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내전의 끝자락
레늄 왕국의 내전은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확률이 가장 높았다.
각 세력의 힘이 너무 팽팽했다. 사실 뒤에서 내전이 일어나도록 부추긴 자들도 그걸 염두에 두었기에 세력을 그런 식으로 맞췄다.
그렇기에 그들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만일 이대로 계속 가면 내전은 끝없이 이어질 뿐이었다. 각자 가진 힘이 끊임없이 소진되다 보니 불안함이 커졌다.
결국 이쯤에서 끝날 수밖에 없는 내전이었다.
사실 중립파 입장에서는 내전이 조금 더 길어져야만 했다. 중립파는 상대적으로 1왕자파나 2왕자파에 비해 가진 바 힘이 모자랐다.
만일 두 파가 손을 잡고 중립 세력을 핍박하면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전이 끝날 기미가 보이니 중립파에 긴장감이 돌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언제든 적의 침공을 막아 낼 수 있는 준비를 하는 한편, 힘을 한데로 모을 만한 제도적 장치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물론 그 논의는 1왕자파나 2왕자파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 그들도 힘을 모아 미래를 대비하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 논의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 ☆ ☆
"다들 개국을 선포하기로 한 모양이야."
제론의 말에 바이스와 카이트, 그리고 세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1왕자와 2왕자는 그렇다 치고 중립 지역의 왕은 문제가 좀 있겠는데요?"
카이트의 말에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들 문제가 심각해. 아마 내전보다 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지도 몰라."
"예? 그게 정말입니까?"
카이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바이스가 설명을 해 주었다.
"어차피 왕국을 찢어서 나라를 세우는 건데, 권력이라는 건 사람의 마음을 잡아먹는 괴물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충성을 바치던 주군을 배신한다고?"
"배신이 아니지요. 처음부터 딴맘을 먹고 있었다면요."
"처음부터? 설마……."
"일단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슈린 공작가가 있습니다. 그들이 순순히 왕권을 2왕자에게 넘길 리가 없습니다."
카이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슈린 공작가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그들이 가진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 힘을 두고 2왕자에게 충성을 바칠 리가 없었다.
"아마 2왕자는 숙청될 확률이 높아."
제론의 말에 다들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 정보는 바인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즉,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다는 뜻이었다.
"1왕자는 자리를 지킬 확률이 높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격변기였다. 이럴 때 잘못하면 휩쓸려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에어스트 백작령은 힘이 있었다. 거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지금까지 내실을 다지고 힘을 쌓아온 것 아니겠는가.
세 사람은 제론에게 주목했다. 제론이 뭔가 중요한 말을 꺼낼 것 같아서였다. 분위기가 그랬다. 뭔가 무거우면서도 긴박한 느낌이 좌중을 사로잡았다.
"우리도 독립한다."
제론의 말에 세 사람은 올 것이 왔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던 말이기도 했다. 건국하기에는 지금이 최적의 시기였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가장 큰 문제인 인구도 내전 때문에 난민이 잔뜩 발생했으니 그들을 흡수하면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했다.
돈이야 넘칠 정도로 있으니 다른 문제가 생겨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네이드 후작령을 친다."
"드디어 치는 겁니까?"
네이드 후작령은 기간트 문제 때문에 에어스트 백작령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만일 슈린 공작의 주도하에 개국을 하면 힘을 모아 에어스트 백작령에 쳐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굳이 그것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먼저 치면 훨씬 안전하게 네이드 후작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또한 네이드 후작령을 통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길을 마련할 수 있고 말이다.
"이번 기회에 우리 힘을 크게 공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네이드 후작령의 전력이 어떻게 되지?"
"현재 기간트 70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보병이 3천 명이고, 기병이 3백 명입니다."
보병 3천에 기병 3백이면 웬만한 후작령의 병력치고는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기간트가 70기나 있으니 모자라는 병력을 채우고도 남았다.
물론 에어스트 백작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병력이었지만 말이다.
"우리쪽 전력을 전부 동원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제론의 말에 카이트가 나서서 대답했다.
"맞습니다. 현재 우리가 보유한 기간트의 수가 조만간 350기를 넘어갑니다. 그걸 다 동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 부대는 총 5개 조로 나뉘어 있었다.
