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7/217)

Chapter 9 독립

네이드 후작령을 병합하는 작업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이제 에어스트 백작령에도 제법 인재가 많았다. 또한 차기 총관 후보인 엔트의 일처리 능력이 상당했다.

바이스는 네이드 후작령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엔트에게 인수인계를 했다.

그렇게 엔트는 에어스트 백작령의 총관이 되었다. 사실 말이 총관이지 이제 독립을 해서 에어스트 왕국이 되면 왕국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대신이 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바이스는 그런 자리를 엔트에게 넘긴 것이다. 오로지 마법에 대한 열망 하나로 말이다.

사실상 제론이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제론은 그저 결정만 내리면 끝이었다. 세부적인 일은 행정관들이 알아서 진행했다.

바이스와 카이트, 세나는 각각 마법, 병력, 기간트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았다.

에어스트 백작령이 왕국으로 독립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니 그 정도 대가는 당연했다.

제론은 그렇게 모든 일을 가신과 관리들에게 맡겨 놓고 프로인트를 찾아갔다.

프로인트는 갑작스런 제론의 방문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잘 맞아 주었다.

솔직히 자신은 아직도 제대로 할 일을 찾지 못해서 상당히 불편한 상황이었다.

프로인트는 처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자신에게도 뭔가 일을 준다면 성심껏 노력할 자신이 있었다.

"스키아를 좀 빌려 줄 수 있나?"

"예?"

프로인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스키아를 빌려 달라니. 정령을 무슨 수로 빌려 준단 말인가.

"그,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소환을 부탁하지."

프로인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림자의 정령을 불렀다.

"스키아."

프로인트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덩어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사실 이 그림자의 정령은 아무나 함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인트는 제론이 스키아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금 놀라운 일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들 말고도 정령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물론 상당히 드물긴 하지만 말이다.

제론은 프로인트의 그림자로 다가갔다.

"요즘은 얼마나 오랫동안 정령을 소환한 채 유지할 수 있나?"

"5분입니다."

몸 상태가 좋아졌고 지속적으로 노력한 덕분에 상당히 시간이 늘어났다. 아마 목숨을 걸고 애쓰면 10분까지도 소환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정신을 잃음과 동시에 죽을 수도 있겠지만.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숙였다. 프로인트의 그림자 위에 툭 튀어나와 있는 검은 덩어리가 요동쳤다.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느낌은 고스란히 프로인트에게 전해졌다. 프로인트는 놀란 눈으로 제론과 스키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스키아에게 이런 감정을 뽑아낸 사람은 제론이 처음이었다.

제론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스키아를 두 손으로 가볍게 감쌌다.

스키아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느리고 조심스러운 제론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 제론은 마치 스키아가 그쪽으로 피할 걸 예상한 것처럼 미리 손을 갖다 대 스키아의 움직임을 막았다.

스키아가 제론의 손아귀에 갇혀 버렸다. 그 순간 프로인트는 갑자기 스키아와의 링크가 끊어진 것을 느꼈다.

"이, 이런……!"

프로인트가 당황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왜? 뭔가 이상한 느낌이라도 받았나?"

"스, 스키아와의 링크가 끊어졌습니다."

"링크가 끊어져?"

"스키아가 보고 듣는 걸 저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데, 그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

제론이 씨익 웃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스키아를 얻기 위해 제론은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가장 큰 문제는 스키아와 계약하려면 유적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하면 유적의 존재를 프로인트에게 들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제론의 마나로 강하게 스키아를 감싸 외부와 차단시키면 프로인트와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을까 하고 추측했다. 그리고 그 추측은 사실로 판명이 났다.

"그럼 이건 잠깐 빌리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프로인트의 방을 나왔다. 프로인트는 당황해서 제론을 쫓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었다.

하지만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물론 그 어디에도 제론은 없었다. 공간 이동을 통해 유적으로 갔으니 당연했다.

프로인트는 마치 눈을 감고 귀를 막은 것처럼 답답했다. 스키아와의 링크가 끊어지면서 스키아의 시선으로 보던 것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뇌리 한구석에 항상 떠 있던 영상과 음성이 사라지니 마치 뭔가를 잃은 것처럼 허전했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불안해졌다.

프로인트는 제론을 찾기 위해 서둘러 어딘가로 걸어갔다. 일단 성안을 샅샅이 뒤져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제론을 찾아 스키아를 돌려받고 싶었다.

