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이스히스
유적 14층은 변함이 없었다. 오랜만이었지만 바로 어제 왔던 것처럼 친근하기까지 했다.
이내 이스히스가 나타났다.
제론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검을 뽑았다.
단단한 근육을 뭉쳐 놓은 듯한 모습의 이스히스를 보고 있자니, 이젠 든든한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좀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초고대문명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한데 그런 굉장한 문명이 만들어 낸 기간트가 고작 이스히스 정도라면 참으로 실망스러운 문제였다.
물론 이스히스와 맨몸으로 대적해야 하니, 어느 정도 납득은 했다. 애초에 기간트를 상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사람을 상대로 만든 기간트라면 굳이 저런 형태로 만들 이유가 없었다. 이스히스는 누가 봐도 기간트를 상대하기에 더 유리한 모습이었다.
제론은 상념을 털어 내고 눈앞에 서 있는 이스히스를 쳐다봤다. 그리고 집중했다.
지금은 딴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스히스는 온전히 집중해도 이기기 어려운 상대였다.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지 않으면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설사 하이쓰 산맥 유적에서 고대의 소드 마스터를 만나 대결하며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다 하더라도 말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집중하자마자 이스히스가 움직였다. 덩치에 맞지 않게 빠른 속도는 이번에도 역시 제론에게 괴리감을 안겨 주었다.
꽈앙!
이스히스의 도끼가 바닥을 찍었다. 제론은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해 냈다.
제론의 검이 이스히스의 도끼자루에 꽂혔다.
쩡!
이스히스의 도끼가 크게 휘었다. 아무리 강력한 일격을 먹여도 부러뜨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몰랐을 때라면 당황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일부러 노리고 쳤다.
크게 휘었던 도끼자루가 원래대로 돌아오며 세차게 흔들렸다. 탄성이 워낙 좋았기에 그 요동의 폭이 상당했다. 그리고 그것을 억누르느라 이스히스의 균형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제론이 노린 것은 바로 그 빈틈이었다.
검이 도끼자루를 때렸을 때의 반탄력을 이용해 허공에 떠오른 제론은 곧장 이스히스의 목을 향해 검을 찔렀다.
우우웅!
제론의 검이 새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이 쭉 늘어났다. 빛의 검을 덧씌운 듯한 모습이었다.
빛의 검이 이스히스의 목을 찔렀다.
쩌엉!
이스히스의 몸이 크게 뒤로 젖혀졌다. 제론이 내지른 일격은 그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그 후에 이어지는 이스히스의 대처는 놀라울 정도였다.
이스히스는 젖혀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누워 버렸다. 그러면서 발을 차올렸다. 기간트가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후웅!
제론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발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앞을 향해 검을 크게 휘둘렀다.
쉬아악!
검에서 폭풍 같은 바람이 일어났다. 제론은 그 바람의 힘을 이용해 옆으로 슥 이동했다. 허공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인 제론의 코앞을 거대한 발이 스치고 지나갔다.
후우웅!
하마터면 저 거대한 발에 휩쓸릴 뻔했다. 제론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쉬익! 쉬익! 쉬익!
제론의 검에서 새하얀 빛 덩어리가 초승달 모양으로 날아갔다.
꽝! 꽝! 꽝!
어느새 자세를 잡은 이스히스가 도끼로 그것을 막아 냈다. 이스히스의 도끼는 그 정도 타격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제론도 그걸로 이스히스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하기 위한 행동일 뿐이었다.
제론이 착지하자마자 이스히스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어찌나 빠른지 대응이 어려울 정도였다.
제론은 검을 비스듬하게 세워 이스히스의 도끼를 흘리며 옆으로 이동했다.
쩡!
검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엄청난 충격이 손을 타고 전달되었다. 하지만 제론의 몸에 흐르고 있는 마나가 그 충격을 흩어 버렸다.
