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5/217)

Chapter 7 타히티 (2)

슈린 가문은 빚더미에 앉아 있었다. 슈린 상단은 빚을 빼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었고, 나머지 자잘한 상단 역시 빚이 상단의 값어치보다 더 높았다.

남은 건 영지와 성을 비롯한 저택뿐이었는데, 그것으로는 슈린 가문이 진 빚을 채 절반도 갚지 못한다.

그러니 그걸 처분해서 5천만 골드를 만들어 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각 가문이 갹출해서 5천만 골드를 모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로 몸값을 내야 했고, 전쟁에 패하는 바람에 무수한 돈이 들어갔다. 또 당장 돈이 나올 구석도 없었다.

아마 기한 내에 5천만 골드를 마련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빌리는 것뿐이었는데, 과연 누가 그들을 믿고 5천만 골드라는 거금을 빌려 주겠는가.

"빌려 줄 만한 데는 디아만트 상단 정도로군. 지금 뭐 하고 있지?"

"슈린 왕국 내의 지부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제론이 빙긋 웃었다. 역시 클레였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다 예측하고 있는 것이다.

"슈린 왕국의 영토를 흡수하게 되면 가장 시급한 건 안정이야. 미리 준비해."

"알겠습니다."

사실 엔트는 이미 그에 대한 준비를 시작한 지 오래였다. 엔트도 상황이 이렇게 될 거라고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그래서 미리 그에 관한 준비를 했다.

다만 확신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도 피해가 없이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대비했다. 이제 확정이 되었으니 더 적극적인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아마 슈린 왕국이 넘어올 때쯤이면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어 순식간에 슈린 왕국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네이드 후작령에 인접한 5개 영지는 벌써 흡수 작업이 끝났다.

기존의 귀족을 인정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들의 비리를 캐고 그걸 빌미로 싹 쳐내 버렸다. 결국 그 영지들은 자연스럽게 여타의 다른 에어스트 왕국과 마찬가지 상태가 되었다.

앞으로 병합하게 될 슈린 왕국의 모든 영토 역시 마찬가지 상태가 될 것이다.

"수도 건설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건물과 도로를 워낙 철저하게 짓고 있는지라 시간이 만만치 않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돈도 예상보다 훨씬 많이 들어갔습니다."

"기간트를 동원하는데도 잘 안 되는 건가?"

"아시다시피 기간트가 필요한 일은 끝났습니다. 남은 일은 전적으로 인간의 노동력으로만 해결해야 합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저 한번 확인해 봤을 뿐이었다.

"이번에 받아들인 병사 3만 명을 투입해."

"예? 하지만 그들은 병사로 쓰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체력 훈련의 일환이야. 수도 건설도 빨라지고 체력 훈련도 되고 일석이조지."

"일단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병사의 가족들도 모두 적당히 노동에 참여시켜."

그 말에는 엔트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려 20만 명이나 된다. 그들을 마구 부리면 건설 속도야 빨라지겠지만 자칫 원성이 생길 수도 있었다. 거기에는 노인과 아이가 섞여 있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혹사시키라는 뜻이 아니야. 어쨌든 일거리가 있어야 하잖아. 그리고 화합할 시간도 필요하고. 프로인트랑 잘 상의해 봐. 강도 높은 노동이 아니라 적당히 간단하면서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서 맡겨."

엔트는 그제야 제론의 의도를 이해했다. 수도를 건설하는 데 자신이 일조했다는 일종의 성취감을 위한 일이었다. 그것은 결국 강력한 소속감을 안겨 줄 것이다.

"더 참여시킬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다 참여시켜. 최대한 노동력을 집중시켜서 확 끝내 버려."

엔트가 난감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국왕의 명령이다. 무조건 실행해야만 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내는 건 불가능하겠지?"

"원래 계획이 3년 뒤였습니다."

"1년 반으로 줄여."

"해 보겠습니다."

제론은 엔트의 대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슬슬 왕국의 기반이 닦이는 느낌이었다.

사실 수도 건설은 제론이 생각하는 왕국 건설에서 가장 중요했다. 수도 설계는 제론이 직접 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몇 번이나 수정했다.

