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슈린 가문의 몰락 (2)
그렇게 잠시 눈을 감고 피로를 풀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폐하. 체크 남작이 찾아왔습니다."
문밖에서 시종장이 보고하자, 슈린 국왕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들라 하라."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체크 남작이 들어왔다. 실무를 담당하는 귀족이었는데, 표정을 보니 뭔가 다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가?"
"에어스트 왕국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슈린 국왕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체크 남작을 똑바로 쳐다봤다.
"정말인가?"
"예."
"어떻게 됐나?"
"병사 3만 명에 대한 제안을 해 왔습니다."
슈린 국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병사라니. 지금 왜 병사 얘기가 나온단 말인가.
물론 병사도 중요하다. 그들은 왕국의 중요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귀족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병사였다.
"병사?"
"예. 병사 한 명당 100골드의 몸값을 요구해 왔습니다."
"허! 어이가 없군."
무려 3만 명이나 된다. 한데 몸값으로 100골드를 요구한다면 300만 골드나 달라는 뜻 아닌가.
"지금 우리보고 300만 골드를 달라는 뜻인가?"
솔직히 웬만한 왕국이라면 300만 골드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슈린 왕국은 재정이 말라비틀어진 상황이었다.
"귀족에 대한 얘기는 없었나?"
"일단 병사 문제부터 마무리한 다음에 얘기하자고 우기고 있습니다."
"허어, 이것 참……."
난감했다. 마음 같아서는 병사를 싹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마음 내키는 대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후우, 또 귀족 회의를 소집해야겠군."
슈린 국왕의 혼잣말에 체크 남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뭔가?"
"귀족들의 의견도 미리 듣고 왔습니다."
슈린 국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귀족의 의견을 미리 들었다니, 이 무슨 소리인가.
"그게 무슨 말이지? 설마 귀족들에게 먼저 보고를 했다는 뜻인가?"
"회의실로 갔는데, 귀족들만 모여 있었습니다."
그제야 슈린 국왕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은 좋지 않았다. 자신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점점 피부로 느껴졌다.
"그래서 뭐라고들 하던가?"
"다들 병사를 포기하자는 쪽이었습니다."
슈린 국왕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그런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귀족 포로에 대한 협상을 서두르려는 모양입니다."
"하긴."
자칫 병사에 돈을 너무 써서 귀족 포로에 대한 몸값이 모자랄까 봐 걱정을 한 것이다. 그만큼 현재 슈린 왕국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좋아. 그럼 병사는 포기하는 걸로 하지."
"포기하시는 것입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귀족에 대한 협상을 서둘러야겠어."
"알겠습니다."
체크 남작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포로가 된 병사들도 왕국의 중요한 재원이었다. 한데 그걸 모두 포기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앞으로 3만 명의 병사를 다시 키우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들어가겠는가.
'이 왕국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체크 남작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슈린 국왕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어쨌든 실무를 처리하는 것은 체크 남작이었다. 병사를 포기한다고 에어스트 왕국에 알리고 귀족에 대한 협상을 시작해야만 했다.
☆ ☆ ☆
에어스트 왕국에 포로로 잡힌 슈린 왕국의 3만 병사는 드넓은 공터에 모여 있었다. 아직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이었기에 조금 쌀쌀하긴 해도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공터에 질서정연하게 세워진 천막에서 지내야 했고, 밥도 알아서 지어 먹어야 했다. 물론 식재료는 충분히 공급되었다.
솔직히 그들은 자국에서도 이 정도로 밥을 잘 챙겨 먹지 못했다. 마음만 편하다면 계속 이렇게 포로 생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은 전쟁 중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당장 에어스트 왕국의 병사나 기사가 와서 죽여도 대꾸조차 못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물론 에어스트 왕국의 병사나 기사가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무려 3만 명이나 되다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그만큼 불안했던 것이다.
그렇게 포로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을 때, 기간트 몇 기가 공터로 다가왔다.
쿵! 쿵! 쿵! 쿵!
포로들의 눈이 금세 불안감으로 물들었다. 고작 4기의 기간트였지만 그것이 마음먹고 움직이면 3만 명쯤은 순식간에 곤죽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대부분 몸이 굳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기간트를 대동하고 나타난 사람은 에어스트 왕국의 관리였다. 상당히 젊은 관리였는데, 보통의 포로를 대하는 관리와는 표정이나 눈초리부터가 달랐다.
"천인장 이상만 모여 주십시오."
관리의 말투는 정중했다. 일반적으로 포로를 다룰 때는 반말을 하고 폭언을 퍼붓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데 이 관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대우를 받으니 더 불안해졌다.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측할 수가 없으니 당연했다.
30명의 천인장이 주춤주춤 앞으로 나섰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존심도 있었고, 또 도망가 봐야 결국 밝혀지고 잡힐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병사 1천 명을 호령하던 천인장이었다.
"이제부터 슈린 왕국과의 협상 결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관리의 말에 천인장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협상이 잘못되면 다 죽을 수도 있었다. 더 심한 경우는 3만 병사가 몽땅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아니,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전쟁이라는 건 원래 그렇게 참혹한 법이었다.
"슈린 왕국에서는 여러분에 대한 협상을 포기했습니다."
관리의 말에 천인장들이 일제히 눈을 부릅떴다.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평민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쓰레기 버리듯 내팽개치다니.
"그, 그게 정말입니까? 우리 영주님이라도 어떻게 해 주셨을 것 같은데, 다른 소식은 없습니까?"
천인장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충격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귀족이 동의했다고 합니다."
