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90/217)

Chapter 1 유적 15층 (2)

타히티는 제론을 향해 또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쉬이이이이이!

새하얀 빛의 화살이 막대한 에너지를 머금었다. 그리고 제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쌔애애액!

제론은 화살이 날아오는 걸 똑바로 보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화살과 마주친 순간 몸을 낮게 깔듯이 숙였다.

꽈아아앙!

화살이 제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바닥에 꽂혔다.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지만 제론은 오히려 더 속도를 높여 돌진했기에 폭발에 휘말리지 않고 타히티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론이 눈을 빛내며 검을 휘둘렀다.

쉬익!

검이 허공을 갈랐다.

제론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앞에 있던 타히티가 사라져 버렸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서 또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빨라?"

타히티는 이스히스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빨랐다.

제론은 순간적으로 타히티의 움직임을 놓쳤다. 물론 그렇게 빠를 줄 몰랐기에 그랬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소드 마스터인 제론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쉬이이이이이!

빛의 화살이 만들어졌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발에 힘을 꽉 주었다. 이대로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콰득!

바닥이 움푹 파였다. 그리고 제론의 몸이 빛살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쌔애액!

화살이 시위를 떠나 정확히 제론을 향해 쏘아졌다.

제론이 검을 휘둘렀다. 어느새 검에는 마나가 잔뜩 뒤덮여 있었다.

꽈아아아앙!

화살을 빗겨 냈는데도 충돌과 함께 폭발해 버렸다. 제론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쉬이이이이이이!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화살 만들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제론은 억지로 의식을 붙잡았다. 그리고 몸을 굴렸다.

쌔애액!

꽈앙!

바로 옆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제론은 그 폭발에 휘말려 휙 날아갔다.

쉬이이이이!

허공에 뜬 제론을 향해 타히티가 활을 겨눴다.

"끄응."

제론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며 눈을 떴다.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유적 로비였다.

"완패로군."

손도 못 써 보고 당했다. 타히티가 그렇게 빠를 줄 몰랐고, 또 화살의 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아니, 자신감이 지나쳤다. 어쩌면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타히티에 대해 알아낸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빠르다는 것과 활을 쏜다는 것이 알아낸 전부였다.

그래도 이스히스와 싸울 때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 할 만했는데, 타히티는 아예 그런 것도 없었다. 확실히 원거리 공격은 까다로웠다.

타히티가 쏘는 빛의 화살은 에너지 덩어리였다. 그래서 관통력뿐 아니라 폭발력까지 지니기에 그저 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데…….'

일단 다가가야 타격을 입힐 수가 있다. 한데 타히티는 엄청나게 빨랐다. 그걸 따라잡지 못하면 이기는 게 불가능했다.

방법은 딱 하나다. 타히티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다. 당연히 싸움을 할 때는 예측을 통해 몇 수 앞을 내다보면서 움직인다.

하지만 타히티를 상대할 때의 예측은 결코 쉽지 않았다. 타히티에는 이동에 대한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예비 동작이 필요 없었고, 이동할 때의 움직임도 크지 않아서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속도가 너무 빨라서 미리 예측하지 않으면 따라잡는 게 불가능하니, 어떻게든 예측할 방법을 만들어야만 했다.

제론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몸으로 부딪치는 게 최선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제론은 마나호흡을 통해 몸 상태를 최고조로 끌어 올린 후, 15층으로 이동했다.

길고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제론이 유적에 목을 매는 동안 레늄 왕국, 즉, 4국의 정세는 빠르게 변해 갔다.

일단 물밑으로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이 손을 잡았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였다. 에어스트 왕국을 쳐서 그곳의 광활한 농지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추수였다. 그 막대한 식량을 그냥 불태워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이 생각한 전쟁의 시기는 추수가 끝난 직후, 추위가 찾아오기 직전이었다.

막대한 전력을 모아 단숨에 밀어붙여 에어스트 왕국을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광활하고 기름진 농지는 물론이고 막 추수가 끝난 곡물을 잔뜩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쟁을 위해서는 선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중립 세력은 이합집산을 계속하다가 결국 처음 중립 세력의 중심이 되었던 슈돌츠 후작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말레피 후작과 벨루스 백작을 각각 공작에 임명하고 왕국의 실권을 나눠 주었다.

그렇게 미테 왕국이 건국되었다.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이 에어스트 왕국을 치려면, 반드시 미테 왕국과도 손을 잡아야만 했다. 아니, 최소한 도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도 받아야만 했다.

그게 선결되지 않으면 전쟁이 어려워진다. 전력을 투입해 에어스트 왕국을 쓸어버리려고 하는데 자칫 미테 왕국이 뒤를 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지금은 아직 건국 초기라서 내정에 힘써야 한다. 그리고 다독일 일도 많았다. 아직 혼란이 완전히 가라앉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뒤통수를 맞으면 그야말로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막아야 전쟁을 할 수 있었다.

