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나베 공작가
제론은 아벤드의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아베티스 영지로 향했다.
조만간 또 아벤드에 와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들 예정이었다. 마티를 풀어 놓는 건 실패했으니, 차선책이라도 만들어 둬야만 했다.
일단 정보는 펠젠을 통해 얻으면 되니,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들어 원할 때마다 왕복할 수 있게 만들어 두기로 했다.
물론 아직은 아니었다. 9번째 마나링을 만든 다음의 일이었다.
아베티스 영지까지 가는 건 금방이었다. 처음 아벤드로 갈 때야 적을 유인하기 위해 며칠을 걸었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제론은 한시라도 빨리 나베 공작가를 정리하고 슬슬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어제 바인이 전한 얘기를 듣고 나니 돌아갈 생각이 들었다. 슬슬 내전이 마무리 단계로 들어갔다고 한다.
분위기를 보면 레늄 왕국은 3개로 토막 날 듯했다. 1왕자와 2왕자의 세력 구도가 참으로 비슷해서 어느 한쪽이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거기에 중립 세력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이 딱 적기였다. 왕국이 3개로 갈라지는 마당에 에어스트 백작령이 독립을 해 버리면 그들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령까지 신경을 쓸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제론은 일단 네이드 후작령을 집어삼키고, 거기까지 한데 뭉뚱그려 왕국으로 선포해 버릴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아베티스 영지의 일을 빨리 마무리해야만 했다. 나베 공작가를 무너뜨릴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아베티스 영지를 키워 나베 공작가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드는 건 가능했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나베 공작가를 무너뜨리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나베 공작가는 아베티스 영지의 루이네에게 맡겨 두기로 했다.
아마 루이네는 잘해 나갈 것이다. 적당한 힘만 실어 준다면 말이다.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던 제론은 어느새 아베티스 영지에 도착했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영주성으로 향했다.
채무 변제일이 이제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루이네를 만나 그녀를 안심시키고,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할 생각이었다.
제론은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성으로 들어가 루이네를 찾아갔다. 워낙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였기에 제론이 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제론이 이렇게 은밀히 움직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베티스 영지의 정보를 총괄하던 중년인을 의식한 것이다.
그를 떠올리니 갑자기 아벤드로 찾아온 다섯 사내가 떠올랐다. 그들은 아직도 제론의 뒤를 캐겠다고 아벤드를 구석구석 뒤지고 있었다.
제론은 딱히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각자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정보망은 완전히 뭉개졌다. 이번 폭동에 휩쓸리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굳이 제론이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사라져 줄 것이다. 그들은 제론이 아벤드를 떠났다는 사실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제론은 성에 들어서자마자 루이네를 찾아다녔다. 일단 집무실로 갔는데 없어서 성 곳곳을 둘러보며 감각을 활성화시켰다.
소드 마스터의 위력이 여실히 발휘되었다. 제론은 단번에 루이네의 위치를 찾아냈다.
'대충 저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되겠군.'
벽을 뚫고 갈 수는 없으니 길을 잘 찾아야 했다. 제론은 복도와 계단을 몇 번 이동하며 루이네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자고 있군.'
방문 앞에 선 제론은 루이네의 상태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고른 숨소리와 몸 상태를 토대로 유추하면 지금 한창 단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물론 제론은 그런 상황을 전혀 고려해 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한시가 바쁜 상황이었다. 자신에게도, 또 아베티스 영지에도 말이다.
제론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잠겨 있었지만 마나를 이용해 아주 간단히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는 물론이고 문을 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제론은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루이네를 지키는 기사들이 옆방에 있었지만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방문이나 창문이 열리면 마법적 장치를 통해 옆방에 바로 신호가 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장치는 제론에게 무용지물이었다.
제론은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얌전히 누워 자고 있는 루이네를 향해 차가운 기운을 흘려보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루이네는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그리고 누군가 앞에 서 있는 걸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지르려 했다.
"흡!"
루이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누군가 입을 콱 막은 것처럼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쉿! 소리 지를 필요 없어. 나 기억 안 나?"
루이네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그제야 눈앞의 상대가 누군지 알아본 것이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입이 움직여졌다.
"어, 언제 오셨어요?"
"지금. 변제일 얼마 안 남지 않았어?"
"그, 그야……."
루이네는 그동안의 맘고생이 갑자기 떠올라 왠지 억울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늦지 않게 돌아와 줘서 정말로 고마웠다.
"영지에 믿을 만한 라이더는 좀 있나?"
"예? 라이더요? 당연히 있죠. 왜 그러시죠?"
"영지 전력을 높여 두려고. 나베 공작가랑 싸우려면 그래야 하지 않아?"
