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8/217)

Chapter 5 습격 (1)

제론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중앙 유적으로 이동했다. 괜히 시간을 끌 이유도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레늄 왕국은 수많은 유적을 통해 어디든 쉽게 갈 수 있었다. 슈린 영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슈린 영지에 유적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인근에 적당한 유적이 있었다. 그 유적의 마티를 통해 슈린 영지의 상황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했다.

제론의 목적지도 바로 그곳이었다.

유적 간 텔레포트를 통해 곧장 슈린 영지 인근의 유적에 도착한 제론은 태블릿을 통해 상황을 점검했다.

슈린 영지는 비교적 조용했다. 사실 슈린 왕국이 되면서 영주성이 있는 도시는 그대로 수도가 되었다.

왕국의 수도는 상당히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왕국이 된 지는 얼마 안 됐기에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기대 심리는 엄청났다.

그런데도 이렇게 조용한 걸 보면 전쟁에서 패배한 사실이 잘 알려진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바인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바인이 보내 준 보고서 어딘가에 그런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영지 분위기는 침체되어 있었다. 제론은 마티를 통해 분위기를 대충 살피고는 원하던 걸 찾기 시작했다. 제론이 원하는 건 도시에 설치된 마법진이었다.

보통 슈린 영지의 성이 있는 큰 도시쯤 되면 아공간에서 기간트를 소환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마법진을 다 깔아 놓기 마련이었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길 원했다. 그것이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제론은 테오스를 이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테오스와 이스히스가 나서면 훨씬 빠르고 편하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바인이 애써 정보와 소문을 조작한 의미가 퇴색된다.

제론은 혼자서도 충분히 강했다. 소드 마스터였으니까.

하지만 그러려면 제대로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제론이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만일 기간트가 앞을 막으면 이번 작전은 그냥 실패였다. 어떤 기간트가 앞을 막아도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그건 기간트의 수가 적당할 때의 얘기였다.

만일 수십 기의 기간트가 달려들고, 제론의 무위에 겁을 먹은 왕족들이 몰래 도망가 버리면 정말로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확인해야만 했다. 이 도시에서는 기간트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론은 마티를 조종해 도시 곳곳을 확인했다. 그렇게 찾기 시작한 지 30분쯤 되었을 때, 제론의 눈이 번득였다.

"찾았다."

마법진의 흔적을 찾아냈다. 문양을 보니 아공간 간섭 마법진의 일부로 보였다. 제론은 좀 더 마법진의 주변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도시 안에서는 기간트 소환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마법진 가동 범위도 확인해야만 했다. 마법진이 도시에만 적용되고 성 내부에는 적용이 안 된다면 곤란해진다.

"그냥 기간트로 돌진해?"

그렇게 중얼거리던 제론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충동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수십 기의 적 기간트가 한꺼번에 달려들면 아무리 붉은 실바를 타고 있다 하더라도 막아 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제론이 소드 마스터인 것과는 아무 상관 없는 얘기였다. 소드 마스터가 기간트를 조종한다고 많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기간트가 가지는 고유의 파워는 마나코어에 의해 결정되니까.

오히려 이럴 때는 기간트를 타지 않는 편이 은밀히 움직일 수도 있어서 좋았다. 물론 마법진으로 떡칠이 된 성안을 은밀히 움직이려면 처리할 일이 상당히 많아지겠지만 말이다.

"일단 범위는…… 정확히 도시를 감싸는 정도로군."

마법진을 분석하는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제론은 고대 유물의 마법진을 분석하고 만들면서 그에 관한 능력을 상당히 키운 상태였다.

"내부가 중요한데……."

마법진을 분석하니 내부적인 범위도 금방 계산이 가능했다. 계산을 마친 제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성은 포함이 안 되는데?"

즉, 성에는 기간트가 득실거린다는 뜻이었다. 제론 혼자서 뭔가를 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제론의 목표는 그저 왕족 전원을 척살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슈린 공작과 파인트는 끝까지 살려 둘 생각이었다. 가문이 몰락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멀리 돌아온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소드 마스터가 된 순간 몰래 숨어들어 암살하면 그만이었다. 제론에게는 충분히 그 정도 능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론은 그렇게 간단히 끝낼 생각이 없었다. 훨씬 더 큰 고통을 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일이 중요했다. 슈린 왕국을 완전히 분열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일단 성을 확인해야겠군."

성은 아공간 간섭에서 제외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공간 감지 마법진까지 설치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일단 그것도 확인을 해 봐야 한다.