제론은 더 빠르게 이동해 이스히스의 뒤를 잡았다. 그리고 날아오르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쭉 그었다.
콰가각!
새하얗게 빛나는 제론의 검이 이스히스의 등을 쭉 그었다. 등판에 깊은 흔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거로는 이스히스의 움직임에 조금도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적어도 같은 자리에 같은 일격을 몇 번 더 먹여야 표가 날 것이다.
이스히스가 돌아서며 도끼를 휘둘렀다.
콰우우!
거대한 도끼가 바람을 찢으며 제론을 향해 날아갔다.
제론은 뒤로 쭉 물러났다. 도끼의 사정권에서 벗어난 다음 도끼가 지나가자마자 다시 달려들어 공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금방 깨졌다.
이스히스가 중간에 도끼를 놔 버렸다. 도끼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제론을 향해 날아갔다. 피할 틈조차 없었다. 허를 찔린 데다가 속도도 너무 빨랐다.
제론은 검을 들어 도끼를 막아 냈다. 아니, 위로 비스듬히 튕겨 냈다. 이스히스의 힘이 너무 강해서 정면으로 부딪치면 대적이 불가능했다. 아무리 제론이 소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말이다.
꽈아아아앙!
힘을 다 흘려 냈는데도 엄청난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다. 물론 도끼는 위로 튕겨 냈다. 하지만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거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스히스가 달려들었다. 제론이 경악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제론은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정!
이스히스의 주먹과 제론의 검이 부딪치며 수많은 불꽃을 만들어 냈다.
제론은 당황했다. 이스히스의 실력이 예전보다 훨씬 늘어난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올라간 실력으로 좀 더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데 지금은 예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이스히스는 여전히 대처가 어려울 정도로 빨랐고, 강력했다.
'이건 다 그 위화감 때문인 것 같은데…….'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느릴 것 같은 덩치가 빠르다고 감각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위화감을 느낀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것도 소드 마스터가 말이다.
제론은 이를 악물며 옆으로 뛰었다. 이스히스가 지나치길 바라면서. 하지만 이스히스는 제론의 생각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한 기간트였다.
화아악!
폭풍 같은 바람이 일어나며 이스히스가 제론 앞에서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팔을 크게 휘둘렀다. 어느새 이스히스의 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다.
부우우웅!
제론은 다급히 검을 들었다. 도끼가 날아오는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허공에 뜬 채로는 절대 반응할 수 없었다. 제론의 검을 이스히스의 도끼가 강렬하게 후려쳤다.
꽈아아앙!
제론은 뒤로 훌훌 날아갔다. 이번 건 충격이 제법 컸다. 향후 싸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미치겠군.'
싸움이 좀 쉬워질 거라고 여긴 것이 실수였다. 그것이 마음을 좀 느슨하게 만든 것이다.
똑같이 어려운 싸움이었다. 한데 마음가짐이 느슨하니 예전보다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또한 쌓인 충격 때문에 움직임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질 수는 없었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눈을 빛냈다.
바닥에 착지한 제론의 눈에 어느새 앞에 다가온 이스히스의 도끼가 보였다. 워낙 타이밍이 훌륭해 이번에도 그저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꽈앙!
검의 각도를 절묘하게 조절해서 이번에는 날아가지 않고 바닥을 쭉 미끄러지며 멈추고 자세를 잡을 수 있도록 했다. 말도 안 되는 시도였지만 제론은 멋지게 성공했다.
제론은 이스히스를 똑바로 노려봤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냉정히 따지면 속도는 제론이 훨씬 위였다.
이스히스가 빠르게 다가왔다. 제론은 그 움직임을 똑바로 보고 있다가 오히려 안으로 파고들었다.
제론이 가슴으로 다가오자 이스히스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렇게 빨리 이동하는 와중에 이런 식으로 멈출 수 있다는 건 거의 반칙에 가까웠다.
후우웅!
이스히스의 도끼가 제론의 정수리를 쪼개 왔다.
