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4/217)

Chapter 3 전쟁 (1)

쿵! 쿵! 쿵! 쿵!

1천 기의 기간트가 질서 정연하게 진군했다. 대부분이 크라테르나 몰레스였고, 카타락타가 일부 있었다.

파인트는 가장 뒤에서 아우틈을 타고 이동했다. 그 주위를 베르를 탄 호위 기사들이 에워싸듯 진형을 짜서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완전히 밀어 버릴 수 있겠지."

파인트는 시선을 돌려 멀찍이 떨어진 곳을 이동하는 150명의 기사를 바라봤다.

그들이 바로 라쿠스의 라이더였다.

150기나 되는 라쿠스를 별동대로 운용하는데, 어떻게 전쟁에서 지겠는가. 아무리 약점이 있는 기간트라 하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50기는 따로 뺐다. 또 다른 별동대인 것이다. 그들은 특별한 임무를 띠고 은밀히 에어스트 왕국으로 잠입하고 있었다.

1천 기의 기간트라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상대를 밀어 버리는 동시에, 150기의 별동대가 특별한 순간 적을 요격하고, 50기의 기간트가 에어스트 왕국의 중심을 습격하며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이 이번 전쟁에서 파인트가 그린 큰 그림이었다.

그 외의 다른 부분은 각각의 사령관들이 상황에 맞춰서 유기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이번 전쟁은 파인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실패하고 날려 먹어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하긴, 여기서 지면 더 이상 가문도 없지.'

이렇게 잔뜩 물량을 쏟아부었는데 진다면 더 이상 왕국을 유지할 여력이 사라진다.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미테 왕국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전력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밀고 내려오면 속절없이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전쟁을 마무리하고 왕국을 안정시켜야만 했다.

레늄 왕국과 슈린 왕국은 내전이 끝난 지도 얼마 안 됐다. 그런 상황에서 연이어 전쟁을 하는 것이니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반면 미테 왕국은 계속 중립의 위치에서 내실만 다져 왔으니 그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미테 왕국은 슈린 왕국이나 레늄 왕국에 비하면 애초에 규모가 작았기에 두 왕국에 비해 손색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그 손색은 이제 거의 의미가 없게 되었다. 두 왕국의 내전이 워낙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번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뒷일이야 불을 보듯 훤했다.

그나마 이번 전쟁에서 승리해 에어스트 왕국의 식량을 흡수할 수 있다면 그 차이가 사라져 향후 경쟁의 발판이 마련되겠지만 말이다.

그런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 때문에 파인트가 느끼는 압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스트레스로 변해 매순간 파인트의 심장을 조여 왔다.

"얼마나 남았느냐?"

파인트의 질문에 바로 옆에서 파인트와 보조를 맞추며 걷고 있던 호위 기사가 즉시 대답했다.

"30분 정도만 더 가면 예전 네이드 후작령 인근에 도착합니다. 정찰에 따르면 에어스트 왕국 측 기간트도 그곳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몇 기나 있다고 하더냐?"

"일단 보이는 건 500기라고 합니다."

"500기라…… 많이도 끌어모았구나."

에어스트 왕국의 규모를 생각하면 500기의 기간트를 보유했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솔직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개 백작령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 정도면 생각보다 금방 끝낼 수 있겠군."

파인트가 안심하며 말하자 호위 기사가 즉시 반박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붉은 학살자가 있지 않습니까. 방심하면 안 됩니다."

파인트의 인상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지금 누가 누굴 가르치려 한단 말인가.

"내가 그따위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다만 노파심에……."

"접어라. 그따위 싸구려 노파심은. 우린 최소한의 피해로 크게 승리할 것이다."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호위 기사가 얼른 한 발 물러났다. 하지만 걱정이 되었다. 파인트가 이번 전쟁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러다가 피해가 크면 곤란한데…….'

이기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솔직히 호위 기사가 생각하기에도 전력 차이가 너무 커서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중요한 건 얼마나 피해를 줄이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전쟁에서 승리해 봐야 피해가 크면 아무 소용 없었다.

쿵! 쿵! 쿵! 쿵!

규칙적인 기간트의 발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30분쯤 지나자 파인트의 눈에도 에어스트 왕국의 기간트가 진형을 갖추고 늘어선 모습이 보였다. 정찰한 대로 500기쯤이었다.

"별다를 것도 없군."

