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6/217)

Chapter 4 전후 처리 (1)

전쟁이 끝났다. 그것도 모두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결과로 말이다.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이 손을 잡고 쳐들어갔는데 에어스트 왕국이 그걸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연합군이 거의 전멸해 버렸다. 게다가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파인트는 물론이고 주요 귀족들이 사로잡히거나 죽어 버렸다.

기간트 전투가 워낙 압도적으로 끝나 버려 뒤따라오던 보병들은 별다른 힘도 못 써 보고 몽땅 포로로 잡혀 버렸다. 그 수가 무려 3만이었다.

당연히 레늄 왕국과 슈린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웅크리던 미테 왕국이 술렁거렸다.

이번 기회에 두 왕국을 공격하면 상당한 영토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건 향후 미테 왕국의 거대한 힘이 될 것이다.

미테 왕국의 세 실세 중 두 사람이 은밀한 곳에서 회동 중이었다. 벨루스 공작과 말레피 공작이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감추지 못한 두 사람은 은밀히 만난 뒤에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소."

"나도 그렇소. 아들놈의 연락을 받고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긴 했는데,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르오."

"허허, 나도 마찬가지였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거기 있으니 밤에 잠도 오지 않더이다."

"허허허허."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웃었다.

사실 슈돌츠 국왕이 강력하게 압박을 했지만 두 공작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군사를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리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지 정해야 하지 않겠소? 난 지금 당장이라도 밀고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하오만……."

"나도 밀고 내려가는 데에는 이의가 없소. 다만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준 에어스트 왕국과 상의를 좀 해야 하지 않겠소?"

말페피 공작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내려갈지 한계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오. 일단 광산 몇 개는 얻어야 하지 않겠소?"

"내 생각에는 최소 필츠 평원까지는 얻어야 할 듯하오. 아무래도 우리 왕국은 식량 사정이 좋지 못하니 말이오."

중립 지역의 영지 중에서 식량이 풍부한 곳은 기껏해야 벨루스 영지 정도였다. 나머지 영지에서도 곡물을 안 키우는 건 아니었지만 자급자족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예전 레늄 왕국 최고의 곡창 지대인 필츠 평원을 손에 넣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합시다."

일단 두 사람은 논의를 마무리했다. 아무리 그런 계획을 세워도 에어스트 왕국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노선을 달리해야만 했다.

아직 완전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지만 겉으로 도는 소문만으로도 에어스트 왕국이 가진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 전쟁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그저 한 번의 전투가 끝났을 뿐이었다. 물론 그 전투로 전쟁 자체가 끝난 거나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에는 아직 나름의 힘이 남아 있었고, 에어스트 왕국도 그들을 징치하려면 진군을 해야만 한다.

두 공작은 에어스트 왕국과 적절히 합의해서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많은 영토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왕국이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식량을 생산할 정도면 충분했다.

두 공작은 각자의 가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각자의 통신망을 통해 에어스트 왕국과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 ☆ ☆

슈린 국왕은 난감한 표정으로 앞에 앉은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의 표정이나 자세는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한마디도 뭐라 하지 못했다.

"500기의 기간트를 그냥 지원한 게 아니라는 사실, 알고 계시지요?"

"그렇소."

애초에 500기의 기간트를 지원받으면서 전쟁이 끝난 뒤 그것을 깨끗이 수리해서 돌려주기로 했다. 거기에 모자라는 라이더까지 지원해 주었는데, 그 라이더에게 지급하는 돈까지 슈린 왕국이 책임지기로 되어 있었다.

한데 500기의 기간트를 몽땅 날린 것뿐 아니라, 라이더까지 그 지경에 처했으니 슈린 국왕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슈린 국왕은 속으로 이를 박박 갈았다. 대상은 이번 전쟁을 혼자 망쳐 버린 파인트였다.

제대로 된 보고를 듣지는 못했다. 전쟁에 참여한 대부분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다시 돌아온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이니 전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길이 없었다.

그가 들은 건 적이 기습을 했을 때, 파인트가 혼자 도망가려다가 호위 기사와 얽히는 바람에 피해가 가중되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정보가 차단된 것 역시 모두 바인의 작품이었다. 바인은 의도적으로 정보를 차단하고 헛소문을 흘렸다. 그리고 정보를 비틀어 퍼뜨렸다.

제론은 이번 전쟁에 테오스를 사용했다. 그 사실을 일단 최대한 감추기로 한 것이다.

물론 결국은 알려질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 유리했다. 어쨌든 주목을 받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어쩌실 겁니까? 돈으로라도 물어 주시겠습니까?"

슈린 공작이 식은땀을 흘렸다. 무려 500기의 기간트에 대한 돈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실바의 가격이 4만 골드이니 그걸로 계산해도 2천만 골드나 된다.

한데 이들이 지원해 준 기간트는 무려 크라테르와 몰레스였다. 그 두 기간트의 가격은 실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전쟁 때문에 재정이 말라붙은 상황인데, 거기서 수천만 골드를 지출하게 된다면 얼마나 휘청거릴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더구나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다.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수천만 골드나 되는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휙 던질 수는 없었다. 전쟁에는 무슨 일이 어떻게 생겨날지 모르니 말이다.

"기다려 주시오.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소."

사내의 입가가 길게 늘어났다. 그리고 한쪽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제가 보기엔 이미 끝난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소. 우리에게는 아직 여력이 있소. 게다가 에어스트 왕국은 진군할 처지가 못 되오. 여전히 승산은 우리에게 있소."

"글쎄요. 에어스트 왕국은 그렇다 치고 미테 왕국은 어쩌실 겁니까?"

"미테 왕국은 걱정할 것 없소. 그들과는 밀약을 맺었으니까."

"밀약이라……."

사내의 비웃음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과연 그 밀약이 지켜지리라 생각하십니까?"

슈린 국왕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솔직히 지켜지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슈돌츠 국왕과의 밀약은 그에게 이득이 있기에 정해진 것이다. 한데 이대로 전쟁에 패배해 버리면 밀약 자체가 소용없어진다.

"미테 왕국의 군사 흐름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 못 들어 보셨습니까?"

사내는 이제 슈린 왕국의 정보력에 딴지를 걸고 나섰다. 더 이상 이 왕국에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이오?"

그제야 사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조금 더 지원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야말로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또 지원을 해 준다니, 그렇게만 해 주면 지금 닥친 위기를 어떻게든 넘길 수 있었다.

에어스트 왕국은 진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위험한 움직임을 보이는 미테 왕국만 견제하면 된다. 그거면 충분했다.

일단 시간만 벌면 뭐든 할 수 있을 테니까.

"뭘 원하시오?"

"보다 적극적인 협조를 원합니다."

"적극적인 협조?"

"저희로서도 상당히 무리한 투자를 하는 셈입니다. 그러니 성공했을 때 그만한 보답을 바라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슈린 국왕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점점 지쳐 갔다. 건국을 할 때는 좋았는데 계속 문제가 터지니 이젠 너무 버거웠다.

"향후 저희가 하는 일에 전폭적인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하겠네."

사내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지금 나온 대화의 내용을 정확히 계약서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슈린 국왕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그 계약서에 인장을 찍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사내가 계약의 대가로 내민 것은 200기의 몰레스였다. 그 정도면 급한 대로 미테 왕국의 도발을 견제하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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