제론은 한 발 더 안으로 파고들었다. 등 뒤로 도끼가 지나가고 도끼자루가 머리로 떨어졌다. 하지만 제론에게 닿지는 않았다. 제론이 비스듬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꽈앙!
도끼가 바닥을 찍었다. 제론은 진동하는 도끼자루를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강하게 당겼다.
쉬익!
바람을 가르며 제론이 위로 올라갔다. 정말 오랜만에 잡은 기회였다.
제론의 검이 새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이 이스히스의 가슴을 찔렀다.
쩌어어어엉!
제론은 짧은 시간에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냈다. 당연히 그 파괴력은 엄청났다.
이스히스의 가슴에 거미줄 같은 금이 쩍쩍 갔다.
제론은 충격의 반탄력을 이용해 뒤로 휙 날아서 물러났다. 이스히스는 그 충격으로 뒤로 거의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결국은 균형을 잡아서 섰다.
외형적인 타격은 많이 받았지만 내부적인 타격은 거의 없었기에 이스히스는 처음과 마찬가지 속도와 움직임으로 제론에게 달려들었다.
제론은 그 뒤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조금씩 이스히스와의 싸움이 대등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예전의 감을 다시 되찾은 제론은 그때부터 예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히스가 가진 위화감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지금까지 이스히스의 생김새 때문에 빠른 속도에 위화감을 느꼈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스히스는 순간적으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것은 상대가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미묘하게 변했고, 정면에서만 속도에 변화를 줬기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크기도 변했다.
온몸이 근육질로 뒤덮인 것처럼 거대한 것도 모두 그를 위한 것이었다. 그 근육이 마치 생체 기관처럼 숨을 들이마시면 부풀어 오르고, 내뱉으면 쪼그라드는 듯했다.
워낙 자연스럽고 미세하게 변해서 그 차이를 못 느낄 뿐이었다.
제론도 이제야 그 차이를 인식했다. 만일 새로운 경지에 들지 못했다면 여전히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비단 이스히스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의 도끼도 마찬가지였다. 그 미묘한 차이가 계속 타이밍을 어긋나게 만든 것이다.
제론은 더 신중하게 이스히스를 살폈다. 공격할 때마다 팔다리가 부풀고 줄어드는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처음에는 너무 미세해서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는데, 계속 신경을 쓰다 보니 이젠 익숙해져서 그 차이가 엄청나게 느껴졌다.
사실 차이가 엄청난 건 맞다. 그로 인해 속도에 차이가 생겨나니 말이다. 크기가 변한다는 건 원근감에 문제를 만든다는 뜻이었다.
그 미세한 변화가 순간적으로 일어나면 제대로 타이밍을 잡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일단 익숙해지고 나니, 훨씬 상대하기가 편해졌다. 타이밍을 맞추는 건 물론이고,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때부터 제론은 압도적인 싸움을 이어 나갔다.
파괴력이나 힘은 이스히스가 확실히 위였지만, 나머지는 제론이 위였다. 일단 속도가 훨씬 빨랐다.
제론은 이스히스의 가슴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일단 제대로 일격을 먹여 거미줄 같은 금이 쩍쩍 간 상태였기에, 같은 곳을 여러 번 찌르니 금세 가슴 부분이 부서져 나갔다.
제론은 바람처럼 움직여 이스히스를 농락했다. 신기하게도 모든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이스히스와 싸우는 와중에 새로운 경지에 발을 들인 것이다. 물론 아주 살짝이었지만 말이다.
제론의 검이 이스히스의 가슴을 다시 한 번 때렸다. 이번에는 찌르지 않고 검에 막대한 마나를 담아 그대로 후려쳤다.
꽈아아아앙!
가슴이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그러자 내부가 드러났다. 복잡한 마법진이 잔뜩 그려져 있었고, 하나하나 밝게 빛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마나 코어가 있었다.