제론은 유적 로비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스키아는 분명히 손 안에 있었다. 공간 이동을 하면서 손에 잡힌 정령이 사라져 버릴까 봐 살짝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 그대로 손아귀에 있었다.

"이런 줄 알았으면 예전에 네로를 잡았을 때도 공간 이동을 쓸걸 그랬어."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정령을 가져왔으니 계약을 시작해야 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설마 내가 차단하고 있어서 그런 건가?"

유적의 능력이 워낙 대단하니 이렇게 차단해도 얼마든지 계약이 이행될 거라 생각했다. 한데 정령 계약에 관한 부분은 제론이 생각했던 것보다 유적의 능력이 모자라는 모양이었다.

사실 제론의 힘이 늘어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제론은 아직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

제론은 조심스럽게 손을 열었다. 아주 작은 틈이 생겨난 순간 스키아가 위로 휙 튀어나갔다. 그리고 유적의 벽에서 빛줄기가 쏘아져 스키아를 가둬 버렸다.

스키아는 맹렬히 몸부림쳤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유적의 힘은 스키아의 몸부림 따위는 아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정령 확인. 계약을 진행합니다.

유적의 벽이 물결치듯 빛났다. 그리고 바닥에서 은은한 빛이 올라왔다.

그 빛은 이내 거대한 마법진을 이뤘다. 그리고 그 마법진 한가운데에 스키아가 갇혔다.

―이미 계약된 정령입니다. 분화를 시도합니다.

제론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는 계약에 눈을 빛내며 상황을 지켜봤다.

마법진의 빛에 갇힌 스키아가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2개로 늘어나 버렸다. 그리고 원래의 스키아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정령계로 돌아간 것이다.

마법진이 한순간 강렬하게 빛났다. 그리고 빛과 함께 정령도 사라져 버렸다.

―계약 완료. 소환 명령 코드는 스키아입니다.

정령 계약이 완료되었다. 이제 제론은 그림자의 정령 스키아를 보유한 두 번째 사람이 되었다.

"스키아."

제론의 부름에 스키아가 나타났다. 제론의 그림자에서 불쑥 솟구쳤는데 색이 프로인트의 것보다 훨씬 진했다.

"이런 식으로 보는 거였군."

제론은 스키아를 소환하자마자 프로인트가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얻었는지 알 수 있었다. 뇌리 한구석에 스키아의 시야가 그려졌다. 또한 소리도 들렸다.

그것이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오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직접 그려졌다. 참으로 특이한 방식이었는데, 제론은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테오스에서 마티를 통해 사방을 주시하던 훈련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같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제론은 스키아를 사방으로 움직여 봤다. 스키아의 움직임도 머릿속의 그 부분을 통해 제어가 가능했다. 제론의 제어는 프로인트가 하는 것보다 훨씬 능숙하고 빨랐다.

스키아의 제어는 그동안 정령을 다뤄 본 경험에서 도움을 얻었다.

"유적 밖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하군."

스키아는 마치 벽에라도 막힌 듯 유적 내부만 맴돌았다. 아니, 유적 전체를 다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로비만 계속 맴돌았다. 로비를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럼 슬슬 돌아가 봐야지. 확인할 것도 있고."

계약하는 순간 제론의 손을 빠져나갔으니, 순간적으로 프로인트와의 링크가 이어졌을 수도 있었다. 물론 유적의 특성을 생각하면 불가능했지만, 확인하는 게 나았다.

제론은 유적에서 나가 프로인트를 찾아갔다.

프로인트는 갑자기 돌아온 스키아 때문에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처음에는 스키아를 잃어버린 줄 알았다. 계약이 취소된 줄 알았다.

어떤 방법으로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프로인트는 스키아와 확실히 계약을 했다. 예전 제론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스키아는 이제 프로인트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그 상실감은 엄청났다.

그래서 성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안 그래도 독립 문제로 상당히 분주하고 바쁜 상황이었기에 프로인트는 여기거지 민폐를 끼치면서 다녔다.

당연히 눈총도 따라왔다. 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스키아를 찾아야만 했으니까.

그렇게 돌아다니던 중, 갑자기 스키아가 돌아왔다. 아니, 정령계로 돌아갔다. 프로인트는 스키아와의 링크가 연결된 걸 느끼고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대체 제론은 스키아를 데려다가 뭘 한 것인가. 스키아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프로인트는 일단 스키아를 달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다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제론이 올 것이라 믿었다.