그 때문에 건설 속도가 상당히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론의 설계에는 수도의 방어 시스템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 수도의 도로와 주요 관공서의 건물, 그리고 성벽을 이용해 거대한 마법진을 구축할 계획이었다. 수도 방어 시스템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초고대문명에서 뽑아낸 에너지를 성에 쓰고 남는 여유분을 이용할 것이다.

사실 뽑아내야 할 에너지의 양은 정해져 있었다. 한데 고작 성 하나만으로 그 모든 에너지를 쓰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남는 에너지는 허공으로 그냥 방출해 왔다.

한데 수도 방어 시스템으로 그 에너지를 돌린다면 굳이 아깝게 허공으로 방출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수도 전체에 깔려 있는 마법적 편의 장치에 들어가는 에너지까지는 공급이 불가능했다. 그저 방어 시스템의 에너지만 해결하는 정도였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수도 방어 시스템은 말이 수도 방어지 사실 왕국의 방어 시스템이기도 했다.

제대로 쓸 수만 있다면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을 마법으로 공격하는 것도 가능했다. 마티와 연결하면 왕국 내의 주요 시설을 수도에서 쏘는 마법으로 보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다 보니 수도 건설에 시간이 잔뜩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처음 영주성을 건설하면서 함께 시작한 수도 건설이 아직 채 반도 안 끝난 게 아니겠는가.

엔트가 예를 취하고 나가자, 제론은 바로 바인에게 보고를 받았다.

바인의 정보력은 이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레늄 왕국뿐 아니라 주변 다른 왕국의 정보도 차츰 모이는 중인지라 더 폭넓은 시야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슬슬 주변 왕국의 유적도 개척해야겠군.'

유적을 개척하면 개척할수록 정보력이 늘어나고, 또 힘이 강해진다. 그러니 그 부분에서 게으름을 피울 이유가 없었다.

다만 유적을 섭렵하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선뜻 나서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제법 많은 유적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발굴이 완료되어 관광지가 된 유적부터 싹 돌아야겠군.'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정보망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만 이제는 일국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관광을 명목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기가 조금 껄끄럽기는 했다.

하지만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지만 않으면 큰 문제가 없었다. 제론은 유적을 추가하는 일에는 되도록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지 않으려 애썼다.

제론은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한 다음 바인으로부터 도착한 보고서를 읽었다.

미리 지시를 내린 것이 있기에 그에 관한 정보가 절반 이상이었다. 제론은 에어스트 왕국에 대한 전 대륙의 시선을 알고 싶었다.

물론 바인의 정보망이 가진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아주 정확히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동향을 파악할 수는 있었다.

대륙의 시선에 대해 쭉 읽은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다들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군."

레늄 왕국이 분열되어 혼란에 빠진 상황 자체를 다들 즐거운 눈으로 바라봤다. 딱 호기심 정도의 수준이었다.

레늄 왕국의 혼란을 이용해 뭔가 이득을 얻으려면 인접한 것이 유리했다. 직접적으로 무력을 써서 영토를 얻으려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레늄 왕국에 인접한 벨룸 왕국이나 헥서 왕국에 오히려 더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들이 이익을 얻어 힘이 생기면 그 힘을 외부로 발산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에어스트 왕국은 레늄 왕국의 분열을 이용해 독립한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다. 왕국 규모에 비해 제법 강력한 전력을 가지긴 했지만 그래 봐야 약소국이라는 이미지였다.

딱 제론이 원하던 바였다. 아직은 주목받을 필요가 없었다. 진짜 주목은 에어스트 왕국의 기간트 공장에서 아모르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하면 받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마 치열한 정보전이 시작될 것이다. 물론 걱정하지 않는다. 이쪽에는 마티와 바인이 있으니까.

에어스트 왕국에 대한 보고를 모두 읽은 제론은 나머지 자잘한 보고를 확인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대부분이 미테 왕국에 대한 건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텔레포트 게이트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그들이 어떤 정보를 얻었고, 또 크란 제국 마탑으로 어떤 정보를 보냈는지에 대한 보고였다.

"확실히 문제가 있긴 해."