나베 공작가라는 말에 루이네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그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만일 제론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계략에 휘말려 영지를 고스란히 빼앗겼을 것이다.
"좋아. 채무 변제에 특별한 조건이나 금기가 있나? 예를 들어 상단의 채권으로 갚을 수 없다거나."
"잠깐만 기다리세요."
루이네는 침대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림을 치우자 금고가 나타났다.
금고를 연 루이네는 그 안에서 계약서 하나를 꺼냈다. 금고 안에는 계약서 외에 몇 개의 서류가 있었는데, 다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게 계약서예요."
제론은 그것을 받아 찬찬히 읽었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대금 상환은 금이나 테페룸으로 하게 되어 있는데?"
"그럴 리가요."
솔직히 루이네는 이 계약서를 자세히 살펴본 적이 없었다. 빚이 얼마인가 하는 부분만 살펴봤지 내용을 하나하나 뜯어보지는 않았다.
루이네는 제론으로부터 계약서를 돌려받아 확인했다.
분명히 그런 문구가 있었다. 다른 문구보다 훨씬 작은 글자로 되어 있는 데다가 중간에 살짝 끼어 있어 잘 확인이 어려웠다.
"어떻게 이런……."
루이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채무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금으로 낸단 말인가. 테페룸은 더 말이 안 된다. 금보다야 부피가 훨씬 줄어들겠지만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어쩌죠? 혹시 금을 준비하실 수 있나요?"
"테페룸으로 하지. 훨씬 부피가 적잖아."
제론은 그게 훨씬 나았다. 다시 가져오기도 편하지 않은가. 테페룸이라면 특별한 마법을 이용할 방법이 여러 가지 있었다. 굳이 몰래 숨어 들어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시 가져올 수 있었다.
제론은 계약서를 더 살펴봤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계약이 너무 엉망이었다.
"채무 변제는 가이츠 남작에게 네가 직접 하게 되어 있군? 가이츠 남작이 지금 어디 있는지 확인은 했나?"
"네. 아직 우리 영지를 떠나지 않았어요."
"확실해? 이놈이 숨어 버리면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루이네의 안색이 더 창백해졌다. 하지만 분명히 확인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직접 확인한 거야? 감시는 하고 있었고?"
루이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제론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다려. 확인해 보고 오지."
제론이 창을 통해 밖으로 훌쩍 뛰어나갔다. 가이츠 남작이 어디 있는지 알기에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또, 혹시 사라졌어도 측근들을 족치면 어떤 식으로든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확인은 금방 끝났다. 없었다. 문제는 가이츠 남작이 사라진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는 점이었다.
제론은 모든 걸 확인하고 다시 루이네의 방으로 돌아왔다. 고작 2시간 만의 일이었다.
루이네는 불안한 얼굴로 제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라졌다."
순간 루이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라졌다니. 분명히 어제도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한데 갑자기 왜 사라진단 말인가.
"사라진 지 닷새는 지난 것 같던데? 가이츠 남작에 대한 보고는 누가 했지?"
가신 중 하나가 가이츠 남작을 전담했다. 루이네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어떻게 피땀 흘려 가꾼 영지를 팔아먹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하아, 제가 가신들을 너무 믿었네요."
"가신을 정리하는 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하지. 여길 봐라."
제론이 손가락으로 계약서의 한 부분을 짚었다.
그 부분을 읽은 루이네의 표정이 굳었다.
"가이츠 남작이 없으면 나베 공작가에 주기로 되어 있네요."
대체 계약서가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계약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루이네에게 분명히 문제가 있었지만, 계약서를 작성할 때 함께 있었던 가신에게도 큰 문제가 있었다.
아니, 가신을 너무 믿었다. 이젠 더 이상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일단 난 테페룸부터 준비해서 내일 아침에 돌아오지. 나베 공작가까지 강행군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제론의 말에 루이네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제론이 말하는 강행군이 어느 정도인지 한 번 겪어 봤다. 하지만 그 강행군조차 제론이 많이 사정을 봐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정 안 봐주고 강행군을 하면 대체…….'
루이네는 결심했다. 이번에는 예거를 떼어 놓고 가야겠다고 말이다.
제론은 성의 빈방에 들어갔다. 아무도 오지 않을 법한 방이었기에 선택한 곳이었다. 이제부터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나베 공작령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2번이나 이용해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루이네의 몸에 부담이 가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오는 건데 그랬군."
하루만 일찍 왔어도 조금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을 해 봐야 뭐 하겠는가. 제론은 서둘러 아공간에서 테페룸을 꺼냈다.