1조가 베테랑들로만 구성된 50기의 기간트였고, 2조부터 4조까지가 각각 100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숫자가 적을수록 더 뛰어난 라이더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그리고 마지막 5조는 아직 채 기간트를 지급받지 못한 예비 라이더로만 구성된 부대였다. 그 수는 무려 150명에 달했다.
그들은 50기에 달하는 실바를 이용해 끊임없이 기간트 훈련을 했다.
"좋은 기회이니 실전 훈련을 겸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3조와 4조를 동시에 동원하고자 합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압도적으로 적을 밀어붙이면서 약간의 실전 훈련도 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출전한다."
"예? 영주님도 말입니까?"
카이트가 놀란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이 함께 출전하면 아군의 피해는 엄청나게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래선 훈련이 안 될 수도 있었다.
"걱정하지 마. 앞으로 나설 생각은 없으니까. 분위기 봐서 특별한 변화가 생기면 나설 거야."
"특별한 변화 말입니까?"
"슈린 공작가의 개입 같은 것들."
카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일이 있으면 제론이 나서야 한다. 물론 아무리 슈린 공작가라 하더라도 200기의 기간트 부대를 쉽게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저력을 무시해선 안 된다.
카이트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영주님께서 나서 주시면 한결 마음이 놓이지요."
물론 카이트도 놀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들을 전체적으로 지휘해야만 한다. 이번 전쟁은 기간트 부대의 실전 훈련일 뿐 아니라, 카이트의 지휘 경험을 늘이는 기회이기도 했다.
카이트의 결연한 표정을 본 제론은 씨익 웃으며 시선을 돌려 세나를 쳐다봤다.
"어때? 진척은 좀 있어?"
"몇 가지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어요."
"그 부분에 대해 오늘밤에 나랑 의논을 좀 해 보는 걸로 하지."
"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하는 세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밤에 대화를 나눈다는 말에 발칙한 상상을 해 버린 것이다.
물론 세나가 바라는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대가 되었다.
"보조 엔지니어는 좀 구했나?"
제론의 물음에 세나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지금 수리 공방은 저 없이도 충분히 돌아갈 정도예요."
"그 정도야?"
세나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아무리 많은 기간트를 갖다주셔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어요."
"그럼 세나는 설계에만 전념하고 있는 건가?"
"아뇨. 수리에도 일부 개입하고 있어요. 엔지니어들에게 공개할 수 없는 부분은 제가 처리해야 하거든요."
"하긴, 전부 공개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세나가 가진 기술 중에는 외부로 알려져선 안 되는 것들이 상당히 많았다. 현존하는 기간트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기술이었다.
세나는 그중 가장 중요한 것들 몇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에어스트 백작령 소속 엔지니어에게 몽땅 공개해 버렸다.
물론 제론의 허락을 얻고서 한 일이었다. 단, 기술을 배우려면 최소 30년 이상의 장기 계약을 해야만 한다.
엔지니어 역시 신기술에 목마른 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30년 계약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엔지니어는 중요하지 않은 파트로 이동되었다. 물론 몇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설계는 막바지라 이거군."
제론은 대견스런 눈으로 세나를 쳐다봤다. 별로 도와준 것도 없는데 혼자서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간트 설계가 어디 보통 일인가. 한데 현존하는 그 어떤 기간트보다 뛰어난 새로운 기간트를 설계했다니, 아무리 대단하다고 칭찬해 줘도 모자랐다.
"좋아. 추수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차질 없습니다. 그리고 내년 파종도 차근차근 준비 중입니다. 내년에는 놀리는 영토 없이 모든 지역에 작물을 재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한 성과였다. 앞으로 식량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판로도 개척되어 있으니 판매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향후 페쿠니아 상단을 통해 곡물 유통을 시작하면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항구는?"
"진척이 그리 빠르지는 않습니다만, 내년이면 어떻게든 배를 띄우는 정도는 충분할 듯합니다."
"그럼 남은 건 암석 지대를 개간하는 것뿐인가?"
"도시 건설도 남았습니다."
"그렇지, 그것도 해야지."
꾸준히 노동력을 투입하고는 있지만 영주성을 중심으로 하는 계획도시 건설은 더디기만 했다. 아무리 기간트를 동원해도 마찬가지였다.
반드시 인간의 손이 필요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기간트로 할 수 있는 부분은 벌써 다 끝난 셈이었다.
