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3/217)

Chapter 2 신형 기간트 (2)

"으음."

세나는 서서히 잠이 깨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는 모르지만 몸은 개운했다. 더 이상 피곤하지 않았다.

눈을 뜬 세나는 희미하게 돌아오는 시야에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들어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침대 머리맡에 제론이 가만히 앉아서 세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나는 제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여, 영주님!"

설마 이렇게 침실에 들어와 자신이 자는 모습을 지켜볼 줄은 몰랐다. 당황스러웠지만, 역시 기뻤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제론의 모습에 마치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급하게 일어날 필요 없어.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 좀 더 자도 돼."

"아, 아뇨. 잠 다 깼어요. 이제 안 피곤해요."

세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침대에 앉은 채 제론을 바라봤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아예 생각도 못 해 봤다.

'그러고 보면 정말 그동안 일 빼고는 아무것도 안 했구나.'

세나는 제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 시간을 좀 더 즐기고 싶었다.

"요즘 많이 힘들지?"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영주님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뻐요."

그 뒤로도 제론은 굳이 일 얘기를 꺼내지 않고 소소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세나에게 있어서 더없이 소중하고 벅찬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점심 먹을 무렵이 되어서야 방을 나섰다. 그리고 성의 식당에 가서 간단하지만 충실한 식사를 했다.

그렇게 함께 식사까지 마친 다음에서야 세나의 공방으로 향했다.

세나의 공방 한쪽에 마련된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은 제론은 품에서 종이 뭉치를 잔뜩 꺼내 놓았다. 세나에게 받은 새 기간트의 설계도였다.

"대충 확인해 봤는데……."

제론이 꺼낸 말에 세나가 깜짝 놀랐다.

"벌써 다 확인했다고요? 고작 하루 만에요?"

제론에게 태블릿이라는 희대의 아티팩트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제론은 세나의 설계도를 모두 태블릿에 저장한 다음, 하나하나 분석했다. 문제점을 찾는 건 아주 간단했다. 그리고 개선 방향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단 여길 봐."

제론은 설계도면 한 장을 뽑아 세나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마법진 몇 개를 짚으며 문제점을 얘기해 주었다.

"마법진 구조가 조금 비틀려 있어. 이걸 이런 식으로 바로잡으면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지."

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접근법이었다. 그 뒤로도 놀랄 일이 계속되었다.

제론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세나는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대체 끝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제론 혼자서 설계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정말 대단해요……."

"대단하긴."

제론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고는 마지막으로 한곳에 모아 둔 설계도 뭉치를 탁자 한가운데로 옮겼다. 나머지 도면은 세나가 따로 챙긴 뒤였다.

"자, 이제 마나코어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자고."

마나코어의 설계도는 다른 부분의 설계도를 다 합한 것만큼 많았다. 그 정도로 복잡하고 만들기 어려운 부품이었다.

세나가 설계하다 막힌 것도 다 마나코어 때문이었다.

제론은 세나와 함께 차근차근 마나코어의 설계도를 분석했다. 세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제론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가끔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이미 태블릿을 통해 마나코어를 샅샅이 분석했기에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해 완벽한 마나코어로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정말 대단한 마나코어가 나오겠군."

제론의 말에 세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문제네요. 포로스가 너무 많이 들어가요."

이번 기간트의 설계에는 포로스가 쓰인다. 포로스에 대한 연구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바이스와 세나였다.

말레피 가문의 마법사들이 포로스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지만 그들의 연구는 핵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포로스에 대해 정확히 모르니 당연했다.

하지만 바이스와 세나는 포로스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연구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기간트 설계의 기반에는 폭넓은 포로스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 그걸 바탕으로 설계했기에 기간트에 상당한 포로스가 쓰였다.

"포로스가 많이 필요할 텐데, 그걸 조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 부분은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예? 어떻게요?"

