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전후 처리 (2)
그렇게 다른 곳은 치열하게 물밑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정작 그 모든 일의 중심에 있는 에어스트 왕국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에어스트 왕국에서 현재 가장 바쁜 곳은 단연 기간트 공방이었다. 그곳은 1천 기에 가까운 기간트를 수리하느라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 기간트를 모두 전력화하면 누구도 에어스트 왕국을 쉽게 넘보지 못할 것이다.
이젠 왕궁이 된 에어스트 영지의 성은 축제 분위기였다.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에 왕국 전체가 들썩거렸다. 그리고 제론도 술과 고기를 잔뜩 풀었다.
그렇지 않아도 풍족한 왕국이었는데, 왕이 나서서 음식을 풀어 버리니 금세 흥청거렸다.
당연히 왕궁이 가장 흥청망청이었다. 물론 제론은 이 분위기를 깰 생각도 없었지만 계속 유지할 생각도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이런 식으로 다들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에어스트 왕국에 꼭 필요한 분위기이기도 했다.
밖은 흥겨움이 넘쳐 났지만 안은 그렇지 않았다. 제론은 왕궁의 회의실에 앉아 함께 모인 주요 인사들을 쭉 둘러봤다.
"현재 우리 전력 상황은?"
"원래의 전력은 모두 수리가 끝났습니다. 포획한 기간트의 경우 당장 쓸 수 있는 것들도 상당히 많습니다만, 일단 라이더가 부족합니다."
역시 고질적인 문제가 또 나왔다. 에어스트 왕국은 여전히 인구가 모자랐다. 당연히 인재도 모자랐다.
"예비 라이더의 훈련은 어떻게 되고 있지?"
"일단 기존의 예비 라이더를 견습으로 올려서 새로 얻은 기간트를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300명의 신입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1천 기의 기간트를 모두 소화하려면 아직 멀었다. 더 많은 라이더가 필요했다.
게다가 한창 준비 중인 기간트 공장이 완성되어 신형 기간트를 생산하게 되면 훨씬 많은 라이더가 필요해진다. 물론 기간트 생산 속도도 고려해야겠지만 말이다.
"디아만트 상단이 보내 주기로 한 난민이나 빈민은 어떻게 되었지?"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습니다만 아직 턱없이 부족합니다."
에어스트 왕국은 아직 손댈 곳이 너무 많았다. 왕궁이 있는 수도도 완성되지 않았다. 또한 추수가 끝났으니 금년에는 쓰지 않았던 나머지 땅에도 파종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일이 산적해 있었다. 한데 그 모든 것에 사람이 필요했다.
"포로는 어떻지?"
"일단 귀족과 평민으로 나누어서 수감을 했습니다. 평민 쪽은 나중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작업 중입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구가 모자라니 그런 식으로라도 사람을 계속 받아들여야만 했다.
에어스트 왕국에서 노리는 것은 3만 명이나 되는 병사였다. 그들을 고스란히 잡았으니 고스란히 써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어차피 인구가 늘어나면 병사를 더 뽑아야 한다. 그걸 좀 미리 뽑았다고 여기면 된다. 또한 병사를 통해 그들의 가족까지 받아들일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좋아. 그건 계속 그런 식으로 진행하는 걸로 하지. 그럼 이제 진짜 중요한 문제를 얘기해 볼까?"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좌중을 슥 둘러봤다. 갑자기 회의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일단 슈린 왕국부터 처리한다."
"레늄 왕국은 그냥 두는 겁니까?"
"그쪽은 미테 왕국에 맡기는 걸로 하지."
좌중이 살짝 술렁거렸다. 하지만 금세 잠잠해졌다. 굳이 일부러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미테 왕국은 움직였을 것이다. 그들과 손을 잡고 각자 나눠서 공략하면 훨씬 좋은 성과를 얻지 않겠는가.
"미테 왕국 쪽과 협의하는 건 바이스가 맡도록."
"맡겨 주십시오."
어차피 그동안 바이스는 말레피 가문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해 왔다. 이번에 그들에게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연락한 것도 바이스였다.
아마 미테 왕국은 이번 일로 크게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주도한 벨루스 가문과 말레피 가문은 훨씬 큰 실권을 쥐게 될 것이고 말이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슈린 왕국을 어떻게 공략할지 논의해 볼까?"
슈린 왕국은 21개의 영지가 모여서 건국한 나라였다. 당연히 엄청나게 넓었다. 그걸 모두 점령하다는 건 현재의 에어스트 왕국 실정으로는 불가능했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정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인근 영지부터 차근차근 병합하는 방식이 가장 안정적입니다."
가장 먼저 나온 의견이었고, 또 그만큼 현실성 있는 의견이었다. 그렇게 하면 안정적으로 영토를 늘려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실정에는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쟁이 너무 길어질 것 같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다른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승리가 예견된 전쟁이니, 길어져도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사실 그런 식으로 하면 시간은 오래 걸릴지 몰라도 부담은 전혀 없었다. 현재 슈린 왕국은 에어스트 왕국의 공격을 방어할 여력이 전무했다.
거기에 미테 왕국을 견제해야 하니, 에어스트 왕국의 공격을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에어스트 왕국은 그저 차근차근 영지를 병합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 물자는 병합한 영지에서 차출하고 말이다.