이 일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제론뿐이었다. 프로인트는 방에서 1초를 1시간처럼 느끼며 제론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문이 열렸다. 프로인트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안도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제론이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프로인트는 반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영주님!"

너무나 격한 반응에 제론은 씨익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많이 놀란 모양이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제 정령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불안하다고?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일시적이지만 자유를 빼앗겼으니."

프로인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단순히 자유를 빼앗긴 걸로 이렇게 불안에 떨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 제론이 스키아를 손에 가뒀을 때 분명히 느꼈다.

스키아가 지금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함은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분명히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 것이다.

"잘 다독여 줘. 가능하지?"

"그야 그렇습니다만……."

제론이 또 씨익 웃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게는 보여 줘야 할 것 같아서."

제론의 말에 프로인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이내 경악으로 바뀌었다. 제론의 한마디에 의해서.

"스키아."

제론의 그림자에서 스키아가 불쑥 튀어나왔다. 프로인트는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제론의 그림자에서 나온 스키아는 자신의 스키아와는 달랐다. 프로인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스키아."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로 저것이 다른 정령인지. 말을 꺼냄과 동시에 확인이 되었다. 프로인트의 그림자에서도 스키아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 그림자의 정령과 계약하신 겁니까? 제 스키아를 이용해서?"

"그래. 아무튼 빌려 줘서 고마워. 정령은 조만간 안정을 찾을 거야. 내가 좀 도와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제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론의 스키아가 프로인트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두 스키아가 그 안에서 서로 뒤엉키며 놀기 시작했다.

프로인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스키아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동안 엄청나게 외로웠다는 사실도.

즐거움은 대번에 안정을 가져왔다. 자신이 다독이는 것보다 다른 정령과 노는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정령계에서 다른 정령과 어울릴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령계로 돌아가면 링크만 확인되지 시야가 공유되지 않으니 그런 건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자책하지 말고, 허탈해 하지도 마. 정령은 원래 그런 존재야."

"하지만……."

"앞으로 최대한 자주 불러 줘. 그게 도움이 될 테니까."

프로인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정령과 제론이 계약한 정령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가끔 찾아와 도와주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론은 빙긋 웃어 준 뒤 스키아를 돌려보내고 방에서 나갔다.

프로인트는 허탈한 표정으로 자신의 스키아를 바라봤다. 한참 보다 보니 점점 안쓰러워졌다. 자신의 무지 때문에 대체 얼마나 외로웠을까?

"미안하구나."

프로인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스키아가 바닥을 타고 빠르게 움직여 프로인트의 몸을 타고 손으로 올라갔다.

프로인트는 그 순간 스키아와 자신의 링크가 더욱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프로인트는 그 뒤로 기절할 때까지 스키아와 함께 놀았다.

놀랍게도 스키아를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더 늘어나 있었다. 이제는 30분이 지나도 끄떡없었다.

기절한 프로인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그리고 스키아가 그 미소에 드리워졌다. 물론 바로 정령계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 ☆ ☆

제론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와 당장 스키아를 불렀다. 프로인트와 스키아에 대한 대화를 많이 했기에 그 한계에 대해 들었다.

그러니 이젠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아야만 했다.

그림자를 타고 이동하는 스키아의 능력은 엄청났다. 세상에는 그림자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지가 계속 이어져도 하다못해 땅속에는 그림자가 진다.

흙 알갱이 아래에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그림자가 존재한다.

스키아는 그런 그림자를 타고 고속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거의 순간 이동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제론의 의념을 받은 스키아가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빠르게 성을 벗어나 멀리까지 이동했다.

처음 예상한 한계 거리는 성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였다. 프로인트의 경우는 범위가 그보다 훨씬 좁았다. 하지만 제론은 프로인트와는 좀 다르니 범위가 넓어질 거라 예상했다.

한데 막상 해 보니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도시를 벗어나 거의 영지 전체를 범위에 둘 수 있었다.

제론은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봤다. 스키아가 과연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또, 있다면 어느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게 가능한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시험했다.

프로인트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스키아는 그림자를 통해 이동한 다음 근처의 일을 보고 듣는 것 외에는 아무 능력이 없었다.

프로인트 역시 많은 시도를 해 봤지만 그것 외에는 어떤 능력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론은 자신과 프로인트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였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는 보통 사람에 비해 의지력과 집중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다.

그 의지력을 이용해 스키아에게 강렬한 의념을 보냈다. 스키아는 제론과 연결되어 있기에 어떤 의념이든 곧장 전달이 가능했다.