"대, 대체 저희 몸값을 얼마나 책정했기에 몽땅 포기한단 말입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몸값 책정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협상 자체를 포기했으니 솔직히 의미도 없습니다."
관리의 냉정한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분노로 몸을 떨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자신들이 처할 운명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30명이나 되는 천인장이 몸을 덜덜 떨고 있으니 그 여파가 뒤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다른 병사들에게 고스란히 미쳤다.
3만이나 되는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폭동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관리를 슬쩍 뒤를 쳐다봤다. 이래서 기간트를 4기나 대동한 것이었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4기의 기간트가 차례대로 한 번씩 발을 굴렀다. 어찌나 강하게 굴렀는지 땅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제야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병사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침묵이 감돌자 관리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 그리고 최대한 정중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저희 페하께서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관리의 말에 천인장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그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조금이라도 잘못 들을까 봐 귀를 쫑긋 세웠다. 직감적으로 지금 관리가 하는 말에 자신들이 살아날 길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에어스트 왕국에는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우리 왕국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말을 들으니 대체 왜 관리가 이렇게 정중했는지도 이해가 갔다. 어차피 자국민이 될 사람이니 함부로 대해서 좋을 게 없지 않겠는가.
"저,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관리가 씨익 웃었다.
"그걸 이제부터 저와 잘 논의해 나가면 됩니다. 참고로 여러분의 가족들도 모두 받아들일 것입니다."
"가족까지 말입니까? 하지만 우리 가족은……."
병사가 3만 명이나 있었다. 가족이 없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딸린 식구가 많았다. 아마 그들까지 다 합하면 20만 명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을 대체 무슨 수로 여기까지 데려온단 말인가. 슈린 왕국이 그 요청을 제대로 들어줄 리 만무했다. 아마 그걸 빌미로 엄청난 돈을 뜯어내려고 할 것이다.
"귀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문득 천인장 하나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 질문에 다들 촉각을 곤두세웠다. 솔직히 어떤 답이 돌아올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꼭 확인하고 싶었다.
"한창 협상이 진행 중입니다. 일단 슈린 왕국에서는 남작의 경우 한 명당 1만 5천 골드를 제안했습니다."
다들 이를 부득 갈았다. 고작 한 명을 구하는 데 1만 5천 골드를 제시하면서 자신들에게는 단 한 푼도 쓰지 않는 모습을 보니 역겹기 그지없었다.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천인장 중 하나가 말했다. 관리는 당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부디 좋은 결정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다른 분들의 설득도 함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관리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물러갔다.
쿵! 쿵! 쿵! 쿵!
관리와 함께 왔던 기간트가 멀어져 갔다. 남은 병사들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길지 않았다. 이내 각 천인장들이 자신이 이끄는 병사들을 한데 모았다.
30명의 천인장은 다들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각자 병사를 설득했다.
사실 설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가족을 다 데려와 준다고 했다. 또한 에어스트 왕국의 백성이 되지 않으면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선택의 여지가 있겠는가. 병사들도 모두 그것을 이해했기에 다들 천인장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사실 가족 문제가 가장 큰 결정 요인이 되었다.
전쟁터에 나서면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바로 가족이었다. 한데 자신이 항복해서 다른 왕국에 망명해 버리면 가족과 생이별하게 되지 않겠는가.
한데 에어스트 왕국은 그런 가족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그러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에어스트 왕국이나 슈린 왕국이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나라였다. 그러니 솔직히 왕국에 대한 애착도 별로 없었다. 그냥 같은 나라에서 다른 영지로 이주하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결정은 빨랐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관리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기간트조차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 왔다.
천인장들의 눈빛이 살짝 깊어졌다. 이건 일종의 시험일 수도, 혹은 신뢰를 보여 주려는 행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결코 관리에게 해코지할 생각이 없었다. 관리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 앞으로 이곳에서 정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슬슬 결정을 내리신 것 같아서 왔습니다."
관리의 말에 천인장 하나가 대표로 나섰다.
"에어스트 왕국에 남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관리의 표정이 환해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제가 수속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관리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동료 관리들을 부르러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관리의 발걸음을 천인장 하나가 막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관리가 다시 돌아서서 천인장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천인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가족은……."
"아! 그 문제라면 염려 마십시오. 벌써 우리 왕국의 비밀 요원들이 움직였으니까요. 아마 지금쯤 무사히 구출해서 이곳으로 이동 중일 것입니다."
천인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동 중이라고요? 지금 말입니까?"
"가까운 곳에 있는 분들도 상당수 있더군요. 그런 분들의 경우 벌써 우리 왕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조만간 명단을 드릴 테니 확인해 보십시오. 아마 수속만 끝나면 바로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천인장이 입을 떡 벌렸다.
"그, 그럼 벌써……."
"그 부분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들 허락하실 거라고 확신하고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이렇게 되니 오히려 더 좋았다. 이미 작전을 성공해 이동 중이라니, 부디 이동 중에 별일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슈린 왕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분들을 모아야 하는지라 먼 곳에 있는 분들은 생각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 점, 다른 분들께 잘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종일관 정중한 관리의 말투와 태도에 천인장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제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지도 않았다. 아직 완전히 에어스트 왕국을 믿을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수십 명의 관리가 몰려왔다. 그들은 병사들을 하나하나 만나 서류를 작성했다. 에어스트 왕국의 백성이 되기 위해선 본인에 대한 아주 정확한 기록이 필요했다.
그렇게 3만 명의 병사가 차츰차츰 에어스트 왕국 소속으로 변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