"마티가 거기까지 닿으면 좋았을 텐데."

만일 슈린 영지 인근에 유적이 있었다면 영지 전체를 마티로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적은 슈린 영지가 아니라 그 옆 영지에 있었다.

마티의 정보 수집 범위에 닿아 있긴 하지만 영지 전체를 뒤덮지는 못했다. 그래서 성을 확인하려면 직접 움직여야만 했다.

제론은 유적에서 나가 조용하고 빠르게 이동했다. 아직 날이 훤했지만 조만간 어두워질 것이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제론에게 유리했다. 제론은 아무리 어두워도 시야에 거의 지장이 없었다.

슈린 영지로 스며드는 건 간단했다. 경계는 삼엄했지만 병사로 벽을 만들지 않는 한, 제론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일단 영지로 스며들고 나니,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 슈린 영지의 인구는 에어스트 왕국보다 많았다. 도시에 들어가니 사람이 바글거렸다.

그 사이에 스며든 제론을 무슨 수로 구별해 내겠는가.

하지만 성으로 다가갈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성에 다가가니 돌아다니는 사람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여기도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군.'

에어스트 왕국도 수도를 이런 식으로 구성했다. 거대한 저택들이 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높은 귀족들이 사는 저택이었다. 돈이 많다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당연히 경계는 다른 어떤 곳보다 삼엄했다. 곳곳에서 경비병이 눈을 번득이며 돌아다녔다. 함부로 그 거리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괜한 모험을 할 필요는 없지.'

솔직히 제론은 직접 숨어 들어가는 것도 가능했다. 제론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여차하면 테오스를 부르면 된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괜히 불안함을 남길 필요는 없었다. 자칫 들키기라도 하면 일이 조금 더 복잡해지지 않겠는가. 제론에게는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내부를 둘러볼 방법이 또 있었다.

"스키아."

제론의 그림자에서 스키아가 불쑥 솟아났다. 이 그림자의 정령은 제론에게 새로운 시각과 청각을 제공한다. 그리고 약간의 물리력도 행사할 수 있게 해 준다.

'약간 거리가 있긴 한데…… 일단 해 봐야지.'

제론은 스키아를 성 쪽으로 보냈다. 현 시대에 스키아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스키아는 제론의 의념을 받아 슈린성으로 거의 순간 이동을 하듯 스며들었다.

"마법진으로 아예 도배를 했군. 돈이 많긴 많았나 봐."

슈린 가문이 운영하는 슈린 상단은 상당히 큰 상단이었다. 그들이 판매하는 포션은 거의 독점이나 다름없으니 계속해서 막대한 이득을 안겨 주었다.

그 슈린 상단이 제론 때문에 거의 몰락 직전이었다. 약초를 선점해 포션 제작에 차질을 빚게 만든 다음, 새로운 포션을 제작해 판매했다.

그 결과 슈린 상단은 계속해서 무너져 갔다. 슈린 상단이 무너지니 거기에 연계된 상단들이 다 연쇄적으로 흔들렸다. 그렇게 재정 상황이 악화되었기에 사실 슈린 상단의 마지막 희망이 라쿠스였다.

한데 그런 라쿠스에도 문제가 생겼으니 슈린 가문의 돈이 말라비틀어져 버렸다.

그 결과가 이 슈린성이었다.

마법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긴 한데, 제대로 유지 보수를 하지 않아 몇몇 기능이 정지해 버렸다. 그리고 어떤 기능은 주기적으로 작동을 멈추기도 했다.

제론은 스키아를 이용해 성 구석구석을 살피며 그 모든 마법진을 다 파악했다.

사실 현재의 마법은 제론이 보기에 수준이 너무 낮았다. 그나마 이렇게 큰 규모로 설치하는 마법진의 경우는 좀 나았지만 작은 규모의 마법진은 걸음마 수준이었다.

제론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정도로 분석이 힘든 마법진은 최소한 고대 유물은 되어야만 했다. 초고대문명의 유물은 아예 파악 자체가 불가능했고 말이다.

어쨌든 상황을 다 파악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가 되었다.

성의 상태는 정확히 아공간 감지 마법은 제대로 돌아가고, 나머지 방어에 관한 마법은 절반 정도 마비된 상태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했다.

제론은 성안에 기간트가 몇 기나 있는지도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기종이 뛰어나긴 했지만 고작 30기 정도였다.