현재 스키아는 영지 끝에 있는 농지에 있었다. 제론은 스키아의 몸을 날카롭게 변형시킨 뒤, 자라는 밀의 밑동을 잘라 냈다.

당연히 처음에는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안되는 게 아니라 뭔가 가능성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래서 더 시도하고 애를 쓸 수 있었다.

싹둑!

20여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비록 밀 몇 가닥에 불과했지만 밑동을 잘라 낼 수 있었다.

이 정도 물리력을 이용할 수 있다면 상당히 유용할 것이다. 막말로 몰래 어딘가에 숨어 들어갈 때도 이용할 수 있었다.

스키아는 모양 변형이 자유로웠다. 열쇠에 딱 맞는 모양을 형성해서 잠긴 문을 따는 것도 가능했다.

제론은 한동안 스키아를 다루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3일을 푹 빠져서 산 끝에 스키아를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제론이 스키아에 매달리는 동안 에어스트 백작령의 독립 준비도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 ☆ ☆

워낙 에어스트 백작령의 행정 체계가 잘되어 있었기에 네이드 후작령을 흡수하는 일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애초에 처음 행정 체계를 세울 때,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또한 이번에 병합하면서 드러난 문제점을 파악하고, 향후 드러날 가능성이 높은 문제점까지 예측해 행정 체계를 보강했다.

이는 네이드 후작령을 통해 주변 영지를 언제든 병합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 의지는 영지의 수뇌부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네이드 후작령을 얻음으로 해서,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난민을 엄청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구는 언제나 에어스트 백작령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한데 그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그렇게 에어스트 백작령이 네이드 후작령을 병합하며 독립을 준비하고 있을 때, 1왕자가 기습적으로 수도를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 국왕의 인장을 차지해 버렸다. 1왕자는 스스로 레늄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거의 왕위 찬탈에 가까운 행위였다.

1왕자의 행동은 나머지 두 세력에 기폭제를 던져 넣은 셈이 되었다.

슈린 공작가는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2왕자를 숙청하고 새로운 왕국을 건국해 버렸다.

그렇게 되니 그때까지 분위기만 살피던 중립 세력도 발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적당한 합의점을 찾은 뒤 결국 건국했다.

하나의 강국이 3개의 소국으로 갈라져 버렸다. 아니, 4개의 소국으로 갈라졌다.

그 직후, 에어스트 백작령이 건국한 것이다.

☆ ☆ ☆

제론의 대관식은 성대했다. 사실 제론은 그런 형식적인 건 필요 없다고 주장했지만, 가신들이 끝까지 우겨서 그렇게 했다.

사실 제론은 독립이 중요했지, 자신이 왕이 되는 건 중요치 않았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어디든 이동하고 활동하면서 활발히 움직일 생각이었다.

재정적으로 풍족했기에 에어스트 왕국의 대관식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성대하고 화려했다.

그리고 건국 파티가 길게 이어졌다.

제론은 파티에 참석한 수많은 손님을 일일이 만나 인사를 나눠야만 했다.

그중에는 잘 아는 반가운 얼굴도 제법 많았다. 예를 들면 디아만트 후작가의 클레가 그러했다.

하지만 꼭 반가운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에 건국한 슈린 왕국에서 파인트가 왔다. 1왕자의 심복인 근위기사단장 몰트도 왔다.

그들은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밀약이라도 맺은 듯했다.

사실 슈린 왕국과 에어스트 왕국이 인접해 있으니 가장 먼저 손을 뻗을 수 있는 건 슈린 왕국이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 에어스트 왕국을 치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손을 잡은 것이다. 에어스트 왕국의 그 막대한 식량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수많은 귀족과 왕족이 참석했다. 에에스트 왕국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들을 모두 똑같이 대해 주었다. 누굴 더 반가워하지도 더 꺼려하지도 않았다.

사실 제론의 마음은 이미 대관식이나 파티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제론의 마음은 유적에 가 있었다.

이제 드디어 유적 14층 클리어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이스히스와 어떻게 싸울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그러니 파티에 집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설렁설렁 넘어가서도 안 된다. 이 파티는 향후를 생각하면 아주 중요했다.

그렇게 열흘이나 이어지는 파티가 끝났다.

하지만 파티가 끝났다고 모든 손님이 돌아간 건 아니었다. 아니,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에어스트 왕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또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눈에 불을 켰다.

제론은 그 모든 일에 관심을 끊었다. 그리고 설레는 가슴을 안고 유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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