한데 문제는 미테 왕국의 실권자 중 둘이 에어스트 왕국에 호의를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그들이 에어스트 왕국이 망하도록 내버려 둘 리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국왕인 슈돌츠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슈돌츠 국왕은 은밀하게 감춰 둔 응접실에 앉아, 자신을 찾아온 레늄 왕국과 슈린 왕국의 사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참으로 곤란한 부탁이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힘을 한 번만 실어 주시면, 향후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지속적인 지원이라……."

"언제까지 힘을 셋으로 나눌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신의 말은 달콤했다. 확실히 권력이 셋으로 분리된 건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미테 왕국은 발전이 힘들어진다. 추진력을 얻으려면 나머지 두 권력을 찍어 눌러야만 한다.

항상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슈돌츠 국왕은 그들의 제안이 솔깃했다. 하지만 함부로 걸음을 내디딜 수는 없었다. 이런 일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결국은 문제가 생기는 법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지원을 해 줄 수 있소?"

사신이 빙긋 웃었다.

"당연히 이 부분을 확실히 해야겠지요."

두 사신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몇 번의 눈짓을 통해 의견을 맞췄다. 그리고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이 각각 하나씩 맡아서 상단 흔들기를 하겠습니다."

"상단 흔들기라?"

"금전적 압박을 받으면 가문의 기반에 금이 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두 가문에 정보원을 파견해 지속적으로 정보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거기에는 축출 명분을 만드는 작업도 포함됩니다."

그제야 슈돌츠 국왕이 눈을 빛냈다. 확실히 그 정도라면 구미가 당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이번 전쟁의 개입을 막으려면 자신이 희생해야 할 부분이 상당했다.

그걸 몽땅 만회하려면 최소한 두 가문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나중에 결정적인 순간, 기간트를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슈돌츠 국왕의 표정에 만족감이 깃들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움직일 만했다. 아무리 권력이 분산되어 있다지만 그래도 국왕이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발언권이 셀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내치에 힘쓸 때니, 명분도 괜찮았다. 오히려 도발을 주장하면 혈연에 의해 왕국을 말아먹으려 한다고 공격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나중에 더 크게 돌아올 확률이 높았다. 정치라는 것이 원래 그러하다.

하지만 그것도 두 가문이 온전히 남아 있을 때의 얘기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말레피 가문과 벨루스 가문은 더 이상 권력에 집착할 겨를이 없어질 것이다.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이 그렇게 만들 테니까.

"좋네. 우리 한번 해 보지."

슈돌츠 국왕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두 사신이 기쁜 표정으로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탁월하십니다. 약간의 차질도 없을 거라 약속드리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하면 서면으로 증거를 남겨야지?"

슈돌츠 국왕의 말에 두 사신이 즉시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일이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고 미리 준비한 것이다.

"읽어 보시고 인장을 찍어 주십시오."

슈돌츠 국왕은 두 장의 서류를 찬찬히 읽었다. 조금 전 협의한 내용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또한 가장 아래에 두 국왕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슈돌츠 국왕은 즉시 그 옆에 인장을 쾅 찍었다.

☆ ☆ ☆

한창 유적 공략에 열을 올리던 제론을 엔트가 찾아왔다. 마침 집무실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 짧은 틈에 방문한 것이다.

이는 성의 특별한 마법 시스템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방의 주인이 설정해 놓으면 자신이 부재중인지 아닌지 특정한 몇몇이 자동으로 알 수 있었다.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엔트가 서류 한 장을 내밀고 공손히 말을 이었다.

"그것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재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 목표는 당연히 우리겠군."

"그렇습니다. 한데, 전력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습니다. 아무래도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입니다."

제론은 설명을 들으며 서류를 슥 훑었다. 적의 움직임이 어떤지, 또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리되어 있었다.

"호오. 기간트를 700기나 동원할 여력이 남았단 말이야? 대단한데?"

전쟁에 700기의 기간트를 쓴다는 건, 방어에 쓰는 기간트까지 합하면 1000기가 넘는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슈린 왕국과 레늄 왕국이 손을 잡았다고 해도 너무 많았다. 그들이 내전에서 잃은 기간트를 생각하면 말이다.

"라쿠스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걸로 어떻게든 전력을 만들 작정인 듯합니다."

"돈도 많군. 아, 다 빚이려나?"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조사를 해 보겠습니다."

"그래. 파고들 여지가 있으면 다 파고들어야지. 어차피 이길 싸움이지만 피해를 최소로 줄이는 게 중요해. 우리는 여기서 끝이 아니야.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엔트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보다 슈린 공작가가 라쿠스를 통해 재정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일단 생산해서 전쟁에서 쓰고, 그걸 내다 파는 식으로 계약을 하고 있습니다."

"계약을 많이 했나?"

"아직 시작 단계이긴 합니다만, 이대로라면 어마어마한 수가 팔려 나갈 것 같습니다."

제론이 씨익 웃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아마 더 이상 계약이 곤란해질 테니까. 어쩌면 이미 계약한 자들도 계약을 파기할지도 모르지."

"예?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지켜봐. 재미있어질 테니까."

제론의 의미심장한 웃음에 엔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가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해 왔는지를 떠올리고는 금방 수긍해 버렸다.

굳이 의문을 깊이 가질 필요가 없었다. 포기하면 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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