이렇게 많은 일을 진행하는 와중에 전쟁까지 치러야 한다. 그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방에 있는 누구도 그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질 수가 없는 전쟁이었다. 다만 이 전쟁을 통해 슈린 공작가를 끌어낼 수 있느냐, 또 그들을 몰락시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선전포고는 내일 당장 하도록."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바이스가 나섰다. 바이스는 내심 이번 일이 총관으로서의 마지막 일이라 여겼다. 그는 이제 진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적임자도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날의 회의가 끝났다. 향후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키게 될 내용을 담고서 말이다.
☆ ☆ ☆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제론은 태블릿을 꺼냈다. 확인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자, 그럼 진행하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볼까?"
제론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경매 진행 상황이었다. 확인은 아주 간단했다. 펠젠은 매일 경매 진행 상황을 마법의 거울을 통해 바인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보고 내용은 고스란히 제론의 태블릿에도 저장된다. 제론은 그것만 확인하면 끝이었다.
제론이 확인하고 싶은 물건은 바로 라쿠스의 설계도였다. 워낙 대단한 물건인지라, 경매가 하루에 끝나지 않았다. 경매를 시작한 지 벌써 5일이 지났는데도 결판이 안 났다.
"슬슬 마무리될 때가 되었는데……."
아무리 기간트의 설계도라 하더라도 그 가치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경매 시작 전에 이번 경매에 대한 정보를 슈린 공작가에 흘렸다.
결국 슈린 공작가도 경매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경매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버렸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경매에 대한 보고서를 찾았다. 그리고 눈을 빛냈다.
"2300만 골드라……."
정말 엄청난 액수에 팔렸다. 아무리 새로운 기간트의 설계도라지만 상당히 높은 액수였다. 어차피 설계도만으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설비를 갖춰야 생산을 할 수 있다.
기간트 생산에 들어가는 원가도 만만치 않기에 이 설계도를 사서 이익을 얻으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한데 그렇게 오래되면 기간트도 결국 구형으로 밀려날 공산이 컸다.
물론 실바의 경우를 생각하면 아무리 구형으로 밀려나더라도 값어치가 많이 떨어지지는 않지만 말이다.
제론은 다시 태블릿을 조작했다. 그리고 바인에게 연결해 과연 누가 설계도를 낙찰받았는지 확인했다.
"역시!"
제론의 얼굴이 환해졌다. 설계도는 슈린 공작가에서 낙찰받았다. 완벽하게 계획대로 된 것이다.
슈린 공작가에서는 설계도를 구입하며 그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짜라는 걸 확인하고는 치를 떨었다. 그리고 배신자를 찾느라 온 영지를 들쑤시는 중이었다.
슬슬 라쿠스가 생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판로를 준비 중이었다. 슈린 공작가의 도약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그러니 개국을 생각하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제대로 고춧가루를 팍팍 뿌려 주지."
이제 미리 준비한 라쿠스의 약점을 공개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대놓고 할 생각은 없었다. 아주 은밀히 정보 조직을 통해 퍼뜨릴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라쿠스를 사려는 자들은 그런 정보 조직의 정보를 싹 훑을 수 있을 정도로 힘과 능력이 클 테니까.
제론이 준비한 라쿠스의 약점은 아주 치명적인 것들이었다. 구조적인 결함에서 발생한 약점이었고, 마법진의 설계가 잘못되어 생겨난 약점이었다.
"이 약점을 극복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제론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 ☆ ☆
"뭣이!"
네이드 후작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전포고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에어스트 백작령이 왜 난데없이 선전포고를 한단 말인가. 예전에 앙금이 좀 있긴 했지만 어차피 그건 다 해결되지 않았던가.
"허가는! 왕실의 허가는 어떻게 되었느냐!"
"아예 영지전 신청도 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네이드 후작은 어이가 없었다. 아예 영지전 신청도 하지 않고 선전포고를 하다니. 이건 엄연히 왕국법 위반이었다. 이대로 수도 행정청에 보고를 하고 이의를 제기하면 에어스트 백작령은 징계를 피할 수 없었다.
"당장! 당장 수도 행정청에 연락을 해라! 어서!"