계약서에 명시된 테페룸의 무게를 정확히 재서 꺼냈다. 테페룸은 상당히 많았다. 예전에 슈린 공작가가 이송 중이던 것을 빼앗은 것도 있었고, 유적을 발굴하면서 얻은 것도 있었다.
제론은 방 한가운데에 쌓아 둔 테페룸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위이이이이잉!
8개의 마나링이 일제히 가속했다. 그리고 제론의 손바닥 앞에 상당히 복잡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샤아아아아.
마법진이 흩어지며 바닥에 놓인 테페룸 덩어리들을 향해 빛가루가 쏟아져 나갔다.
빛가루를 흡수한 테페룸 덩어리들이 흐물흐물해지더니 금세 녹아 버렸다.
제론의 손앞에 새로운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리고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샤아아아아.
흐물흐물하게 녹은 테페룸이 한데 뭉쳐졌다. 그리고 커다란 육면체로 변했다. 테페룸 덩어리들이 하나의 괴로 바뀐 것이다.
다른 마법사들이 봤으면 경악을 금치 못할 광경이었다. 테페룸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건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했다.
테페룸의 정형이 가장 중요한 분야는 당연히 마나 코어였다. 마나 코어에 들어가는 테페룸의 모양을 얼마나 잘 만드느냐에 따라 마나 코어의 효율이 정해진다.
하지만 제대로 정형할 기술이 없기에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마나 코어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한데 제론은 간단한 마법으로 테페룸을 물처럼 녹여 버렸다. 또한 모양을 만들어 굳혔다.
제론은 완성된 테페룸괴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표면이 매끄러운 것이 상당히 잘 만들어졌다. 아마 이 테페룸괴를 이 상태로 보면 다들 기절할지도 모른다.
제론은 거대한 테페룸괴에 손바닥을 올렸다.
위이이이잉!
마나링이 거세게 회전했다. 그리고 마법진이 떠올라 테페룸괴 안으로 스며들었다.
촤르르륵!
테페룸괴가 반듯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그리고 일반적인 테페룸괴 모양으로 나뉘었다. 물론 단면은 다른 테페룸괴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럽고 모양도 훌륭했다.
하지만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제론은 테페룸괴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그것을 꽉 쥐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면서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8개의 마나링이 일제히 기음을 토해 냈다.
위이이이이이이잉!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테페룸괴 내부가 살짝 물러졌다. 그 부분을 날카로운 마나가 파고들었다.
사각! 사각! 사각!
테페룸괴 내부에 정교한 마법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테페룸의 특성을 이용한 마법진이었다. 입체적인 모양의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졌고, 그 안에 제론의 마나가 겹겹이 압축되어 채워졌다.
"후우, 생각했던 것보다 쉽지 않은데?"
제론은 테페룸괴를 옆에 내려놓고 다른 테페룸괴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 전과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수많은 테페룸괴에 몽땅 마법진이 새겨졌다. 제론은 그 일을 하면서 땀을 뻘뻘 흘렸다. 정신력과 체력 소모가 엄청났다.
모든 일을 마무리한 제론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마나 컨트롤 능력이 훨씬 늘어났다. 그걸 스스로 느낄 정도로 성장을 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9번째 마나링을 만드는 것도 그리 먼 일이 아니었다.
제론은 완성된 테페룸괴를 아공간에 넣고는 침대에 누웠다. 일단 오늘은 피곤하니 얼른 쉬고 내일 일찍 움직여야만 했다.
강행군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 ☆ ☆
루이네는 늘어져 바닥에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가누며 비틀거렸다.
그저 많이 걸은 것도 아니고,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아니었는데도 너무나 힘들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연달아 2번 이용한 것이 컸다.
텔레포트는 게이트는 이용할 때마다 몸에 막대한 부하를 건다. 그렇기에 이동한 다음 하루 정도 푹 쉬어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심지어 몸을 극도로 단련한 익스퍼트라 할지라도 몸에 무리가 가는데, 루이네는 그저 일반인이었다. 한데 2번을 연달아 사용했으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이러고 있을 시간 없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루이네의 등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순간 제론의 심장에 있던 마나링 하나가 가속하며 손바닥에서 미약한 빛이 일어났다.
샤아악.
루이네의 등에 생겨난 마법진이 흩어지며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루이네는 거짓말처럼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왠지 힘이 나네요."
루이네는 설마 제론이 마법을 이용해 자신을 도와줬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나베 공작가의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힘이 났다고 여겼다.
"나베 공작을 직접 만나야 하니까 서두르는 게 좋아. 쉽게 만나 줄지 확신할 수 없잖아?"
루이네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죠."
"앞장서라."
그 말에 루이네가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그 걸음에는 결연함이 잔뜩 담겨 있었다.