제론이 눈을 빛냈다. 그리고 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휘잉!
검에서 폭풍이 일어나며 제론의 몸을 위로 띄웠다.
그사이 이스히스의 손이 제론을 잡으려고 빠르게 다가왔다. 제론은 공중에서 몸을 몇 번 비트는 걸로 이스히스의 손아귀를 살짝 피했다. 그리고 타이밍을 맞춰 손을 발로 찼다.
꽝!
제론의 몸이 마나 코어를 향해 그대로 날아갔다. 그리고 제론의 검이 새하얗게 빛났다.
콰직!
온몸의 힘을 실은 검이 마나 코어를 찔렀다. 하지만 마나 코어는 가슴을 감쌌던 강판보다 훨씬 단단했다. 그저 살짝 실금이 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나 코어에 도착했으니 승부는 끝났다. 제론은 검에 마나를 가득 불어 넣었다.
우우우웅!
검이 새하얗게 빛나는 걸 넘어서 마치 하얀 불길이 일어나는 것처럼 타올랐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마나 코어에 찔렀다. 방금 전에 찔러 실금이 간 바로 그 부분이었다.
꽈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마나 코어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리고 코어로 파고 들어간 제론의 검이 내뿜는 마나가 안을 휘저어 버렸다.
코어 안의 마나와 제론의 마나가 만나면서 폭주해 버렸다.
제론은 온몸을 마나로 감싸며 훌쩍 뛰어내렸다.
이스히스는 마나 코어에 그렇게 큰 상처를 입고서도 도끼를 휘둘렀다. 아래로 떨어지는 제론을 그대로 올려친 것이다.
제론은 완전히 방심한 상태로 도끼를 맞이해야만 했다.
"젠장!"
제론의 검이 이스히스의 도끼를 내려찍었다.
쩡!
충격이 파도처럼 제론의 몸을 흔들었다. 제론은 온몸의 체액이 물결치는 것을 느끼며 허공으로 쭉 날아가 버렸다.
이스히스는 그 일격을 마지막으로 움직임이 멈춰 버렸다. 하지만 마나 코어의 폭주는 계속 이어졌다.
우우우우웅!
마나 코어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 모두가 짙은 마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붉고 푸른빛이 마나 코어에서 뿜어져 나와 이스히스의 몸을 그대로 집어삼켜 버렸다.
그리고 대폭발이 일어났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제론은 허공에 뜬 채로 주변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폭발을 지켜봤다.
제론에게도 폭발의 여파가 밀려왔다. 하지만 제대로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몸이 말을 안 들었다. 마나도 잘 움직이지 않았다.
"쿨럭!"
제론이 피를 토했다. 앞섶이 온통 검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나니 속이 좀 편해졌다. 마나가 살짝 움직인 것이다.
마나가 움직이니 몸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제론이 바닥에 떨어졌다.
쿠당탕탕탕!
움직일 수 있으니 간신히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 아마 그게 아니었으면 엄청나게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의 충격을 말이다.
제론은 다시 한 번 울컥 피를 토했다. 그리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완전히 폐허가 되어 황량했다.
제론은 천천히 이스히스가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이제 재대로 이겼으니 14층도 클리어한 셈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가 있으니 조금 떨렸다.
만일 이것도 아니라면 당분간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위이이잉!
제론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이스히스가 폭발한 자리에서 솟아나는 기둥을 쳐다봤다.
저 기둥을 보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이스히스와 싸웠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제론은 천천히 걸어 기둥에 다가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지 확인해 봤다.
작은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새하얀 상자였는데, 특이한 재질이었다.
제론은 상자를 꺼냈다.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의 상자였다. 대체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지만 아주 가벼웠다. 속이 비어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이리저리 돌려 보니 열쇠 구멍이 하나 있었다. 구멍 모양이 워낙 특이해 맞는 열쇠가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을 본 순간 13층을 클리어하면서 받은 열쇠가 떠올랐는데, 그 열쇠와는 모양이 완전히 달랐다.