에어스트 백작령의 힘은 예전에 뼈저리게 느꼈다. 그 때문에 기간트의 수를 70기까지 억지로 늘렸다. 하지만 이대로는 결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가신들이 후다닥 움직였다. 그들도 일단 왕국의 개입을 최대한 빨리 이끌어 내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쟁 준비도 해라! 만일의 사태에 시간을 최대한 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네이드 후작의 명령은 당연했다. 하지만 에어스트 백작령이 독립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렇게 미온적인 대처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네이드 후작의 첫 번째 패착이었다.
"슈린 공작가! 슈린 공작가에 도움을 청해라!"
네이드 후작은 슈린 공작가가 절대 외면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이곳 네이드 후작령은 에어스트 백작령을 견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영지였다.
네이드 후작령이 에어스트 백작령에 넘어가면 에어스트 백작령은 사방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길을 얻게 된다. 물론 사방에서 쳐들어올 수 있는 길을 막아 내기도 해야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에어스트 백작가가 외부로 뻗어 나가는 것은 슈린 공작가로서는 절대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에어스트 백작가는 끝까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가 결국 처참히 짓밟혀야만 할 곳이었다.
☆ ☆ ☆
쿵! 쿵! 쿵! 쿵!
선전포고를 한 지 정확히 사흘째, 200기의 기간트가 진군을 시작했다. 에어스트 백작령 기간트 부대의 3조와 4조였다.
경험이 좀 부족하긴 했지만, 엄청난 훈련을 받았다. 긴장해서 제 실력을 못 내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 훈련은 어마어마하게 빡세다. 또한 군부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 거의 일대일로 훈련을 봐 준다.
그러니 실력이 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쿵! 쿵! 쿵! 쿵!
네이드 후작령의 기간트 70기가 쫙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깊은 해자를 파 놓고 기다렸다.
에어스트 백작령 측 기간트 부대가 일제히 진군을 멈췄다. 이대로 가면 해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해자는 흙탕물로 꽉 채워져 있어서 깊이를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제론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기간트도 소환하지 않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마법진을 통해 모습을 감추고 몸을 위로 띄웠기에 전장을 넓게 확인할 수 있었다.
200기의 기간트 뒤로 발굴형의 정점에 있는 기간트, 히엠스가 서 있었다. 당연히 그것은 얼마 전에 교체한 카이트의 기간트였다.
카이트는 길게 파인 해자를 보고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4조는 뒤로 물러나서 바위를 준비해라. 3조는 적을 견제하며 천천히 전진!"
쿵! 쿵! 쿵! 쿵!
200기에 달하는 기간트가 카이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앞에 선 3조는 천천히 전진했고, 뒤에 있던 4조는 사방으로 흩어져 바위를 모으기 시작했다.
작전은 단순했다. 바위를 던져 공격을 하는 것이다. 적에게 피해를 주면서 동시에 해자를 어느 정도 메울 수 있는 방법이었다.
바위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너무 큰 바위는 던질 수가 없기에 적당한 크기의 바위를 구해야만 했다. 그 점이 살짝 까다로웠다.
하지만 근처에 있던 나무까지 뽑아서 모으자, 금방 던질 만한 양이 모였다.
카이트는 지체하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3조는 바위와 나무를 던진다!"
3조의 기간트 100기가 일제히 바위를 들었다.
그러자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 준비했는지 커다란 강철 방패를 들고 전면을 막았다.
그들의 목표는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준비는 비교적 철저히 했다. 이렇게 해자를 파고 기다릴 경우 할 수 있는 공격이 바위나 나무를 던지는 것 외에는 없다고 판단해서 준비한 방패였다.
카이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자를 메울 목적도 있었다.
"던져!"
휘잉! 휘잉!
커다란 바위가 허공을 휙휙 날아갔다.
꽈과광!
바위가 강철 방패를 사정없이 두드렸다. 어찌나 강한지 방패를 든 기간트가 뒤로 주춤 물러날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튄 바위 중 일부가 해자로 떨어졌다.
첨벙! 첨벙!
카이트는 뒤에서 바위가 해자에 떨어지는 광경을 유심히 관찰했다. 해자의 깊이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3조는 계속 던져! 4조는 바위를 찾아! 그리고 흙을 준비해!"
적이 방패로 몸을 가리고 있으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가까이 접근해 해자에 흙을 부어 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4조의 기간트 중 절반이 흙을 파기 시작했다. 흙을 담을 도구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커다란 강철 방패가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이거 어려워지겠는데? 슈린 공작가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나?"
