다. 하지만 바인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론이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몇 가지 만들어 놓긴 했지만 솔직히 그런 장치에 의존할 생각은 없었다. 바인은 제론을 쉽게 저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솔직히 바인도 그걸 느끼고 있었다. 만일 자신이 제론 말고 다른 사람의 아래로 들어가면 무조건 견제를 당하고 나중에는 처단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쨌든 그런 바인을 겪었으니 엔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뭘 그 정도로 의기소침하고 그래? 너도 충분히 대단하니까 걱정할 거 없어."
"예? 저, 저는 걱정한 적이 없습니다만……."
제론이 엔트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바인은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생각해 봐. 아마 너랑은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제론의 진심 어린 말에 엔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워낙 진심을 다해 말했기에 가슴에 확 와 닿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엔트와 바인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만일 바인에게 당장 에어스트 왕국의 총리 자리를 맡겨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엔트만큼은 아니었다.
엔트는 그쪽으로 상당히 특별했다. 엔트 역시 바인만큼은 아니지만 천재적인 능력을 타고났다.
제론은 그걸 알고 있기에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사라져 버린 엔트의 자신감을 아주 약간이나마 되찾아 주었다.
그 약간의 자신감은 조만간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자신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컸다.
그렇게 자신감을 찾아 일의 성과가 커지면 더 자신감이 커질 것이고 능력도 크게 부각될 것이다.
에어스트 왕국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결과적으로 엔트는 그런 에어스트 왕국의 총리에 걸맞은 능력을 차차 갖춰 갈 것이 분명했다.
제론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엔트를 보며 집무실에서 나갔다. 엔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없어져 주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더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