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100/217)

Chapter 5 습격 (3)

가장 앞에서 달린 크라테르가 먼저 어깨로 성벽을 박았다.

꽈아아아앙!

성벽에 금이 쩍쩍 갔다. 어깨로 들이받은 크라테르가 옆으로 피하자 가장 뒤에서 달려온 크라테르가 재차 어깨로 부딪쳤다.

꽈아앙! 꽈르르릉!

성벽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마법진까지 깔아서 방어력을 높인 성벽이었지만 기간트가 마음먹고 달려들었으니 무너지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무너진 성벽을 통해 크라테르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성벽을 부수고 쫓아가는 데 급급해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무너진 성벽 뒤에 붉은 실바가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너진 성벽은 크라테르 한 기가 몸을 옆으로 돌려야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처음 빠져나간 크라테르는 붉은 실바를 등지고 있었다. 당연히 붉은 실바를 보지 못했다. 붉은 실바는 크라테르의 등이 보이자마자 검으로 푹 찍었다.

콰득!

조종석이 꿰뚫리며 라이더가 절명했다. 붉은 실바는 팔을 잡아당겨 크라테르를 빼냈다. 크라테르가 완전히 나오자 잡아당겨 다른 크라테르가 보지 못하게 했다.

쿠궁!

붉은 실바 뒤로 크라테르 한 기가 널브러졌다. 소음이 제법 났지만 다른 크라테르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가려져 별다른 티가 나지 않았다.

두 번째 크라테르도 등을 보이며 빠져나왔다. 이번에도 아주 손쉽게 크라테르를 처리할 수 있었다.

세 번째가 되어서야 앞이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보이자마자 조종석이 꿰뚫리니 동료에게 뭔가를 전할 틈도 없었다.

그렇게 3기의 크라테르를 처리하고 나니, 그제야 성벽 안쪽에 있던 자들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3기나 빠져나갔는데 틈을 통해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들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벽을 더 부숴!"

크라테르 중 하나가 외치자 나머지 8기의 크라테르가 달려들어 벽을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꽝! 꽝! 꽝! 꽝! 꽝!

벽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무너졌다. 8기의 기간트가 나란히 서서 벽을 부수니 무너진 부분이 상당히 넓었다.

그렇게 무너진 벽 너머로 바닥에 널브러진 3기의 크라테르가 보였다. 그리고 벽이 무너지며 일어난 자욱한 흙먼지를 검이 쑤시고 들어왔다.

콰득!

가장 오른쪽에 있던 크라테르의 조종석이 꿰뚫렸다.

쿠웅!

쓰러지는 크라테르 뒤로 돌아서서 달려가는 붉은 실바의 모습이 보였다.

"쫓아!"

이제 남은 크라테르는 고작 7기에 불과했다. 사실 제론이 마음먹으면 그들을 이기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제론의 목표는 슈린 성을 완전히 박살 내는 게 아니라 슈린 왕국을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아마 이대로 사라져 버리면 상당한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쿵쿵쿵쿵쿵!

붉은 실바는 엄청나게 빨랐다. 정비가 잘된 도시의 길을 따라 달려가니 더 빨랐다. 그렇게 실바가 바닥을 발로 찍을 때마다 도로에 깔아 둔 돌이 부서지며 튀었다. 군데군데 금이 가기도 했다.

그 길을 따라 7기의 크라테르가 줄을 서서 달려갔다. 당연히 도로가 엉망으로 부서졌다.

그나마 길을 따라 달리니 건물이 부서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물론 일부 건물이 기간트가 휘두르는 팔꿈치에 걸려 조금씩 부서지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극히 드물었다.

부서지는 건 대부분 도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쫓는 크라테르와 도망치는 붉은 실바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이를 악물고 쫓았지만 그들의 실력과 크라테르의 성능으로는 도저히 붉은 실바를 쫓을 수 없었다.

이내 붉은 실바가 도시를 가르는 성벽에 도착했다. 크라테르들은 더 열심히 달렸다. 도시의 성벽은 슈린 성의 성벽보다 훨씬 높고 두꺼웠다. 이걸 뛰어넘는 건 불가능하니, 부술 수밖에 없었다.

성벽을 부수는 동안 따라잡아야만 했다. 그들은 진짜 심장이 터지도록 무리해서 달렸다. 어떻게든 따라잡아야만 했다.

다들 죽을힘을 다하면 붉은 실바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붉은 실바는 그들의 행동을 비웃기라도 하듯 손발을 성벽에 찍으며 기어 올라갔다.

다들 입을 쩍 벌렸다. 대체 기간트로 뭘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기간트로 성벽을 기어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손을 벽에 찍으며 무게를 지탱하긴 한다. 하지만 직각으로 서 있는 성벽을 타고 오르는 건 어떤 기간트 라이더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사람이 맨몸으로 오르는 것도 어려운데 그걸 기간트로 해내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한가.

크라테르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붉은 실바가 성벽 위에 올라간 뒤였다. 다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붉은 실바를 올려다봤다.

붉은 실바는 뒤돌아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뛰어내렸다.

쿠우우웅!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지축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기간트가 성벽에서 뛰어내려서 낸 소리이니 오죽 크겠는가.

크라테르의 라이더들은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의 심장을 바닥에 내팽개치는 소리 같아서 표정이 썩어 들어 갔다.

쿵쿵쿵쿵쿵!

기간트 달리는 소리가 성벽을 넘어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이내 아예 소리가 사라졌다.

크라테르들이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돌아섰다. 그리고 슈린 성에 벌어진 참상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로 뼈아팠다.

쿵! 쿵! 쿵!

7기의 크라테르가 힘없이 걸어서 성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성에 도착하자마자 또 한 번 굳어 버렸다.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검을 든 왕족들이 마구 날뛰고 있었다. 사방이 피로 낭자했다. 병사와 기사들이 달려들었지만 상대가 왕족이다 보니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미쳐 날뛰며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힌 왕족들이 결국 하나둘 사로잡혔다. 그렇게 사로잡힌 왕족들은 하나같이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기사의 검을 빼앗아 자결해 버렸다.

그야말로 황당한 사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밝혀진 사실은 더더욱 그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성에 있던 주요 귀족들이 무더기로 죽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슈린 왕국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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