제론은 루이네의 뒤를 따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벌써 사방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베 공작을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저놈들이 과연 나베 공작의 힘일까, 아니면 배후의 힘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나베 공작의 힘을 줄이는 것이 그 배후의 힘을 줄이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제론의 걸음에 조금씩 살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살기는 끈적끈적하게 주위를 휘감으며 사방으로 촤악 깔려 퍼져 나갔다.
☆ ☆ ☆
나베 공작은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도착했다고? 지금? 그럴 시간이 없었을 텐데?"
"텔레포트 게이트를 2번 연달아 써서 왔다고 합니다."
"무리했군. 뭐, 그래 봐야 거기까지일 테지만. 가이츠 남작은 어쩌고 있나?"
"성에서 쉬고 있습니다."
"공증인은 데려왔던가?"
"공증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 하나를 달고 왔습니다."
"남자?"
"예. 젊은 남자였는데, 정확한 정체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나베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못마땅할 때 내보이는 버릇이었다.
"변제일이 정확히 언제지?"
"내일입니다."
"오늘 밤까지 그 남자의 정체를 알아 와."
"알겠습니다."
수하는 죄송스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는 명백히 자신의 잘못이었다. 조금의 변수도 만들어선 안 되는데, 벌써 변수가 몇 개나 생겼는지 모른다.
"가이츠 남작 관리 잘 하고. 공증인 수배를 막는 것도 잊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수하가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가자, 나베 공작은 눈살을 찌푸린 채 와인 잔을 기울였다.
피처럼 붉은 와인이 찰랑거렸다.
"채무는 금이나 테페룸으로 하게 되어 있을 텐데…… 부피로 봐서는 금을 가져온 건 아닐 테고, 테페룸인가?"
사실 테페룸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테페룸은 그만큼 구하기 어려운 귀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비쌌다.
테페룸 광산 하나만 얻으면 수십 대가 부를 누리며 살 수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만일 정말로 테페룸을 준비했다면, 그걸 미리 강탈하는 방법이 가장 쉬웠다. 은밀히 숙소에 사람을 보내 훔쳐 오는 수도 있고 말이다.
어쨌든 나베 공작에게 한없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루이네가 아무리 돈을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루이네는 제대로 된 공증인을 준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테페룸을 받은 뒤 입을 씻어 버리는 방법도 치사하지만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루이네 고것이 이제 제법 물이 올랐지?"
나베 공작은 가이츠 남작이 루이네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쨌든 루이네에게 남자의 흔적을 가장 먼저 남기는 건 자신이어야만 했다.
나베 공작의 추잡한 욕망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 ☆ ☆
"공증인은 구했나?"
루이네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백작님이 해 주시면 안 되나요? 붉은 학살자라면 공증인의 자격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이곳 헥서 왕국에서는 붉은 학살자의 인기가 기이할 정도로 높았다. 그걸 이용하면 공증인의 자격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보다 더 확실한 걸 원했다. 또한 아직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따라와라."
제론은 나베 공작성으로 가다가 방향을 틀었다.
역시 사람 인연은 중요하다. 이럴 때 써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제론이 향한 곳은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였다.
나베 공작령에도 당연히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가 있었다. 디아만트 상단은 대륙 전역에 걸쳐 활동하는 거대한 상단이었다.
달리 대륙 제일의 부를 두고 다툰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를 발견한 제론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가던 루이네가 당황할 정도였다. 갑자기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에는 왜 왔단 말인가.
"여긴 왜 오신 건가요?"
루이네가 걱정스런 눈으로 제론에게 따라붙으며 물었다. 제론은 그녀를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앞을 보며 대답해 주었다.
"공증인을 구하러 왔다."
"여기서요?"
루이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공증인을 왜 상단에서 구한단 말인가. 공증인의 자격을 갖추려면 일단 귀족이어야 했다. 또한 상당한 인맥과 영향력이 필요했다.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장쯤 되려면 귀족이어야 해. 몰랐나?"
루이네의 눈이 커다래졌다. 만일 그렇다면 공증인으로서는 딱이였다.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장쯤 되면 그 영향력이 공작령 내에서는 아주 확실할 테니까 말이다.
루이네는 걱정스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사실 이곳에서 공증을 거절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공증을 거절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이곳은 나베 공작령이었다. 나베 공작령에 지부를 두고 장사하면서 나베 공작가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닥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제론을 따라갔다. 제론이 워낙 자신만만해서 조금이나마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상단의 직원이 제론에게 다가가 물었다. 제론은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루이네의 불안한 시선이 보였다.
"지부장을 만나고 싶은데."
"미리 약속을 하셨습니까?"