제론이 씨익 웃었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돼."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었지만, 세나는 그 말을 듣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제론은 정말로 믿음직스러웠다.

"그럼 저도 힘내서 설계를 할게요. 이 설계도를 보고 있으니 한 달 안에 시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네요."

세나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설계가 거의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실제로 만들어 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세나의 특기였다. 혼자서 기간트를 뚝딱 만들어 내는 것 말이다.

"그래? 그럼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시제품만 만든다고 끝이 아니다. 그걸 양산하려면 제대로 된 공장이 있어야 한다. 양산 공장을 만드는 것도 기간트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한없이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부탁해."

제론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나가 따라 일어났다. 그녀의 표정에는 당황과 아쉬움이 진하게 깔려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갈 줄 몰랐기에 당황스러웠고, 또 제론을 그냥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쉬웠다.

제론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제 슬슬 혼인을 생각할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 전에 최소한의 감정을 나누는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준비도 필요했다.

세나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천천히 세나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가까이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제론이 세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세나는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이내 살포시 눈을 감고 제론의 손길을 즐겼다. 제론의 넓고 포근한 품에 뺨을 기대고 손을 들어 허리를 휘감았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세나를 끌어안고 있던 제론이 천천히 손을 떼고 물러났다.

세나는 아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제론의 말에 세나는 이를 앙다물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확신만 있다면 말이다. 그 확신을 오늘 얻었다.

제론은 세나에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공방을 나섰다.

제론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세나는 조금 전까지 제론이 서 있던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격렬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 감정은 이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결국 잔잔한 호수가 되었다.

세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설계도를 들고 작업대로 향했다. 이제 설계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새 기간트를 만들 시간이 되었다.

'아모르.'

세나가 붙인 새 양산형 기간트의 이름이었다. 세나는 그것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정말 할 일이 많구나."

제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것도 당장 닥친 일들이 그랬다.

일단 전쟁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전쟁에서 지면 모든 게 끝이니까.

하지만 거기에만 모든 걸 쏟아부을 수는 없었다. 그것 말고도 중요한 일이 많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테페룸 광산에 가 보는 일이었다.

테페룸 광산 근방에 있는 유적을 찾아 테페룸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은 가장 시급한 일 중 하나였다. 그것을 염두에 뒀기에 세나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슈린 공작가나 나베 공작가의 배후를 밝혀내는 일도 추진해야 한다. 물론 그건 조금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도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급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최대한 서두르는 편이 좋았다.

거기에 유적도 클리어해야 한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져 보니 할 일이 정말로 많았다. 그것도 하나같이 쉽지 않은 것뿐이었다.

"일단…… 전쟁에 집중해야겠지?"

테페룸 광산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움직이려면 제론이 너무 외부에 드러나게 된다. 일단 크란 제국까지 가야 하니,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게이트를 이용할 때마다 제론의 행적이 기록으로 남는다. 만일 그런 식으로 이동했다가 테페룸 광산에 문제가 생기면 결국 제론이 의심을 받게 된다.

물론 지나친 비약이 될 수도 있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러니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움직여야만 한다. 일단 헥서 왕국에 있는 유적으로 이동한 다음, 거기서부터는 푸르투나를 이용해 날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테페룸 광산 근방에 도착해도 시간이 필요했다. 정확한 위치를 알아낸 게 아니라, 바인이 각종 정보를 통해 유추한 장소이기 때문에 근방을 다 뒤져야만 했다.

그렇게 해도 못 찾을 가능성이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일단 전쟁부터 마무리하는 것이 나았다. 그 전에는 유적 클리어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제론은 그렇게 차근차근 계획을 정리했다.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할 건지도 정했다.

그렇게 제론이 미래의 일을 계획하는 사이 전쟁의 기운이 슬금슬금 에어스트 왕국에 스며들고 있었다.