파인트는 코웃음을 쳤다. 상대를 얕봐선 안 되지만, 적당한 자신감은 중요했다.

"기종이 생각보다 뛰어나군요."

호위 기사의 말에 파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특이했다. 발굴형 기간트가 상당히 많이 보였고, 크란 제국에서 수출하는 임베르도 제법 있었다.

나머지는 대부분이 몰레스와 크라테르였다. 카타락타는 아예 없었다.

이 정도면 굉장한 전력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규모를 생각하면 정말로 놀라웠다. 하지만 그래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다만 짜증이 좀 났다.

"생각보다 기종이 좋아서 피해가 좀 있을 수도 있겠어."

파인트가 짜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데 그렇게 에어스트 쪽의 기간트를 살펴보던 파인트의 눈빛이 번득였다.

"음? 저건 뭐지?"

에어스트 왕국 진영에 서 있는 기간트 옆에 하나씩 바위가 놓여 있었다.

"설마 저걸 던져서 공격하겠다는 건가? 푸하하하핫!"

파인트는 크게 웃으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진군하던 기간트 군단이 일제히 멈췄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쿵! 쿵! 쿵!

기간트의 발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땅이 흔들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것 같았다.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행동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위협에도 에어스트 왕국 측 기간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전혀 동요가 없었다. 두 배가 넘는 전력 차를 보고도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다.

그들에게는 승리에 대한 열망과 확신이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몇 번의 영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얻은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서 있는 자신들의 왕 제론에 대한 믿음이었다.

제론은 그동안 고민을 많이 했다. 테오스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말이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쓰기로.

피해를 최소로 줄여야 하는 건 비단 슈린 왕국이나 레늄 왕국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에어스트 왕국에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제론은 테오스를 탄 채 가장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테오스의 우측 뒤편에 이스히스가 있었다. 새하얀 몸을 가진 이스히스는 다른 기간트 사이에 있으니 확연히 튀었다.

당연히 그 모습을 파인트가 놓칠 리 없었다.

"음? 못 보던 기간트가 있는데? 저게 뭐지?"

"저도 처음 보는 기간트입니다. 발굴형 기간트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뭐지? 신형 기간트인가? 크란 제국에서 새로운 기간트를 수출한 적이 있었나?"

크란 제국의 기간트 중에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당연히 제국 내에서도 꽁꽁 감싸 정보를 감추는 입장이었기에 그것을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파인트나 그의 호위 기사가 그걸 봤을 리 없으니 그런 식으로 오해하는 것도 완전히 생뚱맞은 일은 아니었다.

"저렇게 새까만 기간트에 대한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새하얀 기간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크란 제국의 기간트인 누베스가 하얀색이라고 들은 것 같긴 해."

"하면 저 하얀 기간트가 누베스일까요?"

"글쎄……."

뭐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설마 에어스트 왕국에서 새로 만든 신형 기간트는 아니겠지?"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왕국의 라쿠스도 수십 년을 투자해서 만들어 낸 기체 아닙니까."

파인트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새 기간트를 만드는 게 호락호락한 건 아니지. 어쨌든 뭐 상관없잖아? 고작 2기로 뭘 하겠어?"

"맞습니다. 그것으로는 대세에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설사 저 기간트를 모는 사람이 기간틱 마스터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맞아. 아무리 붉은 학살자라도 숫자 앞에선 티끌에 불과하지."

파인트는 그렇게 확신했다. 붉은 학살자에 관한 소문은 많았지만 그 소문을 모두 진짜라고 확신한다 하더라도 두 배의 전력을 뒤집는 건 불가능했다.

'뭐, 피해야 좀 있겠지만…….'

피해를 생각하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파인트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래도 이기면 된다. 이기기만 하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파인트가 막 공격을 명령하려는 순간, 에어스트 왕국의 기간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무려 500기에 달하는 기간트가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렸다. 바위의 크기는 기간트의 머리보다 살짝 컸다. 상당한 크기와 무게였다.

거기에 직격당하면 아무리 기간트라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기동이 불가능해지거나 움직임이 불편할 정도로 고장 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달려가다가 정면으로 바위를 맞으면 타격이 훨씬 클 것이다. 그래서 파인트는 돌격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저들이 바위를 던진 다음에 돌격하거나 아니면 그 바위를 다시 들어 던지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던져!"