제론이 고개를 젓자 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장은 아무나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단의 업무에 관한 일은 직원 선에서 대부분 해결한다. 지부장은 지부장이 나설 만한 일에만 나서기에 미리 약속을 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은 결코 만나 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찾아온 상대의 분위기를 보니 귀족이 분명했다. 귀족을 홀대하면 문제가 생길 소지가 컸다. 물론 디아만트 상단이 꿀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분란을 나서서 일으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죄송합니다만 지금 지부장님께서 자리에 안 계십니다. 나중에 약속을 잡으시고 다시 방문하시는 것이 훨씬 편하실 것입니다."
직원의 말에 루이네가 대번에 실망했다.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본 제론이 재미있다는 듯 빙긋 웃었다.
"괜히 말 둘러대느라 식은땀 흘릴 필요 없다. 지부장에게 이것만 보여 주면 돼. 최대한 서두르도록."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반짝이는 금속판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금과 특별한 금속을 섞어 만든 듯한 빛깔이었다.
그 위에는 복잡한 문양과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직원은 그것을 제대로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직원은 제론에게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한 뒤 급히 어딘가로 달려갔다.
왠지 금속판의 재질이나 모습이 심상치 않아서 허투루 반응할 수가 없었다.
직원이 안으로 후다닥 들어가자, 루이네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괜찮을까요?"
제론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씨익 웃어 주었다. 어차피 결과가 말해 줄 테니까.
직원이 후다닥 달려간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두 사람이 우당탕 달려왔다. 하나는 조금 전 달려간 직원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후함이 느껴지는 중년인이었다.
그가 바로 이곳 디아만트 상단 나베 공작령 지부의 지부장이었다.
지부장은 제론 앞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중한 자세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차 바쁠 텐데 용건만 간단히 합시다.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뭐든 성심껏 도와 드리겠습니다."
지부장의 태도에 루이네는 입이 벌어지는지도 모를 정도로 놀랐다. 그리고 새삼 제론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했다. 역시 붉은 학살자였다.
"공증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공증 말씀입니까? 그 정도야 전혀 어려울 것 없지요. 언제 가면 됩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내일 갈 생각이니 미리 준비를 부탁합니다."
"절대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한데…… 어떤 공증인지 미리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 준비가 용이한지라……."
제론은 빙긋 웃으며 아베티스 영지의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는 내내 지부장의 표정이 이리저리 변했다.
"대단하시군요. 그 나베 공작가의 행사를 이렇게 완벽히 막아 내시다니."
지부장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그는 귀족이지만 상인이기도 했다. 이번 일이 나베 공작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아베티스 영지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단숨에 계산해 냈다.
아마도 이것은 향후 디아만트 상단에 상당한 이득을 안겨 줄 것이다. 정보는 곧 힘이고, 돈이었다.
"그럼 내일 약속한 시간에 성으로 가겠습니다."
지부장이 공손히 인사하자, 제론은 그 인사를 대충 받고는 상단 지부를 나섰다.
아직 숙소를 정하지 않았으니 적당한 자리를 잡아야만 했다. 제론은 그조차 신중하게 골랐다. 아마 나베 공작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나설 것이다.
'주변에 있는 저 날파리들도 싹 정리해 버려야겠어.'
제론은 아주 적당한 숙소 하나를 발견했다. 습격하기 좋은 곳이었다. 또한 도둑이 설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저기로 하지."
루이네가 의아한 표정으로 숙소와 제론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녀가 보기에도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정말로 저기에서 묵을 건가요?"
"왜? 마음에 안 들어?"
루이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걸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모든 주도권은 제론이 꽉 틀어쥐고 있었다.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그곳에 묵었다. 문과 창문이 많고, 각 층의 높이가 낮은 여관에 말이다.
"하, 한방에서 자자고요?"
루이네가 당황하며 물었다. 제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제안을 했는데, 그녀 입장에선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난 잠을 안 잘 테니까 침대는 네가 써."
제론의 말에 루이네가 입을 벌렸다. 이건 제안이 아니라 통보였다.
"하, 하지만……."
"안전을 위해서다. 지금 우리를 노리는 자들이 제법 많아."
제론의 말에 루이네는 더 이상 반론을 제시할 수 없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 엄청나게 두려웠다. 나베 공작이 이번 일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이렇게 일이 끝나는 걸 보고만 있겠는가.
"딱 하루 남았어. 과연 나베 공작이 어떻게 나올까?"
루이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돌아서서 침대로 갔다. 침대에 가만히 누운 루이네는 잠을 청하려 애썼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제론과 한방에 있는데 어떻게 쉽게 잠들 수 있겠는가.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제론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제론은 방 한가운데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사방으로 감각을 퍼트리고 있었다.