"이상한데?"
그냥 아무 기능도 없는 상자를 선물로 줬을 리가 없다. 분명히 뭔가 유용한 물건일 것이다.
제론은 상자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특이한 상자였다. 열쇠 구멍은 있는데 이음새가 없었다. 즉, 뚜껑이 없는 상자였다. 그럼 열쇠 구멍은 왜 있단 말인가.
"아, 그럼 그 아공간 상자처럼 마법진이 연결되는 방식인가?"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열쇠를 떠올리니 그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 제론이 13층을 클리어하고 받은 열쇠가 바로 그런 방식의 상자를 여는 만능열쇠 같은 것이었다.
제론은 아공간에서 열쇠를 꺼냈다. 열쇠 모양이 구멍과 너무 달라서 끝 부분조차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긴가민가했지만 일단 열쇠를 구멍에 갖다 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열쇠가 구멍 안으로 쑥 들어갔다. 마치 구멍이 열쇠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제론은 반사적으로 열쇠를 빙글 돌렸다.
딸깍.
열쇠가 돌아가며 상자 내부에 있던 마법진이 정확히 맞물렸다.
화악!
상자 표면에 복잡한 문양이 나타나 빛났다. 그 문양은 분명히 마법진이었다.
철컥! 철컥! 철컥!
상자가 각 마법진의 문양에 따라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분리된 상자가 다시 조립되었다. 상자의 모양 자체가 마법진을 이루었다.
마법진이 촘촘히 새겨진 금속선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이었다. 상당히 특이했다. 또 만들기도 어려울 듯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제론은 그제야 그 금속이 테페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테페룸이 아니었다. 테페룸을 가공해서 만든 특수한 물질이었다.
화아아악!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이 점점 커졌다. 빛무리가 점점 거대해지더니 이내 기간트만 하게 성장했다.
그리고 서서히 빛이 잦아들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거대한 기간트가 서 있었다. 새하얗고 근육이 덕지덕지 붙은 듯 덩치가 큰 기간트, 이스히스였다.
제론은 이스히스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니 또 반갑고 무작정 좋았다.
이스히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제론을 향해 섰다.
쿠웅!
이스히스는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제론에게 뭔가를 갈구하는 듯했다.
제론은 이스히스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왠지 그 머리에 손을 얹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손이 닿을 리 없었다.
"푸르투나."
휘류루루루루루룽!
돌개바람이 일어났다. 그 바람이 제론의 다리를 단단히 받쳤다. 그리고 위로 들어 올렸다.
가볍게 하늘에 날아오른 제론은 이스히스의 머리 부분에 도착했다.
제론이 손을 뻗어 이스히스의 머리에 살며시 갖다 댔다.
푸화학!
제론의 손바닥이 닿은 부분에서 강렬한 섬광이 터졌다. 그 빛은 제론을 한바탕 휘감았다. 그리고 제론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는 마나와 뒤섞였다.
쉬이이익!
그렇게 섞인 마나가 이스히스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완벽하게 흡수되었다.
번쩍!
이스히스의 눈에서 번갯불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감고 있던 눈을 뜬 것 같았다.
눈을 뜬 이스히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어느새 푸르투나를 돌려보내고 땅에 내려선 채,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허리띠의 중앙에 있는 아공간에서 쉬고 있는 테오스가 떠올랐다.
테오스가 떠오르자 너무나 자연스럽게 허리띠에 있는 다른 아공간도 함께 생각났다. 제론의 허리띠에는 빈 아공간이 무려 30개나 있었다. 그것도 기간트가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아공간이 말이다.
제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떠올랐다.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갑자기 이스히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스히스는 제론을 향해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쿠웅!
그 모습은 마치 기사가 주군을 맞이하는 듯했다. 제론의 가슴이 격동으로 온통 뒤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