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인가. 하지만 제론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당장 슈린 가문을 박살 내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 생각에 잠겼다. 제론이 생각에 잠긴 사이 회의는 잠정적으로 차근차근 점령하는 방안을 선택한 채 진행되었다.
주변 어느 영지를 먼저 공략할 것인지, 또 얼마나 병력을 투입해야 할지, 영지를 하나씩 공략할지 한꺼번에 여러 영지를 동시에 공략할지, 그리고 기간을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할지까지 정해 나갔다.
그렇게 대충 윤곽이 그려질 무렵, 제론이 상념에서 벗어났다.
"일단 슈린 가문부터 없애고 시작하는 건 어떨까?"
"예?"
다들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일단 슈린 가문을 먼저 없애고 시작하자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그리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직접 슈린 영지를 치려면 거기까지 이동을 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습니다만……."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슈린 영지 근방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그 정보가 슈린 왕국에 알려지지 않을 리 없었다.
미리 병력을 대기시켜 준비하면 게이트에서 나오는 에어스트 왕국의 라이더를 그물로 고기 잡듯 싹 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거기까지 강행군을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차라리 그러려면 슈린 영지까지 직선상에 있는 모든 영지를 부수면서 가는 것이 훨씬 나았다.
"이의는?"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불가능합니다."
"차라리 빠르게 부수기만 하면서 전격전으로 나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불가능한 이유는?"
제론의 물음에 다들 각자의 생각을 꺼냈다. 그것을 모두 듣고서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제론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슈린 영지를 치는 건 나 혼자서 한다."
"말도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슈린 영지가 어떤 곳인데 거길 혼자서 간단 말인가. 그냥 죽으러 가는 거나 다름없었다.
회의장이 대번에 소란스러워졌다.
제론은 가만히 그걸 지켜보다가 소란이 조금 잦아들 무렵 입을 열었다.
"혹시 이번 전쟁에서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본 사람 있나?"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슬며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결국 그들의 시선은 카이트와 바이스에게로 향했다.
왕국으로 독립하면서 새로운 인재를 잔뜩 영입해 주요 인사로 만들었기에 카이트나 바이스에 비해 제론에 대해 너무 몰랐다.
"봤습니다."
입을 연 것은 카이트였다. 카이트의 표정은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었다. 그날 있었던 제론의 무위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 뭘 봤지?"
"적의 별동대와 싸우는 걸 봤습니다."
제론이 빙긋 웃었다. 딱 좋은 광경을 봤다.
"그걸 봤으니 알겠군. 나 혼자서 슈린 영지를 치는 게 과연 불가능한가?"
"가능합니다."
카이트의 대답에 다들 경악했다, 모두의 시선이 카이트에게로 모였다. 그리고 설명을 기다리는 눈으로 카이트를 바라봤다.
카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페하께선 혼자서 150기의 라쿠스를 쓰러뜨리셨습니다. 아마 저도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겁니다."
회의장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아무도 카이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대체 그게 어떻게 말이 된단 말인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자, 제론이 말했다.
"그리고 그때 함께 싸웠던 하얀 기간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군."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론이 말한 하얀 기간트는 이스히스였다. 워낙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는지라 이스히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그 기간트도 함께할 테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의 불안감을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세상에 어떤 왕국에서 이런 위험한 작전에 국왕이 직접 나선단 말인가.
"속전속결이 최고야. 그래야 왕국에 부담이 없을 테니까."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좌중을 쓸어 봤다. 제론의 형형한 눈빛이 회의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압박했다. 다들 마음이 짓눌려 기가 확 죽었다.
"슈린 영지를 정리한 다음 일단 주변 영지를 병합하는 걸로 하지. 아마 훨씬 쉬울 거야."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슈린 영지가 사라진다면, 그래서 슈린 가문이 완전히 지워진다면 슈린 왕국의 구심점이 사라지게 된다.
구심점이 사라진 왕국은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었다. 아마 싸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슈린 왕국에 속한 영지들은 에어스트 왕국이 기침 한 번만 해도 알아서 고개를 숙일 것이 분명했다.
전혀 피를 흘릴 필요 없이 왕국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미테 왕국이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럼 그렇게 결정된 걸로 하고,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지. 내가 언제 슈린 영지를 칠지는 나중에 결정되면 알려 주도록 할 테니 기다리도록."
제론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의 통보나 다름없었다. 이 일에 관한 한, 절대로 결정을 번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제론이 밖으로 나간 뒤에도 회의장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듯했다.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다들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바이스와 카이트, 엔트를 바라봤다. 그들이 믿을 건 세 사람뿐이었다.
만일 세나가 있었다면 세나도 거기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이 에어스트 왕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다.
"그냥……."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다들 마른침을 삼키며 집중했다.
"기다립시다."
"기, 기다리자고요?"
"일단 폐하께서 당장 떠나신 건 아니니 기다리면서 방법을 더 찾아봅시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직 일이 벌어진 건 아니었다.
"홀로 슈린 영지를 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떠나기 전에 그걸 생각해 내야 합니다."
"일단 그 수 외에는 답이 없군요."
다들 수긍했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좋은 생각을 해낼 거라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제론이 언제 떠날 것인지는 제론만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