숙소를 이곳으로 정한 이유가 적의 대규모 습격을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계획은 머릿속으로 다 세워 놓은 상태였다.
위이이이잉!
심장의 마나링이 맹렬히 회전했다. 그러자 제론이 앉은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최근 이런저런 마법을 자주 쓰다 보니 실력이 쑥쑥 늘어났다. 게다가 쓰는 마법이 하나같이 어려운 것뿐이었다. 이는 제론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실전에서 펼치기 때문에 더 큰 효과를 봤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론은 이 건물 전체에 특별한 마법을 걸 생각이었다. 세밀하고 복잡한 마법을 광범위하게 설치해야 하기에 지금까지 펼쳤던 그 어떤 마법보다도 어렵고 까다로웠다.
유지 시간이 비교적 짧았기에 효과가 반감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적이 금방 몰려오기만 하면 정말로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마법은 오로지 루이네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공격 마법은 필요 없었다. 제론 혼자서 어떤 놈들이 몰려오더라도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었다. 설사 기간트를 끌고 와도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빨리 유적을 클리어해야 하는데…….'
요즘 다른 일에 바빠 유적을 소홀히 했다. 사실 자신이 가진 힘의 근본은 유적에서 왔다. 그러니 유적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게 맞다.
하지만 일이 너무 많았다. 이번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도 내전이 끝나 가니 거기에 또 신경을 써야 한다.
이번에야말로 슈린 공작가를 완전히 끝장낼 때가 되었다. 그들은 아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완벽하게 몰락할 테니까 말이다.
수많은 기척이 건물을 향해 다가왔다.
제론은 천천히 일어나 검을 뽑았다. 얼마 전 싸우다가 빼앗은 아주 평범한 롱소드였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의 손에 들린 이상, 그 어떤 명검보다 더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성큼성큼 걸어서 방을 나서는 제론에게서 진득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오늘 이곳을 습격하는 자는 누구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리라.
"으음."
루이네는 몸을 뒤척이다가 문득 잠에서 깼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자, 삐그덕거리며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헉!"
루이네는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일단 제론부터 찾아야 했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론은 방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앉은 채로 자는 듯했다.
"하아."
루이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푹 잘 수 있었다. 피로가 싹 풀려서 정말로 개운했다.
일단 기지개를 켜서 몸을 일깨운 루이네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차피 제론과 한방에 있어서 옷을 다 입고 잤기 때문에 따로 옷을 갈아입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루이네는 조용히 제론에게 다가가 앉아 있는 모습을 살펴봤다.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전혀 눈을 뜨거나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중요한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제론을 방해할 수 없었다. 루이네는 일단 가볍게 씻기로 하고 살금살금 움직였다.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제론이 느끼기에는 엄청나게 부산스러웠다. 결국 제론은 눈을 떴다. 어차피 루이네가 일어나면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
"준비가 끝났으면 가지."
"벌써요?"
"시간 끌어서 좋을 게 없잖아. 디아만트 상단 지부에 들렀다가 바로 가는 걸로 하지."
루이네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움직였다. 어쨌든 씻기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제론은 루이네가 씻느라고 부산을 떠는 동안 물의 정령 네로를 불렀다.
네로는 이럴 때 참 유용하게 쓰인다.
촤아악!
네로가 제론의 몸을 깨끗이 씻어 냈다. 그리고 물기까지 뽀송뽀송 말려 주었다.
제론은 피로가 조금 가시는 걸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사이 루이네도 대충 준비를 끝냈다.
두 사람은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오늘부로 아베티스 영지의 암운은 끝난다. 루이네는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점점 힘이 샘솟았다.
☆ ☆ ☆
나베 공작은 이를 갈았다. 결국 실패한 것이다. 나베 공작의 시선은 시종일관 제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 일이 실패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으니 분노가 그쪽으로 흐르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간밤에 보내 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제론의 말에 나베 공작이 자신도 모르게 이를 뿌득 갈았다. 지난밤에 얼마나 많은 손실을 입었는가. 그동안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 키운 중요한 전력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나베 공작은 일단 잡아떼고는 루이네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아쉬움과 욕정, 그리고 분노가 뒤섞여서 눈빛이 수시로 변했다.
"계약서를 확인하겠습니다."
공증인으로 따라온 디아만트 상단의 지부장이 말을 꺼냈다. 나베 공작은 그를 노려봤다. 감히 자신의 영지에서 장사를 하면서 이따위로 나오다니, 참기가 어려웠다.
나베 공작은 지부장을 노려보면서 계약서를 건넸다. 지부장은 그것을 받아 루이네의 계약서와 꼼꼼히 비교했다.