사실 슈린 성은 왕궁이었다. 왕궁을 보호하는 기간트의 수가 30기라면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슈린 왕국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슈린 왕국이 전쟁에 동원한 기간트의 수는 700기가 넘는다. 그 모든 기간트를 잃었으니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국경에 배치할 기간트도 모자랄 것이다.

제론은 밤거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일단 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먼저였다. 성에 들어가자마자 기간트를 소환할 것이다. 제론은 아공간에 붉은 실바를 넣어 왔다.

그걸 이용해 목표를 이룰 것이다. 이번 작전의 생명은 속도였다. 잠입한 다음 얼마나 빨리 목표를 척살하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일단 왕족의 위치부터 파악해야 한다. 국왕을 제외한 모두를 척살할 생각이었다.

제론이 원하는 것은 분열이었다. 슈린 가문의 인물을 비롯해 슈린 가문에 지나칠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자들을 싹 정리한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권력 다툼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

더구나 슈린 가문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공산이 컸다.

기간트를 꺼내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였다. 왕궁에서 에어스트 왕국의 기간트가 날뛰면 슈린 가문의 무능함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권력 다툼을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게 가능했다.

스키아를 회수한 제론은 성벽을 타고 넘었다. 깜깜한 밤이었기에 마법진의 빈틈을 파고들어 잠입하는 제론을 발견하는 건 불가능했다.

성벽에는 방어 마법진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몇 군데 빈틈이 있었다. 제대로 유지보수를 하지 않아 만들어진 틈이었다.

제론은 그 빈틈을 정확히 찾아 성벽을 타고 넘었다. 경계병도 많지 않았다. 재정 압박이 가져온 효과 중 하나였다.

스키아를 통해 얻은 정보와 바인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종합한 제론은 반드시 죽여야 할 사람의 이름과 위치를 정리할 수 있었다.

제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성문 근처에 세워진 화려한 숙소였다.

성문 옆에는 두 군데의 숙소가 있었는데, 하나는 화려하면서 규모가 조금 작았고, 다른 하나는 평범하면서 규모가 상당히 컸다.

성문과 성벽의 경계를 맡은 경비대의 숙소였다.

성의 경비대는 생각보다 힘이 컸다. 경비병의 수가 제법 많았기에 그것을 모두 총괄하는 경비대장의 경우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비대장의 자리에 아무나 앉힐 리 없었다. 현재의 경비대장은 슈린 가문 출신이었다. 즉, 왕족이었다.

경비대에는 병사뿐 아니라 기사도 제법 소속되어 있기에 왕족이 그들을 총괄하는 건 슈린 왕국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했다.

제론은 화려한 숙소로 스며들었다. 그 숙소가 경비대장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오로지 경비대장 혼자만을 위한 숙소였다.

숙소를 지키는 기사가 제법 많았지만 제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제론은 숙소 최상층에 있는 방에서 한창 잠에 빠져 있는 경비대장에게 손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차라리 인원으로 메웠으면 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를 동원하는 바람에 인원이 줄어 오히려 숨어들기가 더 쉬웠다.

제론은 경비대장 앞에 다가가 손을 펼쳤다. 제론의 손바닥 앞에 마법진이 나타나 빛을 뿌렸다.

샤아아아.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지며 경비대장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마법은 일정 시간이 지나야 발현되는 고난이도 마법이었다. 마법이 펼쳐지면 경비대장은 이성을 잃고 날뛸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제론이 성을 한바탕 휘젓고 나간 뒤였다.

혼란에 빠진 왕궁에서 경비대장이 날뛰면 더 큰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경비대장의 이미지가 완전히 박살 나게 된다.

제론이 노리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경비대장에게 마법을 건 제론은 곧장 자리를 떴다. 다음 목표는 무력을 갖춘 왕족이었다.

제론은 차근차근 움직였다. 소드 마스터에 이른 그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제론은 마법까지 함께 썼다. 제론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기척도 없었다.

그런 상태로 움직이며 무력을 갖춘 왕족을 찾아다니며 경비대장에게 건 것과 똑같은 마법을 걸었다.

그렇게 마법을 건 다음 행정의 요직에 앉은 왕족과 귀족을 찾아다녔다. 이제부터는 죽음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제론은 왕족과 슈린 가문에 충성하는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하나하나 척살했다. 죽이는 방법은 딱 한 가지였다. 마나를 이용해 호흡기 주변의 공기를 없애 버렸다.

그들은 호흡 곤란으로 죽어 버렸다. 마지막에 비명을 질렀지만 공기가 없으면 소리가 퍼지지도 않는다. 아무리 발악해 봐야 그 어떤 소리도 새나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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