네이드 후작령의 기간트 부대를 지휘하는 기사단장이 소리쳤다. 200기나 되는 적의 위용을 보니 싸울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다.
게다가 적의 대장은 무려 히엠스를 가지고 나왔다.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네이드 후작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시간을 끌면서 슈린 공작가의 지원군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기사단장은 어두운 얼굴로 점점 메워지는 해자를 바라봤다. 착잡했다. 저걸 파느라 얼마나 애썼는데 저렇게 쉽게 채워진단 말인가.
"설마 저런 방패를 준비했을 줄이야."
강철 방패를 마치 삽처럼 이용해 땅을 쑥쑥 파는데, 한 번 방패가 움직일 때마다 흙이 산처럼 쌓였다. 그걸 방패에 담아 해자에 들이부으니 얼마나 금방 메워지겠는가.
이대로 두면 곤란했다. 슬슬 이쪽에서도 대응하지 않으면 금방 해자를 넘어 달려들 것이다.
"준비해라!"
기사단장의 명령에 후작령 측 기간트들이 강철 방패 안쪽에 붙어 있는 랜스를 꽉 쥐었다. 잘 숨겨 뒀다가 적이 가까이 다가오면 냅다 던질 계획이었다.
이 작전을 위해 비록 몇 시간이지만 엄청나게 빡센 훈련까지 했다.
방패에 흙을 담은 기간트들이 해자로 다가왔다.
쿵! 쿵! 쿵! 쿵!
기사단장은 긴장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이것은 타이밍이 중요했다. 창을 막거나 피하기 어려운 자세나 상황에서 던져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기간트들이 해자에 흙을 일제히 부었다.
촤아악!
기사단장의 눈이 번득였다. 바로 지금이었다.
"던져!"
기사단장의 명령에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들이 일제히 방패에서 창을 뽑아 던졌다.
쐐액! 쐐액! 쐐애애액!
무려 70개의 철창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비록 넓긴 하지만 고작 해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던진 창이었다. 그 위력이 얼마나 엄청나겠는가.
한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방패에 담긴 흙을 쏟던 기간트들이 일제히 방패를 위로 쑥 들어 올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철창이 방패를 꿰뚫었다. 하지만 방패를 든 기간트에 닿지는 않았다. 뚫은 채로 방패에 박힌 것이다.
50기의 기간트에게 철창이 생겼다. 그리고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 라이더는 평소에 창 다루는 훈련을 지독할 정도로 심하게 한다.
50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방패에 박힌 창을 뽑았다. 철창이 아주 간단히 쑥쑥 뽑혀 나왔다.
기간트들이 투창 자세를 취했다. 목표는 당연히 해자 건너편의 기간트들이었다.
네이드 후작령의 기간트들이 당황하며 방패로 앞을 막았다. 워낙 큰 방패였는지라 온몸을 다 막을 수 있었다.
끼기기긱!
50기의 기간트가 몸을 크게 뒤로 젖혔다. 기간트로 할 수 있는 거의 한계의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탄력을 만든 기간트가 그대로 몸을 앞으로 꺾으며 창을 던졌다.
쿠오오오오!
어마어마한 위력의 창이 앞으로 쭉 날아갔다. 바람을 찢으며 날아간 창이 정확히 방패에 꽂혔다.
놀라운 점은 50개의 창이 꽂힌 방패의 위치가 각각 모두 같다는 사실이었다.
꽈드드득!
창은 맹렬히 회전까지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투창 실력이었다.
쿵쿵쿵쿵!
어찌나 위력이 대단했는지 창을 방패로 받아낸 기간트들이 일제히 뒤로 몇 발 물러났다. 힘에 밀린 건 아니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간트를 조종하는 라이더가 당황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창은 방패를 쥔 기간트의 팔에 정확히 꽂혀 버렸다.
그 바람에 팔이 망가져 버렸다. 투창이 회전하면서 팔 관절에 새겨진 마법진을 손상시킨 것이다. 물론 축이 되는 부속들도 망가졌고 말이다.
50기의 기간트가 그렇게 팔을 잃었다. 그리고 방패와 손이 창에 꿰어 다시 방패를 떼어 내기가 어려워졌다.
당연히 카이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렸던 기회인데 그걸 놓친단 말인가.
적이 창을 준비했다는 걸 미리 알고 준비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위해 투창 연습을 며칠이나 했다.
"진격!"