☆ ☆ ☆

레늄 왕국과 슈린 왕국의 수뇌가 머리를 맞대고 전쟁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사실 아직 두 왕국은 진짜 왕국이라고 하기에는 살짝 모자란 감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전쟁을 통해 제대로 된 왕국으로 발돋움할 계획이었다.

에어스트 왕국의 막대한 식량 자원은 그것을 가능케 할 것이다.

"추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정보에 따르면 며칠 안에 추수가 완전히 끝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식량이 넘쳐 나겠군요."

"그 넘쳐 나는 식량이 목적 아니겠습니까?"

회의는 시종일관 밝은 분위기였다. 이번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쟁의 주도권을 쥐려는 싸움이 치열했다.

"그나저나 라쿠스의 약점은 개선하셨습니까?"

레늄 왕국 측 귀족의 말에 슈린 왕국의 대표로 참석한 파인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 예상하고 왔지만 그래도 들으니 기분이 나빴다.

"아직 못 하셨나보군요. 하면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슈린 왕국이 보유한 기간트의 절반 이상이 라쿠스인 걸로 아는데……."

"다른 방식으로 운용하면 됩니다. 작전의 문제지요."

파인트의 대꾸에 다들 눈을 번득였다.

"다른 방식이라면……."

"별동대로 운용하면 됩니다."

"별동대?"

"아시다시피 라쿠스의 약점이 드러나려면 어느 정도 전투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기동성을 살려서 빠르게 치고 빠지는 작전을 펼치면 얼마든지 운용이 가능합니다."

파인트의 차분한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냥 수긍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작전의 폭이 상당히 좁아집니다. 그건 인정하시겠지요?"

파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뒤집을 카드를 가져왔으니 전혀 상관없었다.

"아무튼 그러하니 총사령관은 우리 레늄 왕국에서……."

레늄 왕국 측 귀족이 마무리하려 하자, 파인트가 손을 번쩍 들어 말을 끊었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레늄 왕국 측 귀족이 파인트를 바라봤다. 사실 대부분의 정보는 다 쥐고 있었다. 슈린 왕국에서 뭘 준비했는지도 다 알기에 이쯤이면 마무리가 될 거라 여겼다.

한데 이제 와서 또 무슨 할 말이 남았단 말인가.

"우리 슈린 왕국에서는 기간트 500기를 더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레늄 왕국 측 귀족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500기의 기간트라니. 대체 그게 어디서 났단 말인가.

슈린 왕국의 전력은 누구보다 레늄 왕국이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함께 전쟁을 한 사이이니 당연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웠는데 적의 전력을 잘못 알고 있을 리 없었다.

한데 500기의 기간트가 더 있다고 한다. 놀라는 게 당연했다.

"그, 그렇게나 많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번에 무리를 좀 했습니다."

기가 질렸다. 대체 뭘 어떻게 무리했기에 기간트를 500기나 충원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라쿠스 500기를 추가하신 건……."

파인트가 피식 웃었다.

"라쿠스 공장을 풀가동해도 500기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그야 그렇습니다만……."

"절반은 크라테르고, 나머지 절반은 몰레스입니다."

레늄 왕국 측 귀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만일 그렇다면 이건 정말 대단한 전력이었다.

"그, 그럼……."

"총사령관은 우리 슈린 왕국에서 맡아야 할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레늄 왕국 측 귀족은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예상이 완전히 틀어져 버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파인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아, 그리고 우리 슈린 왕국에서 500만 골드 상당의 군수품을 추가로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레늄 왕국 측 귀족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자신의 권한으로 더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그, 그런……."

파인트가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결정이 난 것 같군요.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만 하죠."

파인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늄 왕국 측 귀족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일으켰다. 파인트는 그를 힐끗 일별하고는 휙 돌아서서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크윽."

레늄 왕국 측 귀족이 굴욕적인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후우, 이걸 어떻게 보고할지 벌써 걱정이군."

레늄 왕국 측 귀족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회의장을 나섰다.

어쨌든 그렇게 전쟁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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