보통 공증인은 그 정도까지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부장은 제론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임무가 있는지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맞군요. 자, 이제 채무를 이행하시면 됩니다."
지부장의 말에 제론이 미리 준비한 가방을 앞으로 내밀었다. 상당히 커다란 가방이었다. 제론은 그 가방을 확 뒤집었다.
촤르륵!
잘 다듬어진 테페룸괴가 와르르 쏟아졌다.
모두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테페룸을 한자리에서 보는 건 다들 처음이었다.
"확인해 보시죠."
제론의 말에 나베 공작이 떨리는 손으로 테페룸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물론 그래 봐야 전문가가 아니니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자신이 봤던 다른 테페룸과 다르지 않으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물론 나베 공작은 그냥 이대로 대충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즉시 옆의 수하에게 명령해 전문가를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그 방면의 전문가 몇 명이 들어왔다. 공작령에서 가장 뛰어난 대장장이와 엔지니어, 그리고 마법사였다. 그들이 함께 알아보면 금방 가짜를 판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나베 공작의 명령에 따라 모든 테페룸괴를 하나씩 확인했다.
그들 역시 이렇게 많은 테페룸은 처음이었는지라 다들 손을 덜덜 떨면서 확인했다. 워낙 양이 많았기에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모두 진품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적지 않게 놀라고 감탄했다. 이렇게 정교하게 다듬어진 테페룸괴는 처음 봤다. 이런 식으로 테페룸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대체 이걸 누가 제련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대장장이의 물음에 엔지니어와 마법사가 눈을 반짝이며 루이네를 바라봤다. 그들도 궁금했다. 대체 누가 이렇게 테페룸을 다룰 수 있는지 말이다.
루이네는 그들의 반짝이는 시선에 난감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론에게 돌아갔다.
그런 모습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은 나베 공작이었다.
"왜들 그러나? 설마 저 테페룸에 문제라고 있나?"
세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고?"
대장장이가 테페룸괴 하나를 들어서 나베 공작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테페룸괴는 이렇게 매끈하지 않습니다. 테페룸이 워낙 다루기 어려운 금속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가?"
나베 공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테페룸괴를 살폈다. 확실히 단면이 매끄러웠다. 마치 잘 제련된 금괴나 철괴를 보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다른 테페룸괴는 이 정도로 매끄럽지 않았던 것 같았다. 울퉁불퉁하다기보다는 좀 듬성듬성한 느낌이었다. 작은 조각들을 억지로 뭉쳐 놓은 것 같았다.
"호오, 그러고 보니 그렇군."
테페룸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하게 뜨거운 불이 필요했다. 그런 불을 만들려면 반드시 마법을 써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법을 이용해도 테페룸을 제대로 녹이거나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약간의 변형이 가능하게 만드는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테페룸괴의 형태가 그런 식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미리 준비한 틀에 테페룸을 넣고 마법의 불로 이어 붙이는 식이었다.
한데 이 테페룸괴는 완전히 달랐다.
만일 이런 식으로 테페룸을 제련할 수 있다면 기간트의 마나 코어가 완전히 달라진다. 기간트의 마나 코어에는 제대로 녹이지 못해 억지로 둥글게 만든 테페룸 덩어리가 들어간다.
그들은 제론이 준 테페룸괴를 보고 분명히 특별한 방법이 쓰였다고 판단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모양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면 향후 테페룸에 관계된 모든 일을 주도하는 게 가능했다.
세 사람의 시선을 받은 제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그걸 알려 줘야 하지?"
제론의 말에 세 사람이 당황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했다. 이런 대단한 기술이 있다면 그걸 왜 공개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기술에 대한 열망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일제히 나베 공작을 바라봤다.
나베 공작도 대번에 상황을 이해했다. 그 정도 머리도 없으면서 공작령을 다스리고 다른 영지에 암수를 뻗치는 일이 가능할 리 있겠는가.
"소개비를 내지. 아니면 따로 원하는 게 있나?"
제론은 그 말에 빙긋 웃었다. 그리고 대꾸도 하지 않고 지부장을 쳐다봤다.
"마저 진행하시죠."
그 말에 지부장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확인이 끝나셨습니까?"
나베 공작이 이를 갈며 제론을 노려봤다. 감히 자신의 말을 무시하다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일은 일이었다.
"그래, 끝났다. 한데 내 말에는 대답을 안 해 줄 건가?"
제론은 지부장을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나베 공작을 쳐다봤다.
"저건 원래 처음 구할 때부터 저 상태였습니다."
나베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제론을 노려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제론이 빙긋 웃었다.