사실 누가 어디로 갔는지만 알아도 상당한 정보가 된다. 그걸 통해 유추해 낼 수 있는 것들이 제법 많았다. 어떤 상황에 누가 어디에 간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들의 의도를 짐작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도 텔레포트 게이트는 상당한 정보를 주변으로부터 수집할 수 있었다. 일단 텔레포트 게이트 자체에 들어간 마법진을 통해 집음이 가능했다. 물론 그 기능에 대해서는 크란 제국 관계자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각 영지의 가장 번화한 곳에 세워진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 근방이 번화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곳의 소리를 몽땅 모아서 보내면 얼마나 많은 정보가 안에 들어 있겠는가. 물론 버려야 하는 쓰레기가 더 많겠지만, 그거야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현재 에어스트 왕국에는 2개의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었다.

하나는 네이드 후작령에 있던 게이트였고, 나머지는 최근 병합한 5개 영지 중 하나에 있던 게이트였다.

솔직히 제론은 그 두 게이트를 폐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만드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가지만, 일단 만들고 나면 지속적으로 이익을 안겨 준다.

유지보수조차 크란 제국 마탑에서 알아서 하기 때문에 영지에서는 아예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저 그곳에서 벌어들이는 돈의 일부를 세금으로 받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텔레포트 게이트가 가져오는 부가적인 이득도 상당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수많은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로 인해 근방의 경제가 크게 활성화된다.

그러니 별다른 이유 없이 게이트를 폐쇄한다고 하면 대번에 의심의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도 대륙 최강국인 크란 제국의 시선을 말이다.

"일단 크란 제국에 한번 가 볼 필요가 있어."

크란 제국은 제론이 있는 에어스트 왕국과는 대륙 정반대쪽에 위치했다. 거기까지 가려면 텔레포트 게이트를 최소 10번은 이용해야만 했다.

그쪽의 유적도 다 섭렵하려면 어쨌든 한번 제국 전역을 돌아봐야만 했다. 제국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면 대륙 전체의 정보를 쥔 것과 비슷한 효과가 생긴다.

그만큼 크란 제국이 대륙 전역에 떨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어쨌든 당분간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그냥 유지하는 수밖에 없군."

제론은 언제 시간을 내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제대로 분석해 보겠다고 작정했다. 사실 텔레포트 게이트라는 것은 이 시대의 마법 기술로 만들어 내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사실 다른 왕국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텔레포트 게이트에 대한 연구를 시도해 보지 않은 왕국이 없을 정도로 상당한 투자를 해 왔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냥 실패만 한 게 아니었다. 아예 텔레포트 마법에 대한 감조차 잡지 못했다. 즉, 걸음마도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다들 그저 크란 제국 마탑에 의뢰해 게이트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텔레포트 게이트에 대한 기술은 오로지 크란 제국 마탑에만 있었다.

그러니 크란 제국 마탑에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할 때, 어떤 수작을 부려 놓았는지 어찌 알겠는가. 제론이 발견한 집음 마법진처럼 말이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돈은 어마어마하다. 당연히 들어가는 재료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수만 개의 마법진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을 해서 발현되는 것이 바로 텔레포트였다.

그러니 그 마법진 안에 뭐가 더 들어가는지 파악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한해서였다.

초고대문명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아티팩트를 가진 제론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었다. 한데 정말 대단한 것이 그런 제론조차도 아직 텔레포트 게이트를 정확히 분석해 내지 못했다.

집음 마법진이 섞여 있다는 걸 알아낸 것도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때, 근방의 마나유동이 이상해서 확인해 보다가 간신히 알아낸 것이었다.

이제 거기에 무슨 마법진이 중첩되어 있는지 확실히 알아봐야만 했다. 향후 크란 제국과 어떤 사이가 될지 모르니 미리 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만일 다른 왕국과 분쟁이 났을 때, 크란 제국이 개입해 제론이 모르는 사이 텔레포트 게이트의 어떤 마법으로 뭔가 이상한 짓을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유사시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못 쓰게 만들 수도 있어야 하고 말이야.'

텔레포트 게이트라는 건 전쟁이 터졌을 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만일 게이트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만 있다면 그걸 통해서 병력을 이동시킬 수도 있었다.

게이트를 통해 기간트라도 나온다면 소름끼치는 결과가 벌어질 것이다. 물론 그런 큰 물건이 이동할 수 있는지 확인이 안 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게이트의 마법진이 혹시라도 아공간 간섭 마법을 차단할 수 있다면 라이더만 실어 날라도 충분했다.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기간트를 소환해 돌진하면 끝 아닌가.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를 해야만 한다. 제론은 그 문제에 관한 생각도 깊이 있게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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