카이트의 외침에 기간트들이 일제히 앞으로 움직였다.
쿵! 쿵! 쿵! 쿵!
해자 앞에 도착한 기간트들이 미리 들고 간 바위를 해자 안으로 던졌다.
첨벙! 첨벙!
그렇게 해도 해자를 완전히 메울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이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이를 대비한 작전까지 미리 준비해 뒀다.
기간트들이 일제히 방패를 해자에 비스듬히 박았다.
콰직!
해자를 어느 정도 메워 놓았기에 방패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고 물 위에 끝 부분이 드러났다.
무려 100개의 방패가 그렇게 해자 곳곳에 꽂혔다.
방패가 꽂히자, 기간트들이 거침없이 앞으로 진격했다. 넹드 후작령의 기간트는 방패가 앞을 가리고 있어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쿵! 쿵! 쿵!
방패 2개를 연달아 밟으면 해자를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방패가 깊이 박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총 50기의 기간트가 해자를 넘어갔다.
콰과과광!
50기의 기간트가 그대로 앞으로 돌격해 적의 방패를 두드리며 밀었다.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의 진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리고 진형이 무너진 기간트 부대는 더 이상 큰 힘을 내지 못했다.
그렇게 50기의 기간트가 적을 상대하는 사이 나머지 기간트들이 급히 해자를 메우고 건너갔다.
200대 70의 싸움은 금방 끝났다. 더구나 한쪽은 팔 한 짝이 망가진 상태였다. 싸움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 부대가 네이드 후작령의 기간트 부대를 일방적으로 박살 냈다.
싸움은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사실상 영지전이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슈린 공작가의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전력은?"
"기간트 100기입니다."
수하의 보고에 카이트는 씨익 웃었다. 이쪽은 거의 피해 없이 200기의 기간트를 고스란히 남겼다. 그러니 200대100의 싸움이 된 것이다.
"가자!"
카이트의 명령에 200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굉음을 토해 내며 앞으로 이동했다.
쿵! 쿵! 쿵! 쿵! 쿵!
네이드 후작령을 거의 가로지르듯 지나친 기간트 부대는 적이 보이는 곳에서 멈췄다.
슈린 공작가 측 기간트가 잔뜩 보였다. 그들은 카이트가 이끌고 온 200기의 기간트를 보고는 크게 당황했다. 설마 이런 상황이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사실 지금 온 100기가 1차 지원군이고 2차와 3차 지원군을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이곳에 있는 기간트의 수가 100기라는 점이었다.
"자비를 버려라. 돌격!"
카이트는 다짜고짜 명령했다. 적은 아직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 부대와 합류해 시간을 끌며 적을 상대하려 했는데, 이렇게 적과 맞닥뜨렸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에어스트 백작령 측 기간트 부대의 가장 앞에서 카이트의 히엠스가 달려갔다. 지금은 적을 한바탕 휘저어 주는 것이 중요했다.
꽈과과광!
카이트가 적 안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상당히 무리를 했다. 카이트는 제론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카이트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적은 아직 고작 하나다! 일단 이놈부터 부숴!"
슈린 공작가 측 기간트 부대의 대장이 외쳤다. 그는 분명히 히엠스를 박살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쿵쿵쿵쿵!
어느새 나타난 붉은 실바 하나가 슈린 공작가 측 기간트 진형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꽈과과과광!
붉은 실바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순식간에 진형이 무너졌다. 그로 인해 처음 파고든 카이트의 히엠스도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진형이 무너진 기간트 부대를 200기의 기간트가 그대로 덮쳤다.
꽈과과과과광!
싸움은 싱거울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슈린 공작가에서 보낸 100기의 기간트는 허무하게 스러져 갔다.
그걸로 영지전이 완전히 끝났다.
슈린 공작가에서 준비한 2차, 3차 지원군은 중간에 돌아갔다. 더 전쟁을 이어가 봐야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은 깔끔하게 네이드 후작령을 포기했다.
하지만 잠시 손을 떼는 것일 뿐이었다. 슈린 공작가는 에어스트 백작령의 그 어마어마한 곡창 지대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더 확실히 준비해서 단번에 몰아치기로 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슈린 공작가는 에어스트 백작령 말고도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또한 에어스트 백작령과 싸우느라 전력을 더 소비하는 건 개국에 지장을 줄 수도 있었다.
일단은 그게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