"이번에 유적을 발견했다는 얘기 못 들었습니까? 하이쓰 산맥에서 발견한 유적, 모르십니까?"
나베 공작이 이를 으득 갈았다.
"그래서 그 유적에서 발견한 테페룸이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나베 공작이 고개를 돌려 세 전문가를 쳐다봤다. 그들의 표정에 진한 아쉬움과 허탈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고대 유물 중에 테페룸을 정교하게 다듬은 물건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것 역시 그런 물건인 모양입니다."
마법사가 나서서 말했다. 그는 현재 크란 제국의 마탑주가 고대의 테페룸 동전을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고대에는 테페룸을 다루는 특별한 기술이 있고, 고대의 테페룸괴는 분명히 이런 형태일 거라고 추측했다.
뭔가 찜찜했지만 더 따지기가 애매했다. 물론 나베 공작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설사 이런 테페룸을 만들 기술이 없다 하더라도, 이런 것이 나온 유적에는 또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있겠는가.
'그런데 좀 이상하긴 하군.'
이번에 아베티스 영지의 가신 중 하나가 발굴한 유적 목록을 확인했다고 전해 왔다. 그 목록은 이미 나베 공작도 확인했다.
한데 목록 어디에도 테페룸괴 같은 물건은 없었다. 거기서 쓸모 있는 물건이라고는 기간트가 전부였다.
하면 아직 유적 발굴이 제대로 끝나지 않았거나, 아니면 목록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베 공작은 두 가지 모두라고 판단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유적 발굴이 모두 끝났을 리 없었다.
유적을 부술 각오로, 또 발굴에 목숨을 걸 각오로 했다면 끝났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유물을 건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베 공작은 그 유적에 욕심이 생겼다. 아직 목록으로 작성하지 못한 물건 중에 지금 루이네가 가져온 테페룸괴보다 훨씬 대단한 유물이 잔뜩 있을 것만 같았다.
'이번 일로 손실이 상당하긴 하지만, 유적을 제대로 발굴하면 몽땅 메우고도 남지.'
유적 발굴이 모두 끝났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고 단순한 유적을 발굴하더라도 걸리는 시간이 상당했다.
게다가 루이네가 발견한 유적은 하이쓰 산맥 깊은 곳에 위치한다. 그곳에서 유물을 발굴해 가져오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아니, 이렇게 빚을 탕감할 정도로 많은 유물을 가져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곳에 보낸 추격대와의 연락이 끊겼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살아 있다면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 유적을 빼앗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전력이 너무 모자랐던 것이 분명해.'
나베 공작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어쩌면 루이네 일행이 나베 공작가가 보낸 추격대를 이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 험한 하이쓰 산맥에서 유적까지 발굴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베 공작은 이번 일을 여기서 마무리 짓고, 유적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아베티스 영지가 다시 살아나 나머지 유적을 발굴할 힘을 만들기 전에 말이다.
"좋아. 그럼 서로 바쁜 것 같으니 이쯤에서 끝내지."
나베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계약서를 쫙쫙 찢었다. 그러자 루이네가 감회 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든 계약서를 찢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찢는 바람에 계약서는 몽땅 작은 종잇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에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고작 이 종이쪼가리 하나 때문에 가문이 풍비박산 나고 그런 모진 고생을 했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루이네가 나베 공작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했다. 그리고 빛났다.
나베 공작은 그런 루이네의 얼굴을 보며 입맛만 다셨다. 입에 다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걸 보고 있자니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다들 돌아갔다.
나베 공작은 자리에 앉아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즉시 가신을 소집했다.
며칠 후, 나베 공작가에서 상당한 전력이 빠져나갔다. 그들의 목표는 하이쓰 산맥이었다.
그렇게 전격적으로 결정된 데에는 은밀한 비선을 통해 얻은 정보가 주효했다. 하이쓰 산맥에 있는 유적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그 정보는 아베티스 영지의 가신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그 가신에게 정보를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루이네였다. 마치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준 정보였다.
물론 시간이 지나며 그 가신은 서서히 몰락했다. 그 뒤에 루이네가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루이네는 아베티스 영지를 쇄신했다. 워낙 단호하고 강력한 쇄신이었기에 어마어마한 태풍이 되어 영지를 강타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쇄신의 폭풍은 아베티스 영지에게 발전의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아베티스 영지는 헥서 왕국에서 나베 공작가를 견제할 정도로 성장해 갔다.
또한 나베 공작가는 아베티스 영지의 채무 변제를 기점으로 서서히 몰락해 갔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서 있던 제론은 유유히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 전에 아베티스 영지 근처에 있다던 유적을 등록하는 건 잊지 않았다.