테오스에 탄 제론의 명령이 쩌렁쩌렁 울렸다. 전장이 뒤흔들릴 정도로 웅혼하고 거대한 외침이었다.

그 명령과 동시에 500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바위를 던졌다.

후웅! 후웅! 후웅! 후웅! 후웅!

무려 500개나 되는 바위가 허공을 날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충격에 대비해!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흘릴 수 있으면 흘려!"

하지만 과도하게 움직여선 안 된다. 자기가 움직이는 바람에 동료가 균형을 잃은 채 바위에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균형을 잃어 쓰러지면 안 된다. 그건 진형의 붕괴로 이어지고, 진형이 붕괴되면 수적 우위가 급격히 힘을 잃는다.

바위가 일제히 쏟아졌다. 직선으로 날아온 바위는 거의 없었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대부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는데, 연합군의 기간트는 유효적절하게 대처해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꽝! 꽝! 꽝! 꽝!

바위가 바닥에 떨어지고, 기간트의 팔에 맞고 몸에 맞았다. 몸에 바위를 맞은 기간트도 뒤로 한 발 물러나는 정도 외에는 거의 타격이 없었다.

만일 그 상태에서 바위가 또 날아왔다면 조금 위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속 바위 공격은 없었다.

파인트는 그것을 보며 입가에 비웃음을 그렸다. 이런 쓸모없는 공격을 하다니. 만일 거리가 가까웠다면 타격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기간트가 던지는 바위의 위력은 엄청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리가 너무 멀었다. 게다가 직선으로 던지지도 않고 포물선을 그리며 던졌으니 거기에 맞거나 타격을 입을 리 없었다.

"자, 이제 우리 차례다! 모두 주변에 있는 바위를 집어!"

연합군 측 기간트들이 근처에 떨어진 바위를 집으려 했다. 한데 그 순간 바위가 밝게 빛났다.

화아아아아아악!

"뭐, 뭐야!"

파인트는 화들짝 놀랐다. 그냥 바위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지만 저렇게 밝은 빛을 내는 걸 보니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모두 피해!"

파인트가 외쳤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바위들이 일제히 폭발해 버렸다. 바위가 부서지며 그 파편이 사방을 휩쓸었다. 어찌나 폭발력이 강했는지 근처에 서 있던 기간트의 몸체 여기저기가 형편없이 찌그러져 버렸다.

그뿐 아니라 폭발의 범위에 휘말린 기간트는 뒤로 휙 날아가 자빠져 버렸다.

강렬한 섬광은 덤이었다. 어찌나 섬광이 강했는지, 그걸 정면으로 본 라이더의 눈이 순간적으로 멀어 버렸다.

"으아아아악!"

파인트는 비명을 질렀다. 파인트의 기간트는 전혀 피해 받은 게 없었다. 하지만 섬광 때문에 눈이 멀어 버렸다. 시간이 지나면 시력이 다시 돌아오겠지만, 전투 중에 시력이 사라졌는데 그 영향이 얼마나 엄청나겠는가.

눈이 안 보여 허우적거리는 파인트의 귀에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돌격!"

잊을 수도 없는 제론의 음성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뒤집어 버릴 것 같은 굉음이 쏟아졌다.

쿵쿵쿵쿵쿵쿵쿵쿵!

기간트가 달려오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파인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꽈아아아아앙!

양측의 기간트 부대가 충돌하는 순간, 굉음이 울렸다. 마치 거대한 폭발이라도 일어나는 듯했다.

"으아아아악!"

파인트는 공포에 질려 버렸다. 시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적이 돌진하니 심장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두려웠다.

꽈광! 쾅! 쾅!

파인트는 몸부림을 치며 돌아섰다. 방향감각도 희미했지만 굉음이 울리는 쪽과 반대로 뛰면 된다는 생각에 무작정 달렸다.

하지만 그게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아무리 후미에 위치했다지만 근처에 파인트를 호위하기 위해 기간트가 둘러싸고 있었으니 그들과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꽈과광!

기간트끼리 얽혀 꼴사납게 바닥에 쓰러졌다. 파인트가 워낙 당황해 움직임이 컸기 때문에 혼자서 2기의 기간트를 동시에 쓰러뜨렸다.

쓰러진 호위 기사들도 시력이 사라진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 파인트가 달려드니 제대로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얽힌 채로 허우적거리는 동안 